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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역사 10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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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최고의 한천두 (韓天斗)초상화 그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고양시 최고의 한천두 (韓天斗)초상화 그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우리시 행신2동에는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肖像畵) 한점이 있습니다. 청주 한씨 한천두 (韓天斗) 장군의 초상화 그림 입니다. 정확히는 광해군 당시인 1613년도에 그려진 인물화 입니다. 한천두는 본래 고양군 행신리 소만마을 사람으로 1563년에 태어나 1649년에 돌아간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벼슬은 동지중추부사까지 지낸 인물 입니다. 현재 후손이 제사를 모시면서 잘 보관하고 있지요.. 우리시와 협의해서 경기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는데 그 가치가 인정되어 한번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3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시와 협의해 보물 지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세로 220cm, 가로 110cm 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전신상에 호랑이 그림이 있는 관복을 입고 있는 초상화 입니다. 초상화와 함께 교지도 있는데 국내에서는 초상화와 교지, 그린사람, 글을 쓴 사람 , 보존상자, 등이 모두 남아있는 보기드문 문화유산 입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현재의 행신동 소만마을에 묘소가 있었는데 , 묘소 이장작업시 미이라 형태로 시신이 출토되어 역사. 문화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후손이 상가 임대 등을 포기하고 상가건물 3층 전체를 이 초상화 보존을 위해 비어두고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명나라 궁녀 관산동 굴저 (굴씨) 여인 이야기

국내 유일의 명나라 궁녀 관산동 굴저 (굴씨) 여인 이야기

우리시 덕양구 관산동 대자리 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굴씨의 이름은 굴저이며 어린나이에 명나라 궁녀가 되었다가 명나라가 멸망되면서 다시 청나라 궁녀가 되었지요.. 그리고 조선에서 볼모로 끌려온 소현세자 (인조의 큰 아들)을 모시게 됩니다. 이후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자 4명의 궁녀와 함께 한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3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고양시 서삼릉에 묻히게 됩니다. 소현세자가 죽자 궁녀4명은 다시 청국으로 돌아가는데 굴씨는 이를 거부하고 조선땅에 남게 됩니다. 대단한 미인, 비파 연주가, 소현세자의 후손들을 지킨 충신, 새와 동물을 특이한 방법으로 키운 동물 애호가, 청나라와의 외교마찰을 중재한 외교가, 중국과의 통역사, 여인들의 새로운 머리 미용법 전파, 등이 굴씨의 주요한 사항 입니다. 여승으로 출가한 후 70세에 돌아갔는데 마지막 유언은  " 효종대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청나라를 북벌할 때 이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보고 싶으니 중국으로 가는 길 고양에 묻어달라 였다 " 입니다. 굴씨를 위해 남긴시의 마지막 부분은  " 아름다운 미인은 죽어 흙으로 묻혀 있는데 그녀의 비파연주 소리는 아직도 그윽한 향기로 이곳 무덤에 남아있네 " 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양시 관산동에서 중국으로 연결되는 대자골에 무덤이 있는 것 입니다. 지난 주말에 시민 40여명과 함께 이곳 굴씨 묘를 답사하여 그 여운을 이번 고양이야기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일산신도시의 수호목, 호수공원 회화나무 이야기

일산신도시의 수호목, 호수공원 회화나무 이야기

1989년 시작된 일산신도시 개발, 이과정에서 유일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호수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현재 시에서 보호 하고 있는 보호목으로 수령은 300여년 되었으며 나무이름은 주엽리 회화나무 입니다. 이 나무가 있는 곳을 일산 신도시 개발 이전부터 상주, 하주라는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불렀고 전주이씨, 달성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 한가운데 주민들이  가을에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고사, 수호목제를 지내던 나무가 유일하게  호수공원 회화나무 광장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회화나무는 궁궐, 사찰, 향교, 서원 등에 주로 심는 귀한 나무입니다.  콩과에 속하며 강낭콩과 같은 열매와 함께 봄에는 예쁜 꽃도 핍니다. 위치는 호수공원 자연학습장 부근, 승리교회 앞 입니다.  호수공원의 터줒대감 나무이며 일산신도시지역의 수호목이기도 합니다. 이 나무는 고양시 출신 3선 국회의원을 배출한 나무로도 유명 합니다. 한강 제방 붕괴 당시에도 살아 남아 옛 주엽리 주민들은 이 나무를 보고 자신의 집자리를 가늠하곤 합니다.
고양시 북한산 아미타사 석굴암 (石窟庵) 이야기

고양시 북한산 아미타사 석굴암 (石窟庵) 이야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원효봉 아래에 아미타사(옛 덕암사)가 있습니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서문, 또는 북한산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 아미타사 이정표 안내문이 있지요. 이정표를 따라 원효교를 건너 약 200m 정도 가면 소나무 숲길 뒤로 아미타사가 나옵니다. 절 중앙에 큰 마당이 있고 이 마당 한가운데 멋진 바위가 자리해 있습니다. 이 사찰은 비구니 스님들만 계시는 곳으로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 여래 좌상 등이 모셔져 있고 국가에서 지정한 전통사찰 이기도 합니다. 한옥으로 지어진 사찰은 주변의 의상봉, 원효봉과 어울어져 멋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풍광이 좋은 산신각에서 보이는 고양시 전경도 멋진 곳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고봉산, 정발산은 물론 멀리 강화도 마니산까지도 조망이 가능한 곳입니다. 산신각 우측에는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큰 거북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보는 사람 마다 모두 거북바위라며 신기해 합니다. 이 거북바위 아래로는 아미타사의 주불전 (主佛殿)인 대웅전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대웅전이 일반 목조 건축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석굴 (石窟)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굴을 다듬어 현재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100명이 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큰 규모입니다. 더운 여름에 가면 에어컨 없이도 시원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석굴 밖과는 온도 차이가 큰 곳입니다. 벽과 천장을 보면 이곳이 완전히 석굴 속 임을 확인 해 볼 수 있습니다. 석굴 밖인 산신각에서는 완전히 커다란 바위 속의 숨겨진 불전으로 보입니다. 이 굴은 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 (元曉) 대사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재 본 석굴암에는 원효대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석굴속의 대웅전 안에는 모두 세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재질은 나무를 깎아 만든 목조 불상입니다. 불상의 정교함과 온화한 미소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입니다. 마치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과 같이 이 석굴의 서쪽으로는 지하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물은 석굴암의 온도를 늘 선선하게 유지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성 주차장에서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풍광이 아름다운 아미타사의 석굴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와도 좋을 듯 합니다  
고양의 봉수대 (烽燧臺), 봉화 (烽火) 이야기

고양의 봉수대 (烽燧臺), 봉화 (烽火) 이야기

옛 기록을 보면 고양지역에는 모두 5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양을 연결하는 관서대로, 경의로, 의주로가 지나는 고양지역은 그 만큼 역사, 군사,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였습니다. 북쪽의 외적이 칩입을 하거나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신속하게 왕이 있는 중앙에 보고하는 교통, 신호 체계가 바로 봉수였습니다. 고양지역의 봉수는 모두 파주지역에서 받아 한양 (서울)로 전달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양지역의 대표적인 봉수로는 일산동구 고봉동, 중산동의 경계에 자리한 고봉봉수가 있습니다. 한강과 의주로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해 있지요.. 고봉 봉수의 동쪽으로는 독산 (문봉)봉수가 있습니다. 파주의 형제봉 (봉서산)에서 받아 서울 모악으로 전달하는 봉수대 였구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강매동 봉대산 봉수입니다. 강매동 매화정 마을 뒤편에 있는데요 정상에는 정자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일명 해포 봉수라 부르기도 했지요.. 산 정상에서는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있습니다. 일산지역에 있는 고봉봉수로부터 연락을 받아 서울 모악 (안산)에 봉수신호를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봉수는 덕양구 향동동, 용두동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현 봉수대입니다. 봉산 봉수대 유적은 현재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되는 구간입니다. 이곳 정상에서도 한강과 함께 고양시의 내륙지역을 모두 관망할 수 있는 요지입니다.
한강의 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극복한 독립운동가 이가순 선생

한강의 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극복한 독립운동가 이가순 선생

일제 강점기 당시 , 고양 땅은 농사짓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원당, 벽제, 신도 등 창릉천과 공릉천이 흐르는 지역은 가뭄을 비교적 쉽게 넘기며 농사를 지었으나 한강에 막혀 있는 지도, 일산, 송포 지역은 가뭄과 함께 홍수 등으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된 독립운동가 양곡 이가순 선생이 능곡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아들 이원재 선생과 함께 관개 수리 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한강의 물을 끌어들이고 행주에서 일산, 송포에 이르기까지 물길을 만들어 누구나 농사를 지을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갈대밭을 옥토로 만들어 이후 일산쌀, 송포쌀은 우리지역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고양지역의 위대한 관개 사업가 양곡 이가순 선생은 1867년에 태어나 1943년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시 능곡동 관할의 토당동 삼성당 마을에 거주하며 관개사업을 벌인 겁니다. 이러한 선생과 아드님인 원재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04월 고양지역의 유지들이 선생의 송덕비를 건립해 현존 하고 있지요.. 관개 사업이 큰 난 후에는 자신의 사유지 등을 국가에 헌납하여 지금의 수리조합 (농어촌기반공사)의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조합장으로 이원재 선생이 추대 되었습니다. 최근 고양시에서 이가순 선생 숭모회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화재 심의를 거쳐 선생의 송덕비를 고양시 향토 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선생의 후손으로는 세계적인 음악가 남매인 정명훈, 정경화, 정명화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가순 선생의 외손주들입니다.
고양시가 본관 (本貫)인 행주 기씨 (幸州奇氏) 이야기

고양시가 본관 (本貫)인 행주 기씨 (幸州奇氏) 이야기

고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이 현재 몇 곳 있죠..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문중이 바로 행주기씨 문중입니다. 행주기씨와 관련된 유적은 고양시 곳곳에 있는데요. 행주산성내 기씨 탄생지 비석(행주기씨 유허비)을 비롯하여 성사동에는 사당 및 덕양서원 등이 자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기씨들은 본관을 행주로 하고 있습니다. 행주기씨들은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크게 번성 했습니다. 고려말의 기황후가 배출되고 조선시대에도 정승에 오른 관리, 학자, 충신이 가문을 크게 빛 냈습니다. 고양 팔현의 한분이신 복재 기준 선생, 청백리로 유명한 기건 , 기응세, 기자오, 기철, 등이 행주기씨에서는 이름난 분들입니다. 특히 호남지역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고봉 기대승 선생도 이곳 고양시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낙남 (落南)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고양시 덕양구 성사1동 사근절이 마을에는 행주기씨의 사당과 덕양서원, 재실,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사당 뒤편으로는 기건 선생과 기준, 등 행주기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무덤과 비석 등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중 몇기는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당 앞으로 서삼릉 누리길이 지나고 인근에 3호선 원당역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입니다.
고양시에서 제일 큰 대문 , 북한산성 대서문 (大西門) 이야기

고양시에서 제일 큰 대문 , 북한산성 대서문 (大西門) 이야기

우리 고양시에서 가장 큰 대문(大門)은 어디에 있을까요. 높이가 지붕까지 10m에 이르고 차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조선조 숙종 당시에 만들어진 문이 고양시에 있지요. 지붕과 성곽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성문은 물론 문루(門樓), 기와지붕, 용마루에 이르기 까지 그 규모가 대단히 크죠.. 이 문은 조선조 숙종당시에 만들어진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 입니다. 북한산성의 여러 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하며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대서문입니다. 현재 국가지정 사적지로 지정되어 문화재청, 고양시 등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대서문은 북한산성을 대표하는 문입니다. 북한산성의 4개 대문은 물론 16개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치성 (雉城)을 갗추고 있는 큰 문입니다. 성문과 문루 사이에는 네모난 석재에 구멍이 뚫려 있는 여장 (女墻)이 정면에 있습니다. 여장 아래로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두 2개가 좌우에 만들어져 있지요. 이 용두는 특이하게 이곳 대서문에서만 볼 수 있는 조각품 인데요,, 앞쪽에는 용이 크게 입을 벌려 성을 지키며,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곽 안쪽에는 입을 다문 귀여운 용두 2개가 성곽 중간 위치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서문 곳곳에는 6,25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지요.. 총알은 물론 포격을 맞아 벽이 깨지고 쪼개진 모습이 이 성문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서문의 현판 (懸板)은 대한민국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대서문이란 글씨는 또렷하게 남아 있으나 좌측의 낙관 및 글쓴이의 이름은 하얀색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4,19 이후 하야한 후 후대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운 것이라 전해집니다. 대서문의 문루에 앉으면 의상봉과 원효봉 사이의 계곡에 부는 바람이 참으로 시원합니다. 성곽 아래로는 도시화된 고양시, 서울시 일원이 관망되고 성곽 뒤편으로는 원효봉과 백운대 등 북한산의 주봉들이 위엄있게 솟아 있습니다. 대서문과 백운대 사이에는 봉우리가 없어 날이 맑으면 정상의 태극기와 등산객을 조망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북한산성 대서문이 가장 예쁘게 보일 때는 봄날 벚꽃이 만발하고 해가 지며 노을이 서로 어우러지는 시간 이다. 조선의 국왕 숙종대왕도 이 문을 통해 북한산성 안쪽의 행궁을 왕래 했습니다. 지금은 국왕대신 일상에서 지친 많은 시민들이 북한산을 오르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리는 개선문, 서울은 광화문, 고양시는 북한산성 대서문이 대표적인 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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