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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문화유산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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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번 종별 번호 지정명칭 지정일자 위치
    연번 종별 번호 지정명칭 지정일자 위치
    1 보물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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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보물 제611호. 전체 높이 3.42m, 비신 높이 2.34m, 너비 1.09m, 두께 22㎝. 고려 말기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普愚)의 탑비이다. 보우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로서, 고려 말 불교계의 통합과 정계(政界)의 혁신을 도모하였던 인물이다. 탑비는 1385년(우왕 11)에 건립되었다.
    비는 이수(?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모습으로, 귀부의 조각은 형식화되었으며 이수에 새겨진 운룡문(雲龍文)·연화문 등도 퇴화된 느낌이다. 비신 상단에는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이라는 두전(頭篆)이 있고, 그 아래 유공권풍(柳公權風)의 해서체 비문이 있으며, 뒷면의 음기에는 문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77.08.22 덕양구 북한동 15
    2 보물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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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

     

    고양시 태고사 원증국사탑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으로,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위로 탑신(塔身)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맨 밑단이 되는 4각의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그 윗면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8각의 가운데받침돌은 각 모서리에 원기둥을 새긴 후 면마다 큼직한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은 굵은 선으로 연꽃을 새겼고, 꽃잎 안에 고사리무늬를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으로 위쪽이 좁아져서 지붕돌 밑면에 들어 맞게 되어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투박하게 솟아 있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83.12.27 덕양구 북한동 15
    3 보물 묘법연화경(언해) 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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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법연화경(언해) 권 1,4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묘법연화경(언해) 권 1,4

    이 묘법연화경(언해) 권1, 4 (妙法蓮華經(諺解) 卷一, 四)』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구마라집의 한역본에 계환(戒環)이 주해(註解)하고 일여(一如)가 집주(集註)한 것을 저본으로 세조가 직접 경문에 구결을 달고 윤사로 등이 간경도감에서 번역하여 1463년(세조 9)에 목판으로 간행한 국역불경이다. 한글로 번역하여 正音의 명맥을 이어 발전을 보게 한 귀중한 국역자료인 점과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판본의 형태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중세국어사 및 조선전기 판본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불교판본학 및 중세국어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현존본은 대부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0.08.25 일산동구 137-48(식사로)
    4 보물 자치통감 권19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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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권193~195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자치통감 권193~195

    『자치통감』은 중국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중국통사이다. 이 책은 조선 세종의 명을 받들어 윤회(尹淮)·권도(權蹈)·설순(?循)·김말(金末)·유의손(柳義孫) 등 문신 40여명이 사마광의 『통감음주(通鑑音注)』, 『통감원위(通鑑源委)』, 『통감집람(通鑑輯覽)』, 『통감석의(通鑑釋義)』등 역대 중요 주석서를 바탕으로 교정하고 가감해서 세종 18년(1436)에 주자소에서 초주갑인자로 찍어내었는데 총294권이었다. 이 책의 편집이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에서 행해진 관계로『자치통감사정전훈의(資治通鑑思政殿訓義)』로 불리운다. 권193-195의 3권 1책의 잔본이지만 인쇄상태와 보존상태는 거의 온전하다.

    현재 이와 동일본으로 권236-238의 3권1책이 보물 제1281-1호(국립중앙박물관)로 지정되었고, 권131-135, 246-250의 10권 2책이 보물 제1281-2호(서울역사박물관)로 지정되어 있다. 전본이 아주 드문 희귀본과 집현전 학사를 동원하여 편찬한 책이라는 점에서 조선전기의 인쇄사 및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료된다.

    12.12.27 일산동구 137-48(식사로)
    5 보물 재조본유가사지론 권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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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조본유가사지론 권42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재조본유가사지론 권42

    『재조본 유가사지론 권42(再雕本瑜伽師地論卷四十二』은 고려 高宗34년(1247)에 판각되어 그 무렵에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대장경 재조본이다. 현재 보물 제969호(유가사지론 권64) 및 보물 제972호(유가사지론 권55) 지정본과 동일본으로 판단되나, 권42는 현재 유일본이다.
    최근 이 『유가사지론』의 경문에서 고려시대에 각필로 구결을 표시한 현상들이 밝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도 주목되고 있는 판본 중에 하나이다.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직후인 13세기 중후기에 인출한 초기간본으로 인쇄상태가 선명하고, 현전하는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 간본 중에서 고려 때 간인한 것이 드문데다 상태가 비교적 온전하여 그 가치가 높다.

    10.08.25 일산동구 137-48(식사로)
    6 보물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언해)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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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권9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권9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은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가 번역하고, 송나라의 계환(戒環)이 해설한 것에 세종 31년(1449)에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에 따라 번역을 시작하여 뒤로 미루어졌다가 혜각존자 신미(信眉)·한계희(韓繼禧)·김수온(金守溫) 등에 국역과 교정을 명하여 세조 7년(1461)에 완성한 것이다.
    인출은 세조 원년(1455)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만든 을해자의 대자·중자·소자를 사용하고, 한글은 이 능엄경 국역본을 찍기 위해 새로 주조한 한글 활자를 사용하여 세조 7년(1462)에 이루어졌다.
    원각사 소장의 권9는 세조연간에 인출된 을해자본이며, 본문 중간중간에 교정지시가 주서(朱書)로 되어 있어 교정본임을 알 수 있으며, 표지가 결락되고 첫

    째 장이 마모되어 첫째 장이 마모되어글자가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으나 나머지는 온전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이와 동일본인 보물 제763호로 지정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본 권9 앞부분의 1~26장과 뒷부분 1장이 결락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을해자본 권9도 완전하게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전기 국어학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2.12.27 일산동구 137-48(식사로)
    7 보물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券一~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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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권9

    20.01.06 일산동구 137-48(식사로)
    8 사적 고양 행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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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행주산성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의 해발 124.8m의 덕양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포곡식의 토축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km 정도이다.
    유적의 남쪽은 한강에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유적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산성은 강안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포옹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특히 이 산성은 선조 16년(1593) 권율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63.01.21 덕양구 행주내동 산26
    9 사적 고양 벽제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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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벽제관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벽제관지

    조선시대 수도 한양으로 통하는 6개 대로(大路) 가운데 의주로(義州路)에 위치했던 객관(客館)인 벽제관이 있었던 곳이다. 원래 벽제관은 현재의 벽제관지에서 서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웃 고골(고읍)에 초축되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인조3)에 이전하면서 고양향교와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임금을 뵙기 전에 예를 갖추던 곳이며, 반대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들이 긴 여정을 준비하는 외교적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후 벽제관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0년대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삼문까지 허물어져 그 터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965년에는 벽제관의 역사적 의의와 기능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144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한편, 벽제관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에 의해 그 원형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벽제관이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이 명나라 군을 이긴 승전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총독부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에 의해 벽제관의 부속건물인 육각정(六角亭)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었으며,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縣) 이와쿠니시(岩國市) 모미지타니(紅葉) 공원에 남아 있다.

    65.02.02 덕양구 벽제관로 34-16
    10 사적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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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북한산성

    북한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시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 경계의 북한산 정상 능선을 따라 위치하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북한산성의 명칭으로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로서 북한산성의 명칭이 등장하나 삼국시대의 북한산성이 현재의 북한산성과 같은 곳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 고종19년(1232) 몽고군의 2차 침입 시 이곳에서의 격전과 거란의 침입 시 태조의 재궁을 이곳으로 옮긴 일도 있었고 조선 숙종 대에는 대대적인 수축 및 증축이 있었다.

    성벽은 내탁과 內外俠築으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함으로써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기록에는 14개소의 성문이 있었고 이 중 5개소에 문루가 세워졌으며 3개소의 장대지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26개소의 저수지와 99개소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이 불가능하다.

    68.12.05 덕양구 북한동 산 1-1
    11 사적 고양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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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고양왕릉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공양왕릉

    1394년(태조3) 축조된 고려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능으로 쌍릉형식을 이루고 있다. 비석, 상석,석등, 석호, 문인석, 무인석 등 능 주위에 배치된 석물들은 그 양식과 수법이 간략하고 소박해 고려왕릉의 전통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70.02.28 덕양구 원당동 산65-6
    12 사적 고양 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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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서오릉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서오릉

    서오릉이란 조선왕조의 다섯 능 즉 경릉(敬陵,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창릉(昌陵,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익릉(翼陵,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 홍릉(弘陵, 정성왕후의 능)이 이곳에 모여 있어서 일컫는 명칭이다. 서오릉 지역이 왕실묘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1457)에 세자 장(덕종)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을 쓰고부터이다. 서오릉에는 이 5개의 능 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인 순창원과 숙종의 추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대빈묘가 있다.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면적의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이며 고양시청에서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으로 이어진 55번 지방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70.05.26 덕양구 용두동 산30-1
    13 사적 고양 서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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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서삼릉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서삼릉

    서삼릉이란 고양시 원당동에 소재한 孝陵, 禧陵, 睿陵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총 면적은 약 7만여 평이며 중종의 계비인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자리로 택해지면서 처음 능자리로 사용되었다. 본래는 130여만여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여러 곳으로 분할되어 약 7만여 평이 남았으며 이 중 절반가량이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3기의 능 이외에도 태실, 공주·옹주묘, 소경원, 효창원 등이 있다.

    70.05.26 덕양구 원당동38-4
    14 사적 북한산성 행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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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행궁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북한산성 행궁지

    궁은 유사시 왕의 행재소가 되는 곳으로 북한산성이 축성을 시작하기 1달 전인 숙종 37년 5월 25일에 당시 산성의 공사를 주관하던 감동당상인 김우항에 의해 건립이 처음 제기되었다. 동왕 5월 왕의 윤허를 얻어 8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위가 많고 지세가 험하여 공사에 큰 어려움을 겪자 조정에서는 영건청을 두고 호조판서 김수항과 공조판서 이언강을 주관당상으로 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목재는 산성밖의 삼천동에서 얻어서 지었는데 동왕 37년 10월 까지는 내전의 기와, 외전의 정초가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해 2월부터는 다시 내전의 창호·청판·토역 등의 수장공사와 외전의 입주상량 등 일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숙종 38년 5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행궁 규모는 내전이 좌·우 상방 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퇴 18칸을 합한 총 28칸이었다. 이 정전 외에 또 좌·우각방·청·대문·수라소 등의 부속건물이 35칸이나 되었다. 외전 역시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 내행각방 12칸을 위시한 루(樓)·청·고간(庫間)·대문 등 총 33칸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그 후 일제 시대까지 그 건물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언제 지금과 같은 모습의 터만 남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일제 시대에 찍힌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단국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동 행궁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160호(1996.07.22)로 지정되었다가 사적 제479호(2007.06.08)로 변경 지정되었다.

    07.06.08 덕양구 북한동 169번지
    15 천연기념물 고양 송포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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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송포 백송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송포 백송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송포의 백송은 나이가 약 23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1.5m, 가슴높이 둘레 2.39m이다. 나무의 모습은 옆에서 보면 부채살처럼 퍼져 역삼각형으로 보이며, 다른 백송에 비해 나무껍질이 희지 않은 편이다. 이 나무의 유래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유하겸이라는 사람이 중국의 사절로부터 백송 두 그루를 받아, 그 가운데 한 그루를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최상규(송포 백송의 소유자)의 조상에게 준 것을 묘지 주변에 심은 것이 크게 자란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던 최수원 장군이 고향에 오는 길에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나무라고 하여 한동안 이 나무를 당송(唐松)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며,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알려주는 나무로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62.12.07 일산서구 덕이동 산207
    16 국가무형유산 불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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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화장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불화장

    - 불화는 불탑, 불상 등의 함께 불교의 신앙대상이며, 그 제작 형태에 따라 탱화(幀畵), 경화(경화), 벽화(벽화) 등으로 분류 됨.
    - 불화 제작 기능은 단청장 보유자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종목의 특성을 고려하여 단일종목으로 분리, 불화장으로 지정함.

    06.01.10 덕양구 대자동 243-13
    17 명승 삼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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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산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삼각산

    삼각산은 북한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산봉으로서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仁壽峰, 810.5m), 만경대(萬景臺, 787.0m)로 구성되어 있다. 산봉은 쥐라기 말의 대보화강암〔흑운모 화강암 또는 화강섬록암〕과 형상을 달리한 화강암 돔(granite dome)으로 되어 있어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돔을 형성하는 산 사면의 경사는 대체로 70°이상에 달하고 있다. 백운대 정상에는 약 500㎡의 평탄한 곳이 있어 많은 등반객들이 오르고 있다.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라 호칭되었으며 정상부의 산세는 불규칙하다.

    03.10.31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
    18 등록유산 고양 구 일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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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구 일산역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구 일산역사

    1933년에 지은 경의선 일산역의 역사이다. ㅡ자형 평면 구조에 ┼자형 박공지붕이다. 1930년대에 건설한 경부선 다른 역들의 전형적인 모습과 달리 정면의 박공 부위가 폭은 비교적 넓은 반면 높이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경의선 복선전철화에 따라 새로 들어서게 되는 일산역사는 2009년 말 완공될 예정이다. 한국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문화,역사적 배경을 지닌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06.12.04 일산서구 일산2동 655-628
    19 등록유산 고양 행주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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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행주성당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행주성당

    고양 행주성당은 1910년에 지어진 한옥성당으로 1928년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하여 당시 사용하였던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하였으며, 이후 1949년 증축하면서 기록한 상량 묵서도 남아있어 건물의 변천과정을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10.02.19 덕양구 행주외동 194
    20 등록유산 판사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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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법복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판사법복

    이 판사 법복은 김홍섭(1915~1965)이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재직 중에 입었던 법복으로 검정색 모직가운으로 목 부분에는 스탠드칼라를 부착하고 검정색 법모와 함께 착용하였다.
    1953년 3월 5일 발표한 ‘판사·검사·변호사 및 법원 서기 복제규칙’에 따라 법복 앞가슴에 무궁화 무늬(지름 20cm)와 그 안에 무궁화(지름 10cm)를 수놓았으며, 법모의 무궁화 무늬(지름 5cm)를 수놓았는데, 판사의 경우에는 무궁화 무늬의 색이 백색이다.
    해방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적인 법복제도에 따라 제정된 판사 법복으로 착용자가 확실한 유물이다.

    13.08.26 일산동구 호수로 550
    21 등록유산 변호사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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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법복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변호사법복

    변호사 법복 중 일제강점기 변호사 법복은 김홍섭(1915 ~ 1965)이 1941년 변호사로 활동할 때 착용한 법복이다.
    1920년 법복에 관한 규정(대정 9년 7월 27일자 제정 공포 칙령 제 222호 및 대정 9년 8월 2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제 2393호)에 의거하여 검은색 모직 바탕에 오동나무꽃 무늬를 수놓은 법복과 구름무늬가 있는 모자를 착용하였다.
    1953년 변호사 법복과 더불어 1966년 이후 현재는 사라진 변호사 법복을 볼 수 있는 유물이다.

    13.08.27 일산동구 호수로 550
    22 등록유산 개성 복식부기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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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 복식부기 장부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개성 복식부기 장부

    개성 복식부기 장부는 개성지역에서 활동했던 박재도(朴在大) 상인 집안의 회계장부 14책과 다수의 문서 일괄로 1887년에서 1912년까지 25년 동안의 대략 30만 건의 거래 내역이 1,298쪽의 분량에 기재되어 있다.
    주요장부인 일기장, 장책, 주회계와 보조장부인 각처전답문기등록(各處田畓文記謄錄), 각인물출입기일(各人物出入記一), 각인회계책(各人會計冊), 외상초(外上抄), 그 외의 어음, 편지, 증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개장, 총계장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이익잉여금처분배분에 이르기까

    지 전 과정을 복식부기 방식으로 작성하여 대차균형의 원리와 원가회계, 그리고 투자자와 경영인과의 이익배분계약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유물로 회계사적, 사료적 가치가 높다.

    14.02.25 일산서구 대선로
    23 등록유산 고양 흥국사 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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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흥국사 대방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흥국사 대방

    고양 흥국사 대방은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근대기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염불 수행 공간과 누ㆍ승방ㆍ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갖추고 대웅전을 실제적ㆍ상징적 불단으로 삼아 염불 수행을 하도록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복합 법당으로, 기존의 전통방식을 벗어나 복합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적 건축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는 등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특한 건축 형식과 공간 구성 및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점에서 등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양 흥국사 대방은「興國寺誌(흥국사지)」의 사료와 현재 경내에 있는 <漢美山興國寺萬日會記碑(한미산흥국사만일회기비)>(1929) 등의 기록을 통해 1915년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07.01 덕양구 흥국사길 82
    24 등록유산 고양 행주수위관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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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행주수위관측소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행주수위관측소

    고양 행주수위관측소는 부자식 자기수위계를 설치하여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던 시설로, 정통(井筒)과 관측소로 이루어진 타워 및 강안(江岸)에서 관측소를 연결하는 교각 등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지만 현재 교각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는 않다.
    이 시설은 1930년대 최초로 설치된 이후로 근대기에 한강 수위를 지속적으로 관측하였지만, 1979년 관측이 종료되었으며, 다음해인 1980년에는 폐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양 행주수위관측소는 건립 당시의 토목기술 및 수위측정방식 등을 알 수 있는 시설물로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등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4.09.01 덕양구 행주내동 78-9외
    25 등록유산 색복 장려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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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복 장려 깃발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색복 장려 깃발

    일제강점기에 조선 문화 및 풍속 말살 정책의 하나로 백의 폐지를 위해 실시한 색복 장려 정책에 사용된 것으로 색복장려운동의 구체적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실물 자료로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깃발이다. 우리의 암울한 시기의 복식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사료로의 가치가 있다.

    14.10.29 덕양구 화중로 104번길 60
    26 등록유산 고양 대성암 아미타삼존괘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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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대성암 아미타삼존괘불도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고양 대성암 아미타삼존괘불도

    근대기 활발하게 활동하며 현대까지 화맥이 이어지고 있는 금호 약효의 제자인 향암 성엽이 제작한 불화로 금호 약효 화파의 도상과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20세기 전반 경의 괘불봉안의식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말기∼20세기 초반에 서울 경기지역의 사찰경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작품이다. 강렬한 안료의 색감과 음영법, 독특한 문양 등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낭도 원래 모습대로 잘 남아 있어 등록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15.08.18 덕양구 대서문길 396-1 대성암
    27 등록유산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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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초안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초안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조소앙(본명 조용은, 1887~1958)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하여 독립운동과 건국의 방침 등을 정리한 국한문혼용의 친필문서이다. 조소앙은 임정(臨政)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사상가로, 임시정부 수립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광복 직후까지 주요한 지도 자로 활동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원안대로 통과되었으며, 1948년 제헌헌법의 기본적 바탕이 되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 후 어떠한 국가를 세우려했는지를 밝혀주

    는 중요한 자료로, 그가 고심하여 수정한 흔적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 조소앙은 광복 후 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하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8.12.31 일산서구 일산동 1945-1
  • 연번 종별 번호 지정명칭 지정일자 위치
    연번 종별 번호 지정명칭 지정일자 위치
    1 유형문화유산 제74호 행주대첩비(구·중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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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대첩비(구·중건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행주대첩비(구·중건비)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왜병을 격퇴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1기는 선조 35년(1602)에 또 1기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이다. 현재 舊碑는 행주산성 정상 비각안에 있으며 新碑는 충장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구비의 비문은 崔립이 짓고 韓石峰이 글씨를 썼으며 金尙容이 전액을 썼다. 비문 끝의 追記는 李恒福이 지었고 金玄成이 썼다. 이 비는 오래되어 마모가 심해지자 비를 새로 새기면서 한 때 방치되었으나 해방 후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 그 이후 비각이 훼손되자 1970년 비각을 새로 개축하였다.

    78.10.10 구비 : 행주내동 65-4 / 중건비 : 행주산성로 127-17
    2 유형문화유산 제87호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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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조선 숙종 41년(1715) 조선 후기의 군사기관인 금위영을 옮긴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원래 금위영은 소동문 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이건기비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현재 북한산성 내 대성암 아래에 있다.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조선 숙종 37년 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으로 하여금 백제의 고성인 북한산성을 나누어 개축하게 하고 각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유사시에 대응하게 하라고 하니 그 해 10월에 성곽의 보수가 완료되었다는 내용이다.

    79.09.03 덕양구 북한동 132
    3 유형문화유산 제143호 고양흥국사극락구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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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흥국사극락구품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양흥국사극락구품도

    한미산흥국사극락구품도는 전체화면을 상하좌우 각각3등분하여 총 9면에 아미타불에 의한 극락정토의 아미타화상장면과 왕생장면을 상품, 중품,하품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으로 흥국사 마타전에 봉안되어 있다. 본래 극락구품도는 구품왕생 장면을 그려야하나 여기서는 5품의 왕생장면만을 묘사하였다.

    91.10.19 덕양구 흥국사길 82
    4 유형문화유산 제188호 고양봉성암전성능대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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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봉성암전성능대사부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봉성암전성능대사부도

    북한산 태고사 뒤편의 봉성암 경내에 있다. 부도탑의 구조는 4개의 판석을 짜맞춘 方形 地臺石위에 방형 하대석과 중대석, 팔각모양의 상대석이 안치되었다. 그 위로 팔각의 탑신석 팔각의 옥개석,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팔각의 옥개석 일부는 현재 파괴되어 있으며 전체규모는 280㎝에 이른다. 탑의 기단부 앞에는 74×70×59㎝의 불규칙한 육면체 석재가 놓여져 있는데 부도탑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부도탑은 6.25당시 폭격으로 일부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인데 완전한 상태는 아니며 탑신부의 부재는 소실된 상태이다.

    03.09.04 덕양구 북한동 204
    5 유형문화유산 제189호 고양흥국사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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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흥국사괘불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이트>

    고양흥국사괘불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189호. 면 바탕에 채색. 세로 628㎝, 가로 381㎝. 경기도 고양 흥국사에 봉안된 야외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도(掛佛圖)이다. 1902년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비(淳妃) 엄씨(嚴氏)가 발원하고 왕실이 시주자가 되었다. 순비 엄씨는 상궁으로 궁궐에 입궁하여 황귀비(皇貴妃)의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로 조선 말기 많은 불사를 후원하였다.
    괘불도의 도상(圖像)은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협시보살인 관음·대세지보살, 가섭·아난존자와 문수·보현보살의 7존상을 그린 아미타괘불로 당시의 불교 신앙이 반영되었다. 불화 제작은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까지 근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경선 응석(慶船 應釋)과 12명의 화승(?僧)들이 담당하였다.

    03.09.04 덕양구 흥국사길 82
    6 유형문화유산 제190호 고양상운사목조아미타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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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상운사목조아미타삼존불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상운사목조아미타삼존불

    상운사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한 목조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대좌에는 墨書로 발원문이 적혀 있는데, ‘강희 53년(1713) 7월 5일 시작하여 8월 6일 일을 완성하여 露積寺 極樂寶殿 아미타연대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이 1713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크기나 조각수법에서 아미타불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 따로 제작된 보살상을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 밑바닥에 ‘1800년 4월 15일 관음보살을 蓋金하여’라는 개금기록을 통하여 관음보살 역시 19세기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03.09.04 덕양구 대서문길 197-22
    7 유형문화유산 제215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리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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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리니경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리니경

    조계종 21교구 송광사 소속 정각스님이 2005년 5월 고서판매 회사 "책사랑(범우사)"로부터 매입 소장하던 것으로 이를 송광사 일산포교당 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에 기증한 것임.
    1484년 화암사에서 개판된 것으로,『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 합철되어 온전히 전하는 인출본이 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각 초기의 인출본으로 낙장이 없고 보존 상태가 좋다.

    09.02.09 일산동구 137-28(식사로)
    8 유형문화유산 제216호 육경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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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경합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육경합부

    조계종 21교구 송광사 소속 정각스님이 2005년 6월 고서경매회사 "화봉문고"에서 매입 소장하던 것으로 이를 송광사 일산포교당<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에 기증했다.
    공개된 육경합부 판본 중 최초 판본에 해당하며, 맨 뒤에는 간행 유래에 대한 성달생의 발문이 실려 있다. 한편 성달생에 의해 필사된 것을 모본으로 판각한 것으로, 이 판본은 이후 거의 모든 육경합부 판본의 복각 모델이 되고 있다. 본문에 낙장이 없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나, 표지가 개장된 흠이 있다.
    책머리에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정씨가 시주하여 변상도를 판각했다>

    는 내용을 적은 변상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는 1405년 안심사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 변상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최초 인출 당시 또는 후대의 소장가가 이를 앞부분에 첨가해 둔 것으로 여겨진다.

    09.02.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9 유형문화유산 제217호 조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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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경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조상경

    조계종 21교구 송광사 소속 정각스님이 2005년 4월 "한국고서협회 서울고서전" 중 고서경매회사 "금요고서방"에서 매입 소장하던 것으로 이를 송광사 일산포교당 "대한불교조계종 원각사"에 기증했다.
    조상경은 조선시대 승려인 지탁이 찬집한 1권 1책의 불교의식집으로 여러 경전에 산재해 있는 불보살상의 조성에 대한 제반 의식과 절차에 관한 내용을 모아 체계화한 책이다. 한편 각 의식 절차를 설명하고 의식의 내용에 따른 의의를 부연하였으며, 이를 행할 때 외우는 주문의 경우 범어?한문?한글을 병기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원각사 소장 조상경」은 1575년 전라도 담양 추월산 용천사엣 간행한 것으로, 현존 조상경 판본 중 연대가 가장 오랜 것이며 전래가 희소하여 문화유산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이책은 현재 3권이 발견되어 고려대학교와 부산 복천사에 소장되어 있다.

    09.02.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0 유형문화유산 제240호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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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원각사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범패 연구에 활용될수 있는 각필 음조 표시가 보이고 있으며 매우 희귀한 판본으로 판단된다.

    10.03.23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1 유형문화유산 제241호 치문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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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원각사치문경훈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치문경훈

    현재 원각사에만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이고, 다른 판본에서는 볼수 없는 원간본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간행시에 별도로 첨부된 송암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하다.

    10.03.23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2 유형문화유산 제242호 달마대사관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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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원각사달마대사관심론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달마대사관심론

    지정 대사본인 문수사판은 한국 선종사에 있어서 사상적 이념을 제공한 불교문헌으로 평가되고 있고, 국내에서 원각사에만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매우 희귀한 선종문헌의 일종이다.

    10.03.23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3 유형문화유산 제246호 덕암사 목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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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암사 목조보살좌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덕암사 목조보살좌상

    덕암사 대웅전 내 수미단 위에 봉안된 삼존불 가운데 본존은 최근 작품이지만, 양 협시보살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유물이다. 2010년 12월 8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246호로 지정되었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 원효봉 아래에 위치한 덕암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10.12.08 덕양구 대서문길 145-63
    14 유형문화유산 제259호 길상사육경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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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길상사육경합부

    <출처:문화유산청 사이트>

    길상사육경합부

    <고양시 길상사 육경합부>는 선장본線裝本 1책으로 1491년(성종22)에 낙안 징광사澄光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다. 서지사항은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에 계선은 없고, 반엽半葉 8행 17자이다. 『육경합부』는 조선초기에 널리 독송되었던『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대불정수릉엄신주大佛頂首楞嚴神呪』,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관세음보살예문觀世音菩薩禮文』,『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등 여섯 가지 경전을 휴대와 독송에 편리하도록 한데 모아 간행한 것이다. 책에는 ‘육경합부’라는 말이 보이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육경합부로 통칭하고 있다. 후대에는 이중에서 『금강경』, 『보문품』,『아미타경』만을 수록한 ‘삼경합부三經合部’ 판본이 자주 간행되기도 하였다.

    『육경합부』는 1424년(세종6) 전라북도 완주군 안심사에서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 필사한 안심사본을 저본으로 복각 간행한 판본이 많다. 길상사『육경합부』역시 서체가 비슷하여 안심사본을 바탕으로 판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세음보살예문』끝부분에는 ‘홍치사신해 유월 일 전라도낙안징광사개판弘治四辛亥 六月 日 全羅道樂安澄光寺開板’이라는 간행기록이 있어 1491년(성종22)에 낙안 징광사에서 판각된 목판본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징광사본의 후쇄본後印本이다. 징광사 판본은 현재까지 다른 곳에 남아 있지 않은 유일본으로 불서 판본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11.10.04 일산동구 식사동 산70-2
    15 유형문화유산 제260호 길상사 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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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길상사묘법연화경

    <출처:ggc 사이트>

    길상사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은 1책 7권의 완본으로 1561년(명종16)에 간행한 목판본이다. 서지사항은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郭에 계선은 없고, 반엽半葉 8행 17자이다.
    『묘법연화경』은 흔히 『법화경』이라고 부르며, 대승경전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경전을 독송 서사 간행하는 것을 공덕으로 묘사한 내용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책은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하고 송나라의 계환戒環이 풀이한 계환해본戒環解本이다.

    이 책의 권1과 권4 첫머리에는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변상도變相圖 판화가 삽입되어 있다. 권3의 말미에는 수십 명에 이르는 간행할 때의 시주자 명단이 있다.
    이 길상사 『묘법연화경』은 성삼문의 조부인 성달생成達生(1376~1444)과 성개成槪(?~1440) 형제가 독서편리를 위해 중자로 판서본板書本을 써서 1443년(세종25)에 화암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저본으로 1561년(명종16)에 전라도 장흥長興 천관사天冠寺에서 복각 간행한 판본이다. 천관사본으로는 국내에 유일한 완질본으로서 불서 판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1.10.04 일산동구 식사동 산70-2
    16 유형문화유산 제284호 고양 원각사 신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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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원각사 신중도

    <출처:ggc 사이트>

    고양 원각사 신중도

    〈고양 원각사 신중도〉는 1778년(정조2) 6월에 김희손金喜孫과 봉혜奉慧의 시주로, 화승 포관抱冠을 비롯하여 성잠性岑·수엽守曄·서인瑞印·행징幸澄이 함께 조성하였다. 구름으로 상하 2단으로 분리하여 상단에는 제석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중을, 하단에는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배치하였다. 상단에 큼직하게 표현된 제석천은 꽃을 받쳐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제석천 뒤에는 높

    은 의자가 표현되어 있다. 제석천 주위로 일월천자와 보살, 천인과 동자 등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제석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하단에 위태천은 새 날개 모양의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채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으며 좌우에는 원유관을 쓴 인물과 용각, 용수염이 표현된 용, 역발한 붉은 머리의 야차, 새부리 모양의 가루다 등이 확인된다.
    18세기 전반에는 제석천도와 천룡도가 따로 제작되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한 화면에 상하의 2단 구도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화기상의 명칭도 ‘제석천룡합위帝釋天龍合位’라고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19세기 유행하게 되는 다양한 신중도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양 원각사 신중도는 신중도형식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기에는 조성장소와 봉안사찰 등이 적혀 있지 않아 원래 어떤 곳에 봉안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수화승인 포관이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을 볼 때 아마도 경상도 지역의 사찰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관은 18세기 중반 활동한 불화승으로 1755년 (영조31) 임한任閑을 수화승首畵僧하여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1755)와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삼장보살도(1755)를 제작하였으며, 이후 1769년(영조45) 수화승 상정尙淨과 함께 경주 불국사 불사에 참여하여 대웅전 사천왕벽화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1775년 이후 수화승이 되어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1775), 은해사 백장암 대웅전 현왕도(1782)를 조성하는 등 1755년과 1782년 사이에 주로 활동하였다.
    현재 조선후기 18세기 제작된 신중도 가운데 이른 시기에 속하며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신체비례와 원만한 상호, 정연한 배치 등 전체적으로 구성이 뛰어나고 인물표현과 채색 등에서 신중도 가운데서도 수작에 속한다. 또한 화기에 제작연대와 조성화원 및 시주질, 연화질 등의 기록이 남아있어 매우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경상도 지역의 대표화승 가운데 하나였던 포관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작품으로 1775년 이후 1782년에 이르는 그의 공백기를 메워주는 작품으로도 중요하다.

    14.05.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7 유형문화유산 제285호 대방광불화엄경 권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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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광불화엄경 권62

    <출처:ggc 사이트>

    대방광불화엄경 권62

    『화엄경』은 대승불교 초기 경전으로 신라시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화엄사상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조선시대 불교 전문강원의 대교과 과정에서 학습해 왔다. 완전한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그 본래 의미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의 꽃으로 만든 화환과 같은 장식’을 말하며, 이를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 부른다.
    화엄경은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

    那佛을 주불로 삼고 있다. 이 경전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번역된 한역본漢譯本은 불타발타라의 진본晉本, 실차난타의 주본周本, 반야의 정원본貞元本 삼본三本 화엄이 동아시아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본 화엄경은 698년 실차난타實叉難陀가 39품으로 다시 새로 번역한 80화엄이다. 이때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당나라의 국호를 일시 주周나라로 바꾸었던 시기이므로 이를 흔히 주본周本 또는 주역周譯, 신역新譯 등으로 별칭하기도 한다. 이 주본 80화엄은 가장 방대하게 번역되어 내용상으로도 가장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번역도 수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엄경은 삼본이 모두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수량이 방대하여 고려시대에 판각된 현전본이 다른 경전에 비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현전하는 판본 중에는 신라하대 9~10세기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진본 화엄경(권20, 33) 등이 최근 학계에 소개되어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1098년에 협주호장인 이필선李必先의 시재로 개판된 진본 권37과 증륜사拯倫寺에서 주지 양춘?春에 의해 간행된 진본 권33의 판본이 전하고 있으며, 해인사에서 진본 권45가 판각되어 현재까지 경판이 보관되고 있다.
    원각사 소장의 주본화엄경 권62는 권수의 표지가 근래 새로 개장하였고 권말의〈音義〉부분에는 훼손 상태가 심하여 임시로 배접해 놓은 상태이다. 변란은 권자나 접장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상하단변上下單邊으로 되어 있으며, 행수는 각 장이 24행으로 매 행은 17자로 배자되어 있다. 판수제板首題는 점련하여 잘 보이지 않으나 ‘周 第六十二 二丈’로 기재되어 있으며, 간혹 그 아래에 ‘六英’과 ‘□貞’ 등 각수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현재 고려본 주본화엄경은 80권 가운데 30여점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본이다. 원각사 소장본 권62는 아직까지 해당 권수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더욱 중요한 판본이다.

    14.05.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8 유형문화유산 제286호 대방광원각수다리요의경 (언해)1-1, 1-2,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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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광원각수다리요의경 (언해)1-1, 1-2, 2-1, 2-2

    <출처:ggc 사이트>

    대방광원각수다리요의경 (언해)1-1, 1-2, 2-1, 2-2

    『원각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불교 전문강원 사교과四敎科 과정의 필수과목으로 학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693년 북인도 계빈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의 한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고, 경명에 화엄경의 ‘원만수다라’와 능엄경의 ‘요의’를 조합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내용은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12장은 석가모니가 12보살과 문답한 것을 각각 1장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 경이 널리 독송되고 여러 주석서가 만들어져서 불교수행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은 그 내용이 훌륭한 이론과 실천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체가 유려하고 사상이 심원하며, 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현전본으로는 1380년(고려 우왕6)에 이색이 지은 발문이 있는 고려본을 비롯하여, 1461년(세조7)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활자본, 1464년(세조10)에 함허 득통得通이 주석을 단 한문본, 1465년에 세조가 정문에 구결을 달고 이를 언해하여 개판한 간경도감 국역본, 1465년에 간경도감 언해본을 저본으로 재편한 을유자乙酉字로 찍어낸 활자본 등이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사찰본으로 1570년(선조3)에 전라도 안심사에서 간경도감판을 복각한 판본을 비롯하여 대략 12종이 현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양시 원각사 소장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에서 세조가 친히 경문에 한글 구결을 달고 한계희韓繼禧 등이 국역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4권 2책의 영본이다. 표지는 본래 5침으로 제본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표제는 ‘圓覺經’으로 묵서 기재되어 있다. 권두의 서명은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의 권수표시는 한문본과는 달리 복잡하게 편성되어 있다. 이 책은 본문의 체제가 경문 아래에 당나라 종밀宗密의 주소가 소자 쌍행으로 부기되어 있는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어 본래 종밀의 주소본을 바탕으로 국역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지사항은 반엽을 기준으로 변란은 사주단변으로 행자수는 9행17자로 배자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大黑口와 흑어미黑魚尾가 보이고 있으며, 어미 사이에 있는 판심제는 위에 ‘圓覺’이란 약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권수 및 장수 표시가 나타나 있다. 지질은 간혹 고정지가 보이고 있어 세조대에 사용된 전형적인 인경지로 보인다. 이 책은 국역본으로 조선시대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4.05.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19 유형문화유산 제287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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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1권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북인도 고승인 불타다라(佛陀多羅)가 한역(漢譯)한 것으로 ‘대방광원각경’, ‘원각수다라요의경’, ‘원각요의경’으로 불리는데, 흔히 『원각경』이라고 한다. 이 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으로 보는 학자가 많고, 문헌학적으로 의문시되고는 있으나, 그 내용이 대승(大乘)의 참뜻을 잘 표현하고 있어 한국과 중국에서 널리 유통되어 왔으며, 한국에서는 한문본과 언해본, 구결본 등이 간행되었다. 이 경은 불교 수행에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경전으로 송나라 효종의 주가 달려 있다. 고려 우왕시기의 목판본으로서 고려시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중에서 독자적으로 판하본을 마련하여 간행한 것이다.

    14.05.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20 유형문화유산 제296호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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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는 불화하단 양쪽에 기록된 화기를 통해 1792년(乾隆57년 壬子) 수화승(首畵僧) 상훈(尙訓)을 비롯해 삼유(三裕),최순(最淳),덕초(德楚),품윤(稟允) 등이 참여하여 약사전 후불탱으로 조성한 것이다. 가로가 긴 화면에는 석가모니삼존을 중심으로 좌ㆍ우에 여러보살과 제자, 그리고 양쪽 하단에 사천왕 등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채색은 두광 등에서 진한 녹색을 사용하였지만, 의습과 바탕에 채도가 높은 붉은색과 주황색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의 수화원인 상훈은 17세기 후반부터 화적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는 1777년 수밀과 함께 서울 봉은사 시왕도(동국대박물관 소장)를 그렸으며, 1786년에는 문효세자 묘소(文孝世子 墓所 造成所)에 화승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788년에는 수화승 연홍과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서 대적광전의 석가모니후불도와 삼장도를 그리고, 1798년 장조 현릉원 조성소(莊祖 顯陵園 造成所)에 화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작품은 화면이 약화되어 바탕천과 채색의 박락이 심하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지만, 정확한 제작시기와 수화승 상훈의 작풍과 보조화원과의 관계, 더불어 18세기 후반 서울, 경기지역 화승의 화풍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4.08.29 덕양구 흥국사길 82
    21 유형문화유산 제301호 고양 원각사 불조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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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원각사 불조삼경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고양 원각사 불조삼경

    고양시 원각사 소장 『불조삼경』은 고려시대 1384년에 송판본을 저본으로 간행된 판본이다. 이 책의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권수에 몽산 덕이가 지원병술至元丙戌(1286)에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서문 다음에 『불설사십이장경』, 『불유교경』, 『위산경책』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고, 권말에 고려의 이색李穡과 송나라의 익대益大가 쓴 발문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편성체계로 보면 전체 3권 1책에 해당되나, 실제 권수의 구분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책머리에는 원나라 몽산 덕이가 짓고 초서로 쓴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말미의 여백에 몽산화상의 호인 ‘절목수絶牧?’, ‘몽산蒙山’이란 방형의 목기木記가 보이고 있다. 서문 다음 장에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이란 권두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권말에는 한산부원군인 이색이 1384년에 지은 발문과 원간본元刊本에 수록되어 있던 익대益大가 1286년에 짓고 쓴 발문이 복각되어 있다. 이는 몽산이 『삼경』을 합집 형태로 재편하기 이전에 각기 독립된 단행본 형태로 간행 유포되었으며, 그 후 1286년에 몽산에 의해 오중의 휴휴암에서 합집 형태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간행된 판본은 그의 말년에 고려인과의 교류를 통해 고려에 전수되어 1314년 강원도 원주의 정각사에서 처음으로 개판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려시대 1361년과 1384년에 중간되었다.
    원각사 소장본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邊欄은 상하단변上下單邊 좌우쌍변左右雙邊으로 고려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본문에는 계선이 있으며, 반엽을 기준으로 8행 17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에는 판심이 보이고 있는데, 폭이 매우 좁고 어미는 매우 작은 흑어미로 상단에만 있다. 판심의 상흑어미 아래로 판심제와 장차가 새겨 있다. 자체字體는 전형적인 방형의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중국 송원대 판본에 자주 보이는 서체이다. 이 책은 여말선초 사이에 한국불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나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직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만이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불교학의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서지학의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판본이다.

    15.03.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22 유형문화유산 제302호 고양 원각사 고려시대 다라니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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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원각사 고려시대 다라니 일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고양 원각사 고려시대 다라니 일괄

    고양시 원각사에 소장되어 있는 다라니陀羅尼 자료는 밀교부密敎部에 속하는 경전經典 또는 주문呪文을 밀교 의식 및 사찰 불사를 위한 용도로 목판에 판각 인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탑과 불상을 조성할 때 다라니를 시납하였으나 주로는 불상의 충전充塡을 목적으로 불복에 넣었다.
    고양 원각사에 소장 고려시대 다라니는 1150년과 1166년에 인쇄된 『일체비밀다라니一切秘密陀羅尼』와 1152년에 인쇄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다라니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陀羅尼』 등 15종 37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5종의 자료는 간행시기가 분명하여 다른 다라니 자료의 간행시기를 고증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다. 간기가 있는 것 중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다라니』는 현재까지 알려진 『보협인다라니寶?印?羅尼』 중 범자梵字로 인쇄된 가장 빠른 시기의 실물자료이다.

    하단에는 ‘범학대사도휘서해안사개판시천덕사년사월일기梵學大師道輝書海晏寺開板時天德四年四月日記’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를 통해 이 다라니는 범학대사 도희梵學大師道輝가 ‘천덕天德 4년(1152년)’에 개성의 현화사 인근에 있는 사찰인 해안사海晏寺에서 인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양 원각사 소장 고려 다라니 일괄 중에는 간기는 없으나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 제작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5종이 된다. 그 중 『일체비밀다라니』는 전체 400여종의 각종 범자진언이 수록된 자료로, 간기가 누락되어 있기는 하나, 우리나라 초기 인쇄문화의 정황을 알려주는 실물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안동 보광사와 해인사 불복장에서 수습된 동일한 다라니에 기록되어 있는 ‘時庚午歲(1150) 六月卜日 海東長安廣濟鋪開板’과 ‘思遠 重校’라는 발문을 통해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이 중교重校해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양 원각사 고려시대 다라니 일괄은 모두 12~13세기경 제작된 것들로 고려초기 인쇄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범학梵學과 만다라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5.03.09 일산동구 137-48(식사로)
    23 유형문화유산 제303호 고양 대성암 목활자본 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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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대성암 목활자본 묘법연화경

    <출처:ggc 사이트>

    고양 대성암 목활자본 묘법연화경

    고양 대성암 소장 목활자본 『묘법연화경』은 선장본線裝本 7책으로, 1876년(고종13)에 간행된 목활자본이다.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상하단변上下單邊에 계선이 없고, 반곽半郭에 10행 18자, 백어미白魚尾이다. 판심제板心題는 ‘법화경法華經’이고, 그 아래에 권수와 장차가 표시되어 있다. 권수에는 ‘영산대법회靈山大法會’라는 제목 아래 영산교주 석가여래불을 비롯한 불보살을 필두로,

    삼전三殿(주상·중궁·세자)을 비롯한 대왕대비·왕대비·대비 등 왕실 인사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수록되어, 이 책이 왕실을 위해 간행된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7책의 말미에 귤은橘隱 노인, 곧 영의정을 지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이 쓴 발문과 금강산에 주석하던 호은 축잠虎隱竺岑이 쓴 발문이 수록되었다.
    다음 장의 간기에는 간행 관련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증정감인證正監印 겸 화연化緣으로 팔도총섭 고경 법능古鏡法能·교정校正에 완허 응관翫虛應觀 이하 선화禪和·선덕禪德·선백禪伯 등과 인출비구 삼강三綱에 이어 화주로 이 시기 명승인 경선 응석慶船應釋이 참여하였다. 이밖에도 별좌別座, 공사供司 등 다양한 직책과 다수의 간행인물들이 열거되고 있어 왕실불사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시주자로는 상궁 장씨張氏·월광화月光華·박씨朴氏·대덕심大德心 등 6명의 상궁이 열거되어있다.
    책등에 표기된 ‘소림사少林寺’라는 사명과 제1책의 표지에 ‘관아觀我’ 소장자 기록을 통해 한동안 '관아'라는 소림사 스님이 소장했던 서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광서원년병자중하 경기양주천마산보정사인장光緖元年丙子仲夏 京畿楊州天摩山寶晶社印藏’이라는 간기가 확인되어 이 묘법연화경은 조선후기인 1876년 양주 보정사寶晶社에서 목활자로 50부만 한정으로 간행한 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묘법연화경』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유일한 목활자본 묘법연화경으로, 국내에 전 7책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15.03.09 덕양구 대서문길 396-1
    24 유형문화유산 제304호 고양 대성암 선림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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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대성암 선림보훈

    <출처:ggc 사이트>

    고양 대성암 선림보훈

    고양 대성암 소장의 『선림보훈』은 1378년(고려 우왕4)에 충주 청룡사靑龍寺에서 간행한 목판본 1책이다. 본래 이 책은 선림의 근기가 쇠퇴해 가는 것을 우려하여 송나라의 승려 대혜 종고宗?와 죽암 사규士珪가 학덕이 높은 스님들의 좋은 말씀이나 행적들을 모으고, 이를 남송南宋의 승려 정선淨善이 선禪을 닦는 스님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 300여 편을 뽑아 출처를 밝혀서 상하 2권으로

    편찬하였다. 이를 묘기妙機가 교증校證하여 1354년 중국 원나라의 장로선사長蘆禪寺에서 간행하였는데, 그 후 고려 말에 요암 행제了庵行齊가 원나라에서 간행된 전적을 입수하여 1378년에 충주의 청룡사에서 단월 고식기高息機와 최성연崔省緣의 조연을 받아 상위尙偉와 만회万恢가 모연하여 복각 간행된 것이다. 고양 대성암 소장 『선림보훈』은 2013년 요사채 천장에서 발견된 이후 선장의 형태로 개장되었다. 전체적으로 내용상에 결락된 부분은 없으나, 오랫동안 천장에 보존되었던 탓에 권수 및 권말 일부에 누수로 인한 부분적인 훼손이 있다.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좌우쌍변左右雙邊에 계선界線이 있고, 반곽半郭에 10행 20자씩 배자되어 있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대흑구大黑口가 보이고 있고, 상하의 흑어미黑魚尾가 하향하고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권수에는 별다른 서문이나 목차 없이 바로 권두 서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다음 행에 ‘東吳沙門 淨善重集’이란 찬자가 보이고 있어 이 책이 정선淨善이 다시 편집해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하의 말미에는 중국의 장로선사長蘆禪寺에서 간행 시에 오문비구吳門比丘 영중永中이 쓴 후기가 그대로 복각되어 있어, 이 책이 중국본을 저본으로 고려에서 중간한 복각본覆刻本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석산 우곤錫山尤袞의 게송이 실려 있으며, 또한 중집자重集者인 정선淨善의 후서가 실려 있다. 권말 부분에는 고려 말 승려 환암幻菴이 1378년에 연회암宴晦菴에서 쓴 발문과 간행기록이 있어 1378년에 승려 상위尙偉와 만회万恢가 우바새優婆塞(삼보에 귀의한 남자 불자) 고식기와 우바이優婆夷(삼보에 귀의한 여자 불자) 최성연의 시주로 충주 청룡사에서 간행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대성암본과 동일한 판본이 이미 보물 제70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데, 이 책 역시 판각술이 정교하고 인쇄상태가 선명하여 보물급 가치를 지니고 있다.

    15.03.09 덕양구 대서문길 369-1
    25 유형문화유산 제316호 한천두 위성공신 교서 및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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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천두 위성공신 교서 및 초상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한천두 위성공신 교서 및 초상

    한천두韓天斗(1563~1649)는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추경樞卿으로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星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을 녹훈하기 위해 수차례 공신도감에 명하

    였지만, 선조의 거부로 수용되지 못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인 1613년(광해군5)에 이루어졌다. 위성공신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삭훈되어 80명에 달하는 공신지정 수에 비해 현재까지 많은 유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초상은 보물 제1490호인 이성윤 위성공신화상李誠胤 衛星功臣畵像과 함께 위성공신의 초상을 확인 할 수 있어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초상은 전반적으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화풍과 세부묘사를 살필수 있는 인물부분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사모와 단령은 입고 공수한 자세 및 교의와 의답椅踏, 채전의 구성과 묘사는 모두 이성윤초상과 같아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의 묘사 또한 선묘를 중심으로 담백하게 표현한 조선중기의 초상화법을 따르고 있다. 이 초상의 흉배는 회화성이 강조되어 주목된다. 소나무 아래를 거니는 모습의 호랑이를 묘사한 흉배는 기존의 도안화된 흉배 문양이 점차 회화적 요소로 변경되어가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와 소나무 등 세부표현이 명확하여 조선중기 호랑이 그림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위성공신 교서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위성공신의 내용과 구성을 모두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리고 초상·교서와 더불어 한천두 본인과 부인 충원최씨忠原崔氏의 신주 2점도 함께 전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신주와 초상을 통한 제의관계를 살펴볼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로 볼 수 있다.

    17.08.08 덕양구 행신동 741
    26 유형문화유산 제318호 박충원백자청화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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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충원백자청화묘지

    <출처:경기도>

    박충원백자청화묘지

    박충원 백자청화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로 사기판이나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다)는 16세기 중국에서 수입된 청화안료를 사용했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은 물론 백자청화묘지가 희귀하다는 점에서 지정됐다.
    제작시기가 정확하고 백자의 단정한 만듦새, 청화안료를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도 지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묘지 중에 16세기 청화백자 지석이 없다는 점에서 학술적, 조형적 가치가 있다.

    18.04.03 덕양구 주교동 17
    27 유형문화유산 제350호 고양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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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고양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2007년 서울역사박물관은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구역을 발굴조사한 결과 법상종 승려인 대지국사 법경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명문비편(銘文碑片) 255점(630여 자 확인 가능) 등 고려시대 유물 500여 점을 발굴했다.
    그동안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 스님은 고려 현종대(1009~1031) 현화사(玄化寺)의 창건과 고려 전기 법상종의 등장을 주도했던 인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스님의 생애와 활동을 입증해 줄 유일한 자료인 비문이 파손돼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번 유물 출토로 그의 출신과 나이 등을 확인하게 됐다. 조사 결과 서울역사박물관은 법경 스님이 적현(赤縣) 출신으로 승납(僧臘) 85세, 세납 92세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탑비전(塔碑殿)으로 추정되는 고려전기 건물지 등을 새로 확인했다. 대지국사법경 스님과 연관되는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높이 3.7cm에 삼불보관(三佛寶冠)을 갖춘 고려석조보살두(高麗石造菩薩頭), 은제투각칠보문장식(銀製透刻七寶文裝飾), 철제공구류(鐵製工具類) 등 고려 전ㆍ중기 희귀 유물이 출토됐다.
    삼천사(三川寺)는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기록이 남아 있는 법상종 사찰로, 서기 661년 원효가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12.19 덕양구 북한동 산1-1
    28 유형문화유산 제351호 오순필 화어해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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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필 화어해초충도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오순필 화어해초충도

    조선 후기에 궁중 화원으로 활약했던 뛰어난 화가 오순의 작품으로 넓은 여백을 남기는 과감한 공간 구성을 취하고, 활달한 필치로 꽃과 새 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점, 농담의 적절한 사용 등 우수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오순의 작품은 대개 산수화였기에 그의 다른 주제로 새롭게 화조, 영모 화풍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18.12.19 일산동구 탄중로 398
    29 유형문화유산 제353호 연주세영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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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세영첩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연주세영첩

    『연주세영첩(漣朱世榮帖)』은 조선 숙종때 문인이자 좌참찬을 역임한 호곡 남용익(南龍翼, 1628~1692)이 1602년 연천현감을 지낸 증조부인 남복시(南復始, 1557~1619)와 60년이 지난 현종 3년(1662)에 부친인 남득붕(南得朋, 1604~1678)이 연천현감으로 재임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남득붕은 현종 1년(1660) 4월 15일에 연천현감에 제수된 것에 대해 사은하였고, 1662년 8월 5일 연천현감에서 파직되었다.(『승정원일기』 현종 1년 4월 15일, “謝恩…漣川縣監南得朋.”, 『승정원일기』 현종 3년 8월 5일, “…請漣川縣監南得朋, 先罷後推. 上曰, 依啓.)

    중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문인들과 주고받았던 축하시, 송별시 등을 엮은 시첩(詩帖)이다. 『연주세영첩』중의 연(漣)은 경기도 연천(漣川), 주(朱)는 무주(茂朱)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연주세영첩』이란 “대를 이어 연천과 무주현감으로 벼슬한 영예를 기념하기 위한 시첩”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9.04.22 일산동두 탄중로 398
    30 유형문화유산 제354호 고양상운사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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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상운사석불좌상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고양상운사석불좌상

    『석불좌상은 높이가 109cm로 등신대(等身大)보다 큰 상. 두부과 몸체를 이어 붙였으며 왼손도 훼손된 상태이고 왼손에 든 지물도 원래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세부를 살펴보면, 앞머리의 중앙에 홈이 파여 있고, 눈썹은 호(弧)형으로 깊이 파이고 콧날부분은 마멸되었으며 작은 입 아래로 세로 홈이 파여져 있다.
    대의(大衣)는 이중착의법(또는 편삼, 변형편단우견이라고도 함)으로 오른쪽 어깨위를 감싼 옷자락이 넓은 띠주름을 이루며 가슴 좌우로 늘어진 대의 단이 역시 넓은 띠를 이루면서 아래로 늘어져 있다. 가슴 중앙에 수직으로 얕은 홈이 파이고 가슴의 좌우가 융기된 것과 배 부분에 산(山) 자형으로 조각하여 복부의 양감을 표현하고 있다.
    작게 조각된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몸에 대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현재는 둥근 보주형의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양 팔을 덮은 대의와 복부 아래에는 서너 개의 옷주름이 띠모양으로 새겨져 있고 다리 위를 덮은 옷자락에도 좌우로 일정한 간격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가슴에 수평으로 새겨진 내의(內衣) 중앙에서 옷자락이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대좌는 중대석이 없이 상대 앙련좌와 하대 복련좌가 서로 맞붙어 있는 형태이고 대좌의 연판 문양은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섬세하고 정교하다. 불상의 바닥에는 조선 1497년에 묵서된 4단 23행의 조성발원문이 있다.

    19.08.23 덕양구 대서문길 197-22
    31 유형문화유산 제357호 북한승도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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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승도절목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북한승도절목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인 북한산 산영루 앞 화강암 암벽에 새겨진 기문이다.
    -이 석각기문은 북한산성 관리책임자로 있던 총융사, 경리사, 무위도통사 등을 지낸 관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군과 함께 위치하는데, 비석형태가 아닌 경사면암괴면에 장방형으로 선각 구획하여 음각한 형태이다.
    - 기문의 내용은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승영사찰을 관리, 통솔하는 총섭을 선출하는 규칙 3가지를 명시한 것으로, 북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한 조선시대의 승군의 운영제도와 이를 관리하기 위한 체제를 알 수 있는 당시의 기록자료로, 19세

    기 불교계의 상황까지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 기문은 북한산 산영루 주변으로, 현 용학사 아래로 비스듬히 형성된 화강암 암반지대의 남록 하단부에 새겨져 있는데, 등산로 변에 위치하여 확인하기 쉬운 지점이다.
    - 암괴 사면에 별다른 시설없이 가로 228cm, 세로 109cm 정도의 장방형 구획면을 다듬은 후, 오른쪽에서 종서형태로 기문을 음각하였다.
    구획면 최우측에 ‘北漢僧徒節目’이라고 제목을 새기고, 21행 19~20자(총325자)로 내용을 해서체로 음각하였는데, 명문말미의 ‘乙卯’간기로 미루어 1855년(조선 철종 6)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기문은 북한산성의 총섭임용의 규칙을 3가지로 정리한 것으로,‘투표를 통해 점수가 높은 승려를 선출하고, 성밖의 승려가 도총섭이 되면 이 절목내용을 근거로 소송을 하도록 하고, 이 절목을 통해 국가에 대한 봉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라.’는 내용으로, 북한산성 승영사찰 운영내용을 담고 있다.
    - 이 자료는 조선후기 승군운영체제 자료의 유일한 <승도절목>의 금석문화유산라는 점에서‘희귀성’은 물론, 북한산성 승영사찰의 운영체제를 증명하는‘역사성’과 승군운영이라는 불교사, 요역사, 군사제도를 살필 수 있는‘학술성’가치도 크다고 판단된다.
    또한, 산영루가 건립될만한 우수한 경관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에 건립된 국가관리의 공덕비군들도 건립당시의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관성’또한 우수함

    19.08.23 덕양구 북한산동 산1-1
    32 유형문화유산 제 359호 이형부필 화양구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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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부필 화양구곡도

    19.12.20 일산동구 탄중로 398
    33 유형문화유산 제 362호 고양 강매 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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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강매 석교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강매 석교

    이 다리는 강매동 강고산 마을 창릉천 위에 있다. 본래 이 석교는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지역 등 한강연안의 서부 지역 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된 곳이다. 이 다리를 이용해 각종 농사물, 땔감, 갈당 등을 현천동, 수색, 모래내를 거쳐 서울 염촌교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현재 다리의 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교판석을 깐 모양이다. 또 교각과 교각사이에는 6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져 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양은 길게 북-남쪽으로 이어져 약간의 곡선을 이루며 매우 견고하고 세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또 각부재에 사용된 석재는 크고 장대하며 여러 각도를 이용하여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총길이 14.08m 중 남쪽 끝 3m정도는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나 나머지 부분은 아직도 견고하다.
    이 다리에 관한 기록은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이석희 편[고양군지]에 보이는데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이는 해포교는 오늘날의 석교가 아닌 목교였다. 석교 중간부분에는 ‘강매리교 경신신조’라 음각된 다리 건립 년대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볼때 1920년데 새로 다리를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다리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리옆에 오석으로 만든 비석에 기록하였으나 6.25당시에 총격으로 일부 훼손된 후 현재는 도로에 묻혀 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 강매리 석교는 축조년대에 있어 과히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조선조 전통적인 교량축조 방법의 맥을 잇고 있으며 현존하는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에서 그 문화유산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20.08.26 덕양구 강매동 660-10
    34 유형문화유산   고양 원각사 관음보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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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원각사 관음 보살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원각사 관음보살도

    -원각사 관음보살도는 수룡당 기전의 주도하에 1880년 4월에 제작된 불화로 한 폭의 그림에 관음도상과 다라니가 융합된 독특한 구성임. 조선후기 관음다라니 지송신앙이 불화 속에 시각화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음.

    - 특히 문자인 관음 관련 범자다라니가 관음보살 도상과 별개로 느껴지지 않도록 조화롭게 융합되어 있어 작품성 또한 매우 뛰어남. 이러한 화면 구성과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수룡당 기전의 화승으로서의 역량과 총지승으로서 그가 가진 또 다른 재능을 화면 속에 담아낼 수 있었던 그의 창의성에 기인함

     

    22.09.30 덕양구 행주외동 194
    35 무형유산 제22호 고양송포호미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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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송포호미걸이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송포호미걸이

    호미걸이는 일명 “호미씻이”라고도 하는데 마지막 김을 다 매고 난 뒤 올 금년 농사는 큰 일이 모두 끝났으니 내년을 대비하여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곳 호미걸이가 전래되는 대화동은 송포벌판이라는 넓은 평야가 위치한 곳으로 오랜기간 농경사회가 유지되어 온 곳이다. 송포호미걸이는 현재 조경희선생님이 호미걸이놀이 전수조교로 회장직을 맡고 있고, 김기성 선생님이 호적(태평소)전수조교로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98.04.26 일산서구 덕이로 30-7
    36 무형유산 제27-4호 고양 상여회다지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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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상여회다지소리

     

    고양 상여회다지소리

    상여소리는 보통 상여가 집을 떠나기 직전에 하는 발인(發靷)소리와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운반하면서 하는 운상(運喪)소리로 구성되며, 운상소리는 평지를 가면서 하는 소리와 다리를 건너면서 하는 소리, 산언덕을 올라가면서 하는 소리 등으로 구분됩니다. 회다지소리는 무덤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 흙에 횟가루를 섞어 넣고 다지는 일을 말합니다. 경기도 무형유산 제27-4호로 지정된 ‘고양상여 회다지소리(高陽喪輿 灰다지소리)’는 김녕김씨의 김유봉(1725년생)이 부모님의 장례 시 행했던 상례문화가 그 기원이며, 이후 그의 후손이자 토

    목 및 궁궐의 보수 공사를 담당했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의 감역을 맡았던 김성권(1867년생)이 그 맥을 복원하였으나 현대화로 인해 급격하게 전승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져있었습니다. 이런 위기에도 고양상여소리보존회에서 꾸준히 소리를 계승하고 있어 고양시의 대표적인 민요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부르는 상여소리와 회다지소리는 다른 나라에는 흔치 않은 우리나라 고유의 장례요로서 의의가 있습니다. 음악이나 문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상여소리와 회다지소리는 장례식의 의미와 분위기를 온전히 나타내는 의례요로서 큰 가치가 있습니다. ‘고양상여회다지소리’는 발인소리, 긴상여소리, 넘차소리, 염불소리, 회방아소리, 긴소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고양 지역만의 독창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17.06.16 덕양구 무원로 54번길
    37 무형유산 제31-1호 경기소리 휘몰이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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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소리 휘몰이잡가

    <출처:ggc 사이트>

    경기소리 휘몰이잡가

    잡가는 휘몰아잡가와 긴잡가라 일컫는 12잡가로 나뉜다. 경기소리 휘몰이잡가는 조선조후기인 1800년대부터 경기도 지역에서 불려진 소리로 옛 장형시조 혹은 상형시조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나 작곡자에 대한 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생과 삼패, 사계측 소리꾼일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수공업과 채소장사에 종사하던 시계측 소리꾼들이 하루의 힘든 일과를 끝내고 모여 앉아 가사와 시조에 음을 넣어 부르면서 발생했다고 보는데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곳은 당시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로 보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휘몰아잡가는 만학천봉, 육칠월, 한 잔 부어라, 생매 잡가, 병정타령, 기생타령, 곰보타령, 맹꽁이타령, 비단타령, 바위타령, 장기타령 등 11곡. 소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뛰어난 소리와 빠른 장단에 휘몰아 가는 경쾌한 리듬이 특징이다.

    16.11.08 덕양구 호국로 790번길 119
    38 무형유산 제43호 금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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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은장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금은장

    우리의 전통적인 금은 장신구를 두루 재현하는 등 금은세공의 맥을 오랫동안 잘 이어오고 있는 장인을 일컬어 금은장 이라고 한다. 보유자로는 화전동에서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효준 씨가 있다.

    05.02.07 덕양구 중앙로 123
    39 무형유산 제62호 환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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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장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환도장

    환도(環刀)란 칼집이 있어 고리를 달고, 이고리에 끈을 드리우고 그것을 허리에 찬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임. 요도(腰刀),패도(佩刀)라고 부르기도 함. 환도(環刀)라는 명칭은 고려 말기부터 사용됨. 조선시대 칼자루가 짧은 외날의 칼을 대부분 `환도(環刀)`라고 부름. 휴대하기 간편하고 비상시에 사용하기 용이하도록 길이가 짧고, 무게도 가벼움. 임진왜란(任辰倭亂) 이후 필요에 의해환도의 길이를 상대적으로 길게 제작함. 환도의 제작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함.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된 환도장(環刀匠)들이 만듦.

    환도장의 보유기능은 사철 쇠부림기능(제련기능), 대장공예기능(접쇠 鍛造기능), 도신강화기능(풀림기능,담금질기능,뜨임기능), 성형 및 연마기능(깍질기능, 날갈이 기능, 광택기능) 등 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홍석현은 그러한 모든 기능을 습득하고 있으며 우수한 기량을 갖추고 있음.

    17.11.21 일산동구 견달산로 194번길 54-5
    40 무형유산 제64호 경기도당굿 시나위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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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당굿 시나위춤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경기도당굿 시나위춤

    경기도 남부에 해당하는 부천, 시흥, 안산, 오산, 화성, 수원, 경기 광주, 안성 등의 마을굿을 경기도당굿이라 한다. 이 마을굿은 집안 대대로 무업을 세습하는 세습무들에 의해서 굿을 진행하는데 이들 세습무의 남자들을 화랭이 또는 산이라 부르고, 여자들을 미지라 부른다. 화랭이패 또는 산이들이 중심이 되는 경기도당굿의 춤은 넓은 의미로는 경기도당굿 굿판에서 추어지던 춤을 의미하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는 굿판을 떠나 공연 예술화된 경기도당굿시나위춤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이 춤의 반주음악은 경기도당굿 무악인 섭채, 반설음장단, 오니굿거리, 진쇠장단, 올림채, 겹마치, 가래조, 발뻐드레, 부정놀이장단등 전문가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난해하고 복잡 다양한 음악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경기시나위이기에 ‘경기도당굿시나위춤’이라는 명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의 무속적 전통을 배경으로 무대 양식화한 경기도당굿시나위춤으로는 [부정놀이춤], [터벌림춤], [진쇠춤], [깨끔춤], [올림채춤], [제석춤], [도살풀이춤] 등이 있으며, 그 중심에 고)매헌 김숙자선생이 있다.

    18.06.01 덕양구 충장로475번길 17
    41 민속문화유산 제8호 일산밤가시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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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산밤가시초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일산밤가시초가

    약 170년 전에 건립된 조선 후기 중부지방의 전통 서민 주택으로 옛부터 이 마을은 밤나무가 울창해 밤가시나 율동이란 지명이 유래 되었다. 안방, 부엌, 건넌방, 헛간이 ㅁ자형 구조로 배치되어 있고, 또아리 모양의 지붕과 마당에 동그란 봉당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91.10.19 일산동구 햇살로 105번길 36-7
    42 민속문화유산 제13호 전 월산대군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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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월산대군요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전 월산대군요여

    전 월산대군 요여는 우리시 덕양구 신원동에 소재한 조선 덕종(德宗, 1438~1457)의 맞아들이자 성종(成宗, 1457~1494)의 친형이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사당(1756년 건립)에서 보관되어 있었던 유물이다. 요여란 혼백과 신주 등을 모시는 작은 가마를 말하며, 2012년 4월 월산대군파종회에서 고양시로 기증하였다.
    전 월산대군 요여는 긴 맬대 위에 사각형의 방처럼 생긴 몸체를 얹고 맨 위에는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으며, 4개의 지붕선이 표시된 반구형태로 몸체에는 문살이 있는 여닫이문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기둥, 쇠목 등의 모서리에 상사를 한 점, 헛동자의 삼각형 형태, 그리고 창실이 안쪽보다 바깥쪽에서 가늘어지며, 무쇠장식의 납염표현 등에서 18세기 말에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경기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4.07.08 덕양구 어울림로 33
    43 민속문화유산   고양 행주성당 종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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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행주성당 종도행전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고양 행주성당 종도행전

    서지적 특징) 1922년 천주교당 내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한 판권이 남아있으며 겉표지와 표제가 남아있으나 다만 표지부터 4쪽까지 담뱃불로 추정되는 탄 구멍이 있어 해당 부분의 글자가 일실됨.

     

    °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원래 한 책이었으나 편집과정에서 분리된 속편으로 예수부활사건 이후 베드로, 바울 등 사도들의 전도활동과 로마로 재판을 받기 위한 여행 등 사도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여러 사건을 이야기체로 기술하고 있음. 한기근 신부는 종교인, 번역가 출판가로 1914년 경향잡지사 사장으로 활동하였고 『종도행전』(1922) 등을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하였음. 개신교 쪽에서도 19세기 후반에 성서 변역이 집중되어 「사도행전」 역시 1879년 존 맥킨타이어가 백홍준과 함께 마태복음, 로마서와 함께 번역하였고 다시 이응찬과 함께 신약성서 끝까지 번역하여 1882년 3월 중국 심양 문광서원에서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를 출간하였고 현재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음

     

    ° 국립한글박물관에 『종도행전』의 제 1판(1922년)과 제 2판(1931년)이 소장되어 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셩복음』(1922년)이나 『四史聖經』(1932년)과 합본된 형태이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사도행전』의 이름으로 1868년(미화서관), 1877년, 1896년, 1916년의 신연활자본으로 소장되어 있으나 일본과 중국에서 출간된 것으로 천주교당 내 인쇄본은 아님.

     

    따라서 행주성당 소장 『종도행전』은 비록 표지와 본문이 일부 일실되었으나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고 독립되어 제책된 초판본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음.

     

     
    22.09.03 덕양구 행주외동 194
    44 기념물 제23호 최영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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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장군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최영장군묘

    묘는 대자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소에는 묘비, 충혼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이 있다. 묘는 단분으로 부인 文化 柳氏와 합장하였다. 장방형의 2단 둘레석을 두른 方形墓로서 주위에 곡장을 설치하였으며 묘 앞 좌우에 묘비와 충혼비가 있다. 최영장군은 충숙왕 3년(1316)에 동주(東州:지금의 철원)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철원이다. 장군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청렴결백한 인물로 고려말기의 명장으로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75.09.05 덕양구 대자동 산70-2
    45 기념물 제50호 유형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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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장군묘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유형장군묘

    조선 중기의 무신인 석담(石潭) 유형(1566∼1615) 장군의 묘이다.
    장군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과 함께 크게 활약하여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선조 27년(1594)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4글자를 등에 새겼다고 한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총애를 받으며 왜적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35년(1602)에 충청·전라·경상 3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관직에 올랐다.

    유형 장군은 군사를 부리는 기술이 능하였으며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 확립에 주력하다가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 죽었다.
    현재 묘역 안에는 묘비와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근처에는 이정구가 짓고 정학교가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78.10.10 덕양구 행신동 698
    46 기념물 제136호 북한산중흥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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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중흥사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북한산중흥사지

    중흥사지는 북한산성 내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흥사는 고려초에 창건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고려말 太古普愚國師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유물로는 1103년작 金鼓와 1344년작 香완이 남아있어 12세기초 이전에 이미 이 사찰이 개창 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北漢誌』에 의하면 중흥사는 본래 30여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북한산성이 완성된 1715년 당시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28년에 이르러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건하여 유수한 사찰로 존속하였으나 1894년에 화재, 다시 1915년에 홍수를 당해 석축이 허물어지고 遺址만 남아 현재에 이른다.

    92.12.31 덕양구 대서문길 393
    47 기념물 제193호 고양독산봉수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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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독산봉수대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독산봉수대지

    독산봉수는 고양시 일산구 문봉동과 사리현동, 지영동의 경계지점인 해발 133.4m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에 유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독산봉수의 설치시기는 『세종실록』 『地理志』에 봉화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 봉수제의 성립과 더불어 설치되었거나 혹은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 독산봉수는 북쪽으로는 파주 성산→파주 대산, 동쪽으로는 모악→해포→안현 등으로 북쪽노선은 일정한 정형성을 유지한 반면, 동쪽노선은 때에 따라 변화가 심했다. 사방으로 주위가 잘 조망되며 서쪽으로는 고봉봉수를 바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원형의 석축 봉수대로 지형 여건을 고려하여 축조하였다.

    03.09.08 일산동구 사리현동 산642-32
    48 기념물 제195호 고양멱절산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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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멱절산유적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멱절산유적

    멱절산은 고양시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백제 한성도읍기 유적으로 경기도박물관이 2003년 유적의 범위와 성격파악을 위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유구는 수혈주거지 8기, 수혈구덩이 2기, 구상유구 1기, 적석유구 5기, 근래에 조성된 수혈구덩이 9기, 민묘 5기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은 고배, 삼족기, 호, 시루, 장란형토기 등 백제토기 1000 여 점과 철촉, 철도자, 철부 등 철기 25점 등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유구 외에도 멱절산 유적 전체에 백제토기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멱절산 전체에 유적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강 하류에 위치한 점과 각 층위별로 출토된 다량의 유물로 볼 때,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중계역할을 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04.05.06 일산서구 법곶동 740-22외
    49 기념물 제223호 고양 북한산 산영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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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북한산 산영루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북한산 산영루지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장주 초석의 형태와 사진을 보았을 때 T자형 정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06.07 덕양구 북한동 산1-1
    50 기념물 제229호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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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21.11.18 덕양구 북한동 59번지
    51 문화유산자료 제57호 한미산흥국사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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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산흥국사약사전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이트>

    한미산흥국사약사전

    흥국사는 한미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문무왕 원년(661) 원효대사가 세워 흥서사라 하였다. 절을 세운 뒤의 기록은 1000여 년 동안 전하지 않는데, 조선 숙종 12년(1686)에 다시 세웠고 영조 46년(1770)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친 후 약사전을 보다 크게 지었다.
    약사전은 흥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

    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에는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고, 불상 뒤로는 정조 16년(1792)에 제작된 약사후불탱화가 있다. 안쪽 공간은 화려한 조각들이 어우러져 조선 후기의 장식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85.06.28 덕양구 흥국사길 82
    52 문화유산자료 제64호 원흥리신라말고려초기청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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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흥리신라말고려초기청자요

    <출처:문화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원흥리신라말고려초기청자요

    요지란 자기나 기와, 그릇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이 가마터는 건지산의 동쪽 산기슭에 있으며, 거대한 언덕 위에 5∼6개소의 청자 파편 더미가 있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인 10세기후반에서 11세기 전반 시기의 청자 가마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자기 조각들은 비교적 고운 흙을 사용하였고, 유약은 암록색·황갈색을 띠고 있다.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회백색의 내화토(불이나 열에 잘 견디는 흙) 받침으로 얇게 받쳐 있다. 도자기의 형태는 밖으로 벌어진 대접, 아가리부분이 말린 바리(발), 조그마한 주발(완), 항아리 등 주로 그릇이나 대접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가마터는 우리나라 초기 청자 가마터 중의 대표적인 곳으로, 고려청자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85.06.28 덕양구 원흥동 산88
    53 문화유산자료 제69호 고양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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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향교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처음 지었으며,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교관이 머물던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85.09.20 덕양구 대양로 285번길 33-13
    54 문화유산자료 제71호 행주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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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서원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행주서원지

    행주서원은 행주산성에서 서쪽, 산성 정문으로부터는 한강방향으로 약 400m 거리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 헌종 때 왕이 권율 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헌종 7년(1841)에 사당을 짓도록 하고 이름을 紀功祠로 하였던 것이 행주서원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권율 장군을 제향하는 사당을 별도로 두고 이곳에서 후학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기도 했다. 가로 18m, 세로 20m의 담장터가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그 안 뒤편으로는 약간 높은 대지에 사당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는데 건물터는 정면 8.4m, 측면 6.5m의 주춧돌 중 아래로는 장대석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석축 아래로 강당으로 쓰이던 건물이 남아 있다.

    85.09.20 덕양구 행주산성로 127-17
    55 문화유산자료 제79호 월산대군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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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대군사당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월산대군사당

    월산대군 이정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중수한 것이다. 네모난 담장 중앙에 삼문을 세우고 그 안에 사당을 모셨는데 담장은 개인 사당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대석을 하단으로 축조하였고 석조 배수구까지 갖춘 특이한 구조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 맞배기와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앞면은 齋戒行事에 알맞도록 1칸을 개방하였고, 영조 대왕이 친히 ‘錫光祠’라는 편액을 내렸다. 신주를 운반할 때 쓰던 요여가 당내에 보존되어 있다.

    89.12.29 덕양구 신원동 427
    56 문화유산자료 제88호 연산군시대금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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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시대금표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연산군시대금표비

    대자동 간촌마을 금천군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비 주변에 다른 건축물이나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비는 땅속에 오랜 기간 묻혀 있다가 출토되어 황토 빛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비의 대좌는 장방형이며 후에 새롭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신의 앞면에는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이라 표기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볼 때 이 금표비는 조선조 연산군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은 ‘금표 내에 들어온 사람은 기훼제서율에 의해 처참한다.’는 것이다. 이 금표비는 1980년대 중반 인근의 전주 이씨 자손들이 묘역 정화사업을 벌이던 중 발견되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95.08.07 덕양구 대자동 산10-22
    57 문화유산자료 제104호 고양흥국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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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흥국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흥국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흥국사 미타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자그마한 몸집을 하고 있으며 얼굴은 편평하게 깍은 후 눈, 코, 입 등을 조각하여 다소 평면적이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어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두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양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차례로 계단식 주름을 만들고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얼굴의 표현이나 옷주름, 조각수법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불상양식을 보이고 있고 1758년에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18세기를 전후한 불상으로 여겨진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매우 부드러운 느낌의 이 불상은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01.09.17 덕양구 흥국사길 82
    58 문화유산자료 제140호 고양북한산서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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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북한산서암사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북한산서암사지

    서암사는 북한산성 축성 이후 승병을 유치하기 위하여 건립한 13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北漢誌』에 의하면 승려 廣軒에 의하여 133칸 규모로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인공 閔漬(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閔漬寺로 불리었으나 후에 사명을 고쳐 서암사라 하였다 한다. 서암사는 수문일대의 산성 수비 역할을 담당하다가 19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07.08.13 덕양구 대서문길 145-35
    59 문화유산자료 제157호 고양 경주김씨의정공파 영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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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경주김씨의정공파 영사정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경주김씨의정공파 영사정

    유래가 명확한 재사건축이면서 조선후기의 살림집의 구조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0.03.24 덕양구 무민로35번길 89
    60 문화유산자료 제170호 고양 백자음각 황사경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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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백자음각 황사경 묘지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고양 백자음각 황사경 묘지

    ‘고양 백자음각 황사경 묘지’는 조선 전기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널리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의 손자인 황사경(黃事敬, 1452~1531)의 일생을 16세기 전반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던 채세영(蔡世英, 1490~1568)이 1531년 총 4점에 백자에 음각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이 작품은 15세기 후반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낸 황사경의 삶의 궤적을 기록하여 무덤 안에 매장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의 본관, 이름, 조상의 계보와 관직, 생일과 사망일, 관직과 평생의 행적, 가족관계, 묘의 위치와 좌향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 작품을 통해 좁게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으며, 넓게는 서예사ㆍ도자사ㆍ미술사 등 인접학문도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14.01.24 경기도 용인시 경기도 박물관
    61 문화유산자료 제180호 고양 대성암 육경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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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대성암 육경합부

     

    고양 대성암 육경합부

    대성암 육경합부는 금금강경(金剛經)』·『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수릉엄신주(首楞嚴神呪)』· 『아미타경(阿彌陀經)』·『관음예문(觀音禮文)』·『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등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6종의 경전을 모아 조선 세조6(1460) 잔재 최고의 장인에 의해 매우 정교하게 판각 간행된 판본이다.

    15.03.09 덕양구 대서문길 369-1
    62 문화유산자료 제189호 선청선생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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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청선생첩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선청선생첩

    <선청선생첩>은 조선중기의 명문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의 김상용과 그의 아우 김상관, 김상헌, 김상복과 김상용의 아들인 김광현의 시문 ? 편지 ? 만사 등 총 26편을 묶은 서첩이다. 이 서첩은 조선시대 명문가인 안동김씨 일가의 필적이 모아져 있고, 김씨 집안의 전각도 일부 확인할 수 있어서 조선중기 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역사 ? 학술 ? 서예적 가치가 인정된다. 다만 서첩에 수록된 필적이 습서 정도의 수준으로 특이점이나 품격을 논할 수 없는데다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지 않는 편이어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

    19.04.22 일산동구 탄중로 398
  • 연번 지정번호 지정명칭 수량 소재지 지정일
    연번 지정번호 지정명칭 수량 소재지 지정일
    1 제 1호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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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을 두었다. 월산대군의 큼직한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 신도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조선 시대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상석 뒷편의 묘비는 운문이 조각된 비두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었고, 규모는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이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을 놓았는데 정면 270cm, 측면 155cm의 규모이다. 성종 20(1489)년에 왕명에 의해 세워진 신도비는 90cm의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는데 ‘월산 大君碑銘’이란 전자가 새겨 있다.

    비신의 높이는 218cm, 폭 94cm, 두께 32cm의 규모이고 비문은 임사홍이 짓고 썼으며, 전액도 함께 썼다. 현재 신도비는 전액을 제외하고는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되어 있다.
    월산대군 이 정은 추존된 덕종의 장남으로 단종 2년(1454)에 출생하여 성종 19년(1488)에 돌아 갔다. 대군의 자는 자미이며 호는 풍월정이다. 어린 시절은 궁중에서 보냈으며 일찍이 월산군에 봉해지고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책을 좋아하여 그의 작품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지금의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옛집이었으며 친 아우인 성종이 자주 대군의 집에 드나들며 집의 정자를 풍월정이라 이름짓고 근체오언율시를 지어 주었다. 현재의 고양 북촌에 별장을 두고 자연을 벗하며 일생을 보냈다. 시호는 효문.

    1 덕양구 신원동 산16 1986-06-16
    2 제 2호 성녕대군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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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녕대군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성녕대군묘 및 신도비

    현재 묘소 앞에는 비각과 함께 재실, 사당 등이 지어져 있다. 묘소에는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 등이 있다. 3단의 장대석을 쌓았으며 묘의 주위로는 호석(護石)을 둘렀고 묘소의 좌우에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배치되었다. 신도비는 태종 18년(1418) 4월에 세운 것으로 검은 돌 비신을 양 옆에 세운 화강암 우주석에 끼워 넣은 것이 특징적이다. 성녕대군은 조선 제3대 태종의 4째 아들로 태종 14년(1414)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는데 14세 때 홍역을 앓고 사망했다.

    1 덕양구 대자동 1986-06-16
    3 제 3호 계원군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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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원군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계원군묘 및 신도비

    묘는 일산구 성석동에서 문봉동 방향으로 이어진 58번 도로 진밭마을에서 오래골마을에 위치한다. 묘는 驪興 縣夫人 閔氏와 쌍분을 이루어 남동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 앞에는 新舊 3기의 묘비와 상석, 장명등 및 망주석과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었다. 좌측의 흰 대리석 묘비 앞면에는 ‘承獻大夫桂原君艤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묘에서 산 아래 약 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 위에 흰 대리석 비신이 세워져 있다. 선조 15년(1582)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長敏公神道碑銘’이라 전자되어있다.

    계원군 李艤(1469~1554)는 조선 중기의 학자, 종친으로서 자는 艤之이다. 제2대 정종의 4대손이며 백성군 이원의 아들이다. 4세때 이미 문자를 해득했고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한 학행으로서 계림부수에 봉해졌으며 연산군 8년(1502) 시예에 장원하여 명선대부, 이어 승헌대부에 승좌되었다. 중종 즉위년에 돈령부도정, 중종 26년(1531)에 계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長敏이다.

    1 성석동 산83-3 1986-06-16
    4 제 4호 이성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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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군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이성군묘

    묘는 대자동 대자골에 위치하며 이성군의 봉분을 중심으로 배 곤산군부인 남평문씨와 계배 풍산군부인 안동 권씨의 봉분이 좌우에 있다. 3기의 봉분 앞에는 묘비가 서 있으며 봉분의 총둘레는 17cm이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 앞 중앙에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기 배치되어 있다.
    명종 11년(1556)에 세운 대리석의 묘비는 ‘왕자이성군 증시장평공지묘’라 쓰여져 있는데 장방형의 비좌에 정교하게 조각된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문은 정사룡이 짓고 송인이 글씨를 썼으며 한경우가 전자를 썼다.

    현재 비의 규모는 높이 170cm, 폭 65cm, 두께 15cm이다.
    이성군 관은 조선 제 9대 성종의 아홉째 아들로서 성종 20년(1489)에 출생하여 명종 7년(1552)에 돌아갔다. 자는 공숙이며 어머니는 숙용 심씨이다. 연산군 3년(1497)에 이성군에 봉해지고 문소전, 연은전, 종부시, 사옹원 등의 도제조를 역임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에 위사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그림에도 매우 뛰어나 인종 원년(1545) 선왕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 이를 주관하였다. 시호는 장평.

    1 덕양구 대자동 1986-06-16
    5 제 5호 경안군 및 임창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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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안군 및 임창군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경안군 및 임창군묘

    묘는 최영장군묘역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뒤쪽 언덕에 경안군묘소가 있고 언덕 아래쪽 30m 지점에 임창군묘소가 있다. 경안군의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동자상, 문인석이 1쌍씩 있다. 현재 경안군의 묘는 盆城郡夫人 許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는데 다른 묘에 비해 높은 묘역을 만들었다. 묘 둘레의 뒤편은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붉은 벽돌의 曲墻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 앞 우측에는 ‘朝鮮國 王孫 贈顯祿大夫 慶安君 兼五都衛都府總官 行承憲大夫 慶安君 諱檜之墓 盆城郡夫人 許氏부左’라 새겨진 묘비가 있다.

    묘비는 숙종 30년(1704) 3월 건립한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 비좌를 갖추었고, 총 높이는 196c, 두께는 26㎝의 규모이다. 임창군의 묘는 凝川郡夫人 박씨와 합부되어 있다. 봉분의 주위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이 1쌍씩 있는데 특히 장명등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여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경안군은 조선 제 16대 인조의 장남인 昭顯世子의 셋째 아들로 9월 20일에 사망했으며, 임창군은 경안군의 장남으로 현종 4년(1663)에 출생하여 경종 4년(1724)에 사망했다.

    1 덕양구 대자동 산65-1 1986-06-16
    6 제 7호 이천우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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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우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이천우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중산마을 봉일천 방향으로 이어진 86번 지방도로(고봉로)의 좌측 성석동 상감천 황룡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및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방형묘로 貞敬夫人 여흥 민씨와 합장되었고 봉분은 20평 정도이며 길이 30m의 曲墻을 조성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과 1979년에 세운 묘비,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을 배치했고 4단의 계단석을 놓았다. 이천우(? ~1417)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태조 이성계의 형인 李元桂의 아들이다. 고려말 공민왕 18년(1369) 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몇 차례 왜구를 물리쳤으며 1392년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다.

    1 일산구 성석동 1986-06-16
    7 제 8호 민순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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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순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민순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항공대 뒤편인 현천동 거무내 마을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淑人 平壤 趙氏와 淑人 全州 李氏가 함께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묘갈,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 1쌍이 있다. 민순의 봉분 앞에는 ‘通訓大夫通禮院 右通禮 習靜先生 閔公之墓’라 쓰여진 묘비가 있다. 묘소 50m아래에 있는 묘갈명에는 ‘習靜先生 閔公墓碣銘’이라는 전자만 확인될 뿐 비문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하다. 민순(1519~1591)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文峰書院에 제향된 高陽八賢의 한 사람이다.

    1 덕양구 현천동 1986-06-16
    8 제 9호 이무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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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이무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貞敬夫人 尹氏가 합폄되어 있으며 주교동 원당중학교 뒤편의 영글이산기슭에 위치한다. 묘 앞의 석물로는 상석 외에 石羊, 장명등 및 문인석 2쌍과 망주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正祖 9년(1785)에 건립된 백대리석 묘갈의 규모는 높이 138㎝, 두께 20㎝, 너비 65㎝이다. 묘소의 입구에는 고종 15년(1878) 10월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으며 너비 66㎝, 두께 35㎝, 높이 174㎝ 규모의 오석으로 옥개와 기단을 갖추었다. 또한 신도비 옆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永慕碑가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이무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敦夫이며 호는 中亭이다. 본관은 丹陽으로, 판서 李居敬의 아들이다. 조선 개국 후 開城尹, 都體察使, 參贊門下府使, 判三軍府事, 右政丞, 領丞樞府事, 右政丞 兼 判兵曹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2년(1402)에는 金士衡, 李회와 함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인 『混一疆理歷代國之圖』를 제작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후 태종 8년(140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竹州로 이배 도중 괴한들에 의하여 피살 당하였다. 뒤에 伸寃 되었으며 시호는 翼平이다.

    1 덕양구 주교동 1986-06-16
    9 제 10호 김명원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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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원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김명원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관산동 두포동 마을에 서향(西向)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의 묘(墓)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 앞 중앙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그리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 앞의 대리석(大理石) 묘표(墓表)는 숭정(崇禎) 7년(1634)에 건립한 것으로 그 규모는 높이 139cm, 폭 57cm, 두께 21cm이다.
    신도비는 숙종 21년 을해[(乙亥),금상(今上)21(1695)] 5월에 건립한 것으로 장방형 비좌(碑座)와 옥개(屋蓋)를 갖추었다.

    비의 앞면에는 ‘평란공신 좌의정 경림부원군 증시충익 김공신도비명?(平難功臣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이라 전자(篆字)되어 있다.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종연(金宗衍)이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篆) 하였다. 현재 신도비의 비신 규모는 높이 208cm, 폭 87cm, 두께 33cm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조선조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중종(中宗) 29년(1534)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35년(1602)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응순(應順), 호(號)는 주은(酒隱)이며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서 관찰사(觀察使) 김만균(金萬鈞)의 아들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明宗) 13년(155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3년 뒤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선조(宣祖) 2년(1569) 종성부사(鍾城府使) 등,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하였고, 선조(宣祖) 20년(1587)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선조(宣祖)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3등에 올라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순검사(巡檢使)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사(八道都元師)로서 임진강(臨津江)방어전을 벌여 적의 침공을 지연시켰다. 난중에 행재소(行在所) 경비(警備)에 전력했고 이듬해 명(明)나라에서 원병(援兵)이 오자 명장(明將)들의 자문에 응했으나 병(病)으로 도원수(都元帥)의 자리를 내놓고 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여 전장(戰場)에 나가 지휘하였다. 그후 좌찬성(左贊成),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의정(右議政)등을 역임하고 선조(宣祖) 33년(1600)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유학(儒學)에 조예가 깊고, 병서(兵書)?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익(忠翼).

    1 덕양구 관산동 1986-06-16
    10 제 11호 정지운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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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운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정지운선생묘

    묘는 일산동 중산(中山) 마을 고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配) 정부인(貞夫人) 충주 안씨(忠州 安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모두 3기(基)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을 각각 설치했다.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秋巒居士鄭之雲之墓)’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李滉)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57cm, 폭 61cm, 두께 32cm이다. 1981년 2월에 건립한 2기의 묘비는 대리석 비신에 화강암 이수를 갖추었다.

    정지운은 조선시대 중기 고양이 않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고양 8현 중의 한사람이다. 중종 4년(1509)에 출생하여 명종 6년(1561)에 돌아갔다. 자는 정이(靜而)며 호는 추만(秋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로서 인필(仁弼)의 아들이다.
    일찍이 모재(募齋) 김안국(金安國)과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써 성리학을 깊게연구하였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조화의 이치를 규명한 뒤에 한성에서 퇴계를 만나 수정을 받았다. 이것은 훗날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된 중요한 학설인데 이 천명도설의 진본(眞本)은 일본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단지 마이크로 필름화한 것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만은 주희의 성리론을 한층 심화시켜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다.’고 주장하며 사단은 리에 그리고 칠정은 기에 배분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 일산구 일산동 1986-06-16
    11 제 12호 김전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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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전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김전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원흥동 송현마을 원흥교회 뒤편 절골 골짜기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 향로석, 문인석은 최근의 것이다. 상석에는 광무 10년(1906)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묘소의 우측, 망주석 뒤편의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 비신과 화강암의 이수를 갖추었는데 ‘金忠貞公神道碑’란 전자가 뚜렷하다. 특히 비의 이수 부분 문양과 조각수법은 매우 뛰어나며 비의 이수는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우수한 신도비문이다. 김전(1458~152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仲倫이며 호는 懶軒·能人, 본관은 延安으로 知中樞府事 金友臣의 아들이다.

    1 덕양구 원흥동 산40-1 1986-06-16
    12 제 13호 홍이상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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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이상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홍이상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성석동 성동마을의 풍산홍씨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貞敬夫人 安東 金氏의 봉분과 쌍분으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주위로는 둘레석이 쳐져있으며 봉분 앞에는 높이 170㎝, 너비 65㎝, 두께 25㎝ 규모의 묘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 약 150m 아래 지점에 있는데 인조 8년(1630)에 건립하였다.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하며 이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다. 홍이상(1549~1615)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麟祥이며 자는 元禮, 또는 君瑞이다. 호는 慕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洪修의 아들이다. 高陽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1 일산구 성석동 1986-06-16
    13 제 14호 이신의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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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의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이신의선생묘 및 신도비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는데 대부분 최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묘 좌측의 대리석 묘비는 영조 25년(1749) 7월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 250㎝, 너비 60㎝, 두께 20㎝의 규모이며 비좌와 팔작지붕의 옥개를 갖추고 있다.
    묘는 고양시청에서 화전방향으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서촌마을 입구인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貞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 50m지점에 위치한 신도비는 4면 刻字로 앞면 상단에 ‘贈吏曹判書 文貞公 石灘 李先生 神道碑銘’이라 篆字되어있다.

    비문은 尤庵 宋時烈이 지었고 尹用求가 追書했으며 金漢이 追篆하였다. 옥개가 갖추어진 비의 규모는 높이 160㎝, 너비 56㎝, 두께 27㎝이다.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景則이며 호는 石灘이다. 본관은 全義로서 參議 李元孫의 아들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 덕양구 도내동 1986-06-16
    14 제 15호 유여림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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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여림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유여림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가장동 삼거리에서 고양동마을 방향으로 이어진 76번 도로로 약 300m 가량 들어가 위치한 두포동 마을에 남향하여 창녕 성씨의 묘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쌍분의 총 둘레는 각 8m씩이며 높이는 2.5m이다. 묘비는 원래 조선 중종 28년(1543) 8월에 건립되었으나 1935년 9월에 다시 세운 것으로 烏石으로 되어있으며 그 규모가 너비 50㎝, 두께 20㎝, 높이가 120㎝이다.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의 신도비는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기단을 갖추고 있다. 규모는 높이가 200㎝, 너비 90㎝, 두께 24㎝이다.

    현재 비신의 중간부분은 크게 금이 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유여림(1476~1538)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啓沃, 호는 政堂이다. 본관은 杞溪이며 僉知中樞府事 起昌의 아들이다.

    1 덕양구 관산동 1986-06-16
    15 제 16호 이지신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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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신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이지신선생묘 및 신도비

    이지신(1512~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元立이며 호는 보眞菴이다. 본관은 牛峰으로 판서 李承健의 손자이며 李諶의 아들이다.
    묘는 용두동에서 향동동 방향으로 이어진 60번 지방도로 향골마을에 서남향으로 위치하며 봉분은 단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 중앙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묘소 앞 150m 지점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것이다. 앞면에는 ‘黃海道 觀察使 贈吏曹判書 李公神道碑’라 전자되어 있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현재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와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갖추었고 비신의 규모는 높이 203㎝, 너비 94㎝, 두께 44㎝이다.

    1 덕양구 향동동 1986-06-16
    16 제 17호 기준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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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기준선생묘

    묘는 원당 전철역에서 한양골프장 방향인 성사동 사근절 마을 뒤편에 서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1쌍 및 최근 세워진 동자석 1쌍과 동물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봉분은 정부인 파평 尹氏와 합장된 단묘로 이루어져 있다. ‘服齋先生奇遵之墓 贈貞夫人 尹氏 부左’라고 쓴 묘비는 196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기준(1492~1521)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敬仲이며 본관은 幸州이다. 고양 8현의 한 사람으로 저서로는 『德陽遺稿』,『戊寅記聞』,『德陽日記』가 있다.

    1 덕양구 성사동 산47 1986-06-16
    17 제 18호 김주신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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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신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김주신선생묘

    묘는 대자동 대자골에 위치해 있으며 가림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와 부좌(?左)되어 있다. 호석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벽돌, 기와를 사용한 운치있는 곡장(曲墻)이 조성되어 있다. 묘 앞 우측에는 화강암에 옥개석을 갖춘 묘비가 있으며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특히 문인석의 조각수법은 매우 뛰어나 아름다운 운문을 연상케 한다. 영조 10년(1734) 3월에 세워진 묘비는 최규서(崔奎端)가 짓고 서명균(徐命均)이 썼으며 갓형의 두부와 기단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비의 크기는 높이 100cm, 폭 65cm, 두께 33cm이다. 신도비는 화강석 재료로 장방형의 비좌와 옥개를 갖추었고, 비의 총 높이는 300cm, 폭은 95cm, 두께는 45cm의 규모이다. 순조(純祖)26년(1826) 7월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의 비문은 박종훈(朴宗薰)이 글을 짓고 김이교(金履喬)가 썼으며 김조순(金祖淳)이 전(篆)한 것이다. 김주신(1661~1721)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肅宗)의 장인이다. 자(字)는 하경(廈卿), 호(號)는 수곡(壽谷), 세심재(洗心齋)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판서(判書) 김남중(金南重)의 손자(孫子), 생원(生員) 일진(一振)의 아들로서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숙종(肅宗) 22년(1696)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숙종(肅宗) 28년에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딸이 숙종(肅宗)의 계비(繼妃) 즉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되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領敦領府事)에 이르러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管)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扈衛大將)을 겸임하였다. 저서(著書)로 [거가기(居家紀)], [수사차록(隋事箚錄)], [수곡집(壽谷集)] 등이 있으며 시호는 효간(孝簡).

    1 덕양구 대자동 산26-1 1986-06-16
    18 제 19호 박세영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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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영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박세영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통일로 숫돌고개 너머인 오금동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표, 묘비, 상석, 향로석 및 동자석 1쌍과 문인석 및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八角墓로서 정경부인 光州 金氏와 합장되어 있다. 묘 바로 앞에는 기록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된 묘표가 있으며 묘 앞의 좌측으로는 무인석이 그리고 우측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신도비는 장방형의 碑座 雲紋과 학이 조각된 이수를 갖추었으며 선조 15년(1582)에 세워진 이 비문은 글씨가 거의 마멸되어 해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박세영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景仁이고 본관은 咸陽이다.

    1 덕양구 오금동 산121 1986-06-16
    19 제 20호 박대립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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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립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박대립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통일로 숫돌고개에서 상촌마을 오금동에 남향으로 貞敬夫人 長水 黃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 중앙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동자석 그리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숙종 18년(1692)에 立石한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운문이 조각된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비문은 이정구가 글을 짓고, 권규가 전을, 5대손 경후가 글을 썼는데 규모는 높이가 170㎝, 너비가 70㎝, 두께가 21㎝이다. 박대립(1512~158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守伯, 호는 無違堂이며 본관은 咸陽으로 敦寧府正 朴世榮의 아들이다.

    1 덕양구 오금동 산121 1986-06-16
    20 제 21호 한계미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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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미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한계미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관산동 시묘골 마을의 청주한씨묘역에 위치하며 왼쪽에 파평윤씨가 합장되어있는 단묘이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는데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묘소 주위에는 후대에 두른 화강암 재질의 호석이 둘러져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총 28m이고 높이가 2m이다. 우측에는 1972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고 봉분 앞 중앙에는 당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백대리석 묘비가 세워져있다. 한계미선생의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종2년(1471) 12월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크기는 총 높이 230㎝, 너비 66㎝, 두께 21㎝이다. 비각은 최근 새로 지었다. 한계미(1421~147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公甫, 본관은 淸州로서 관찰사 惠의 아들이다.

      덕양구 관산동 산87 1986-06-16
    21 제 22호 기건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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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미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기건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원당전철역에서 한양골프장 방향인 성사동 사근절 마을에 서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이 있는데 대부분이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고 문인석 1쌍만이 당대의 것으로 보인다. 묘는 정부인 豊山洪氏와 합장되었으며 총 규모 21m 둘레의 원형묘이다. 봉분의 우측으로는 1966년에 새로 세운 吳億齡이 찬한 묘비와 최근 후손 기성도가 찬하고 세운 한글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에서 약 300m 지점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고종 16년(1879) 10월 건립한 것으로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통대석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신은 대리석이다.

    비의 높이는 184㎝, 너비는 66㎝, 두께는 33㎝ 규모이다. 신도비 구비는 신비의 앞 마당에 놓여져 있다. 기건(1390~1460)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靑坡 또는 眩庵 이며 본관은 幸州이다.

    1 덕양구 성사동 산54 1986-06-16
    22 제 23호 기응세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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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응세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기응세선생묘

    묘는 성사동 사근절 마을에 위치하며 善山 林氏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에는 2기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의 대리석 묘비는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높이 120㎝, 너비 40㎝, 두께 18㎝의 규모이다. 묘비 앞쪽에는 장명등의 옥개석만이 도궤된 채 남아있다. 또한 좌·우의 문인석은 얼굴표정이 독특하고 비교적 세밀히 조각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응세(1539~1585)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효자로서 자는 景遇,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服齋 奇遵의 손자이며 한성판윤 奇大恒의 아들, 영의정 奇自獻의 아버지로 본관은 幸州이다. 평소 효행이 있어 조선 선조 조에 정려를 내렸고 삼강록에 책록되었다.

    1 덕양구 성사동 산54 1986-06-16
    23 제 24호 김홍집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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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집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김홍집선생묘

    묘는 대자동 대자골에 위치하며 配 南陽 洪氏의 묘와 부左되어있는 단묘이다. 묘소에는 최근 새로 만들어진 묘갈,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이 있다. 현재 봉분의 총 둘레는 15m인데 원래 이 묘는 1975년 6월 11일 파주에서 이곳으로 천묘한 것이다. 김홍집(1842~1896)은 조선후기의 정치가로 처음 이름은 宏集이며 자는 敬能, 호는 道園, 본관은 경주이다.

    1 덕양구 대자동 산26-1 1986-06-16
    24 제 25호 한규설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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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규설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한규설선생묘

    묘는 310번 지방도로 가시골마을에서 서쪽방향인 원흥동 웃말에 위치하며 정경부인 密陽 朴氏와 합장된 단묘이다. 묘 앞 우측에는 옥개를 갖춘 높이 190㎝, 너비 50㎝, 두께 25㎝의 오석 묘표와 상석 및 망주석과 석양 1쌍이 있다. 1934년 10월 아들 韓亮鎬가 세운 묘비의 규모는 높이 146㎝, 너비 50㎝, 두께 20㎝이다. 한규설(1856~1930)은 조선시대 후기의 정치가로 자는 蕣佑 본관은 淸州로 御營大將 摠戎使 韓圭稷의 동생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정부에 의해 男爵이 수여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1930년 사망했다.

    1 덕양구 원흥동 1986-06-16
    25 제 26호 박충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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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충원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박충원묘

    묘는 주교동 밀양박씨묘역에 위치하며 정경부인 星山 李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소에는 묘표, 상석, 장명등 및 동자석과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오석의 묘표는 1958년에 건립되었고 광해군 9년(1617) 2월에 건립된 구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180㎝, 너비 56㎝, 두께 27.2㎝이다. 그리고 오석의 새로 세운 신도비는 정조 19년(1795)에 세운 것으로 비의 머리 부분과 대좌를 갖추고 있다. 크기는 높이 297㎝, 너비 117㎝, 두께 52㎝이다. 박충원(1507~1581)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仲初이며 호는 駱村, 본관은 密陽이다. 고양 팔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寧越郡守, 春秋館編修官, 成川府使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 덕양구 주교동 산26-1 1989-10-23
    26 제 27호 강지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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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지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강지선생묘

    묘는 오금동 하촌마을에서 상촌마을로 이어진 마을길 우측에 위치하며 묘를 중심으로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및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봉분 옆으로 1959년 봄에 세운 오석의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金潤東 幷書로 되어 있다. 묘에 세워져 있는 비에는 ‘靖國功臣 永善君 姜漬墓’라 기록되어 있다. 당대에 세워진 석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사자 2마리가 받치고 있는 장명등 등은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강지(1453~1517)는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으로 자는 德潤, 호는 慕庵이며 永善君에 봉해졌고 본관은 晉州이다.

    1 덕양구 오금동 산79 1989-10-23
    27 제 28호 류진동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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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진동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류진동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행신동 무원 마을 진주 류씨 묘역 공원내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묘의 봉분 주위에는 상석, 장명등과 문인석, 망주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상석 뒤편에는 대리석 재질의 묘표가 세워져 있다. 대리석의 묘표에는 ‘資憲大夫 工曹判書 兼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摠管 柳辰仝墓’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 측면 내용에 의하면 이 비는 명종 17년(1562)에 세운 것이다. 묘아래 50m 지점에는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 명종 18년(1563)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옥개석이 건조되어 있다. 류진동(1497~1561)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叔春, 호는 竹堂 본관은 晉州로 柳漢平의 아들이다.

    1 덕양구 행싱동 산106-8 1991-06-25
    28 제 29호 류림선생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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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림선생묘 및 신도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류림선생묘 및 신도비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내에 위치하며 증정경부인 安東 金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높이 127㎝, 너비 52㎝, 두께 22㎝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숙종 21년(1695) 8월에 건립된 신도비가 남아 있다. 신도비에는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는데 높이 240㎝, 너비 91㎝, 두께 34㎝ 이다. 류림(?~1643)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汝溫이며 본관은 진주로 공조판서 柳辰仝의 손자이다.

    1 덕양구 행신동 산119 1991-06-25
    29 제 30호 류구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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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구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류구선생묘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내에 위치하며 부인 德水 李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 묘표 및 문인석과 석인 1쌍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중 석물 일부는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졸한 글씨체로 ‘大學士 柳가塋’이라고 쓰인 표석과 소박한 조각법의 합장한 석인은 다른 분묘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으로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와 다른 석물 중의 일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이다. 이 중 돌장승과 같은 문인석 석물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특이한 모습이다. 류구(1335~1398)는 조선조 開國原從功臣으로서 晋山君에 책봉되었으며 세종대에 청백리로 추록되었다.

    1 덕양구 행신동 산106-2 1991-06-25
    30 제 31호 류겸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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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겸선생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류겸선생묘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의 진주류씨묘역에 위치하며 忠州 崔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원래는 花田에 있었으나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있다. 묘소 앞에는 ‘通政大夫 寶文閣 直提學 淸白吏 柳謙墓 淑夫人 忠州崔氏 부左’라고 쓰인 묘비가 있다. 류겸(1357~1411)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고려 우왕 6년(1380)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10년(1410)에 刑曹參議와 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세종조에 청백리로 녹선된 인물이다.

    1 덕양구 행신동 산106-2 1991-06-25
    31 제 32호 북한산 3.1운동 암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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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3.1운동 암각문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북한산 3.1운동 암각문

    이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독립운동가인 鄭在鎔이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가로 150㎝, 세로 270㎝ 정도의 평평한 바위 위에 ‘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은 己未年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만세를 도창했다.’는 내용을 정자체로 암각하였다.

    1 덕양구 북한동 산1-1 1993-04-19
    32 제 34호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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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이 건물은 한미산흥국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나한전의 본 명칭은 칠성각으로 1867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약사전에 비해 규모가 약간 작으며 전체적으로 동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목조로 된 건물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재질의 기단석이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면으로 계단이 축조되어 있다. 정면에는 모두 3개의 문이 있으며 문살의 무늬가 매우 세밀하고 화려하다. 전안에는 1832년 제작된 탱화가 보관되어 있고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기둥은 사각으로 흘림이 거의 없는 둥근기둥이며 맞배지붕의 형태를 한 정면에는 「七星閣」이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뛰어난 필체의 초서체로 쓴 작품이다.

    1 덕양구 지축동 203 1993-04-19
    33 제 35호 효자동 박태성 정려비 및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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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동 박태성 정려비 및 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효자동 박태성 정려비 및 묘

    박태성 정려비(효자비)는 북한산성에서 의정부로 이어진 53번 지방도로 제청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석의 비에는 ‘朝鮮孝子 朴公泰星 旌閭之碑’라 표기되어 있다. 대좌까지 갖추어진 이 비는 조선시대 후기 효자로 널리 알려진 박태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고종 30년(1893)에 세워졌다. 효자비 뒤편 250m 지점에 위치한 박태성의 묘는 좌우에 선인 완산이씨와 선인 김해 김씨의 봉분이 있어 모두 3기이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 1기, 망주석 1쌍 그리고 작은 문인석 1쌍이 있으며 정조 2년(1778) 5월에 건립된 묘비에는 ‘有明

    朝鮮孝子通德郞密陽公泰星字景淑之墓’라 새겨져 있다. 봉분 옆에는 호랑이의 묘라고 전해오는 민무덤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최근 만들어진 호랑이상이 있다. 박태성의 묘 50m 아래에는 효자 박태성이 매일 참배하던 아버지 朴世傑의 묘가 위치해 있다. 박태성은 조선시대 후기의 효자로 「인왕산 호랑이와 박효자의 전설」의 주인공이다. 자는 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1 덕양구 효자동 82-1 1993-04-19
    34 제 36호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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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흥도동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이다.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한 이축 선생묘는 이천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으며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이축(1402~1473)은 고려말의 대학자이었던 牧隱 李穡의 둘째 아들 인재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은지는 이축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진 연못으로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1 덕양구 도내동 847-3 1999-02-01
    35 제 37호 심희수 교지 및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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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희수 교지 및 묘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심희수 교지 및 묘

    묘는 원흥동 구석말 마을 청송심씨묘역에 貞敬夫人 光州 吳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및 최근 새로 세운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봉분 앞에는 숙종 1년(1675)에 세운 묘비가 있는데 앞면에 ‘議政府左議政 一松先生之墓 貞敬夫人 光州吳氏 부左’라 표기되어 있다. 심희수(1548~1622)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伯懼 호는 一松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1 덕양구 원흥동 산89 1999-02-01
    36 제 38호 성사동 권희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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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사동 권희선생묘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성사동 권희선생묘

    권희(1319~1405)는 고려말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으로 檢校侍中 權皐의 아들이며 조선조 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陽村 權近의 아버지가 된다.
    주청부사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 ·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강화유수 · 금산군수 등을 두루 거친 뒤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신주를 안전히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본관 안동. 자 사열(思悅). 호 남악(南岳). 중추부동지사 상(常)의 아들.

    1568년(선조 1)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주서(注書) ·전적(典籍)을 거쳐, 각 조(曹)의 낭관(郞官)을 지내고 양사(兩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592년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고, 그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역대 왕의 신주(神主)와 어보(御寶)를 안전히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1596년 종부시정겸집의(宗簿寺正兼執義)로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160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강화유수(江華留守) ·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두루 거친 뒤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신주를 안전히 모신 공으로, 1624년(인조 2)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호성(扈聖) ·선무(宣武)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비는 윗부분을 다듬어 마름모꼴로 만들어 세웠고 앞면에는 ‘朝鮮政丞靖簡公 權僖之墓 辰韓國大夫人 韓氏부葬’이라 표기되어있다. 또한 장명등은 화창이 두개로 옥개석의 조각수법이 뛰어난 작품이며 구조는 사각의 火舍石위에 사각형 옥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문인석은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형식인데 전체적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땅속에 묻힌 부분과 아래쪽이 왜소해지는 점이 특징이다.
    묘는 원당 전철역 남쪽의 성사동 불당골 마을 안에 辰韓國大夫人韓氏와 합장되어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2쌍이 있으며 최근에 오석의 비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을 그 앞쪽에 갖추어 놓았다.

     

    1 덕양구 성사동 산60-35 1999-02-01
    37 제 39호 도내동 이석탄장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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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내동 이석탄장대비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도내동 이석탄장대비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장대비이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되어 있다. 장대비는 화강석으로 5㎝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李石灘將臺’라 표기되어 있으면 뒷면에는 ‘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 年庚申 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石灘 李愼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석탄 이신의(1551~1627)는 高陽八賢의 한 분으로 본관은 전의이다.

    1 덕양구 도내동 산100-1 1999-02-01
    38 제 40호 풍동당산목 및 산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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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동당산목 및 산치성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풍동당산목 및 산치성

    풍동 식골마을에 소재하던 당산목과 부속물(터줏가리, 업양가리)은 우리 중부지역의 민속, 토속 신앙을 알 수 있는 것임. 풍동 식골마을 예부터 단풍나무가 많아 풍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농사가 잘되는 벌판이 많아 식골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 마을 수백년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기원 등의 목적을 가지고 현재 택지개발지구내로 이전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 일산동구 풍동근린공원 2005-07-29
    39 제 41호 정발산 도당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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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발산 도당굿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정발산 도당굿

    일산신시가지의 중앙에 자리한 정발산, 이 산에는 수백 년간 이어져온 고양시의 대표적인 도당굿 이 있다. 정발산 주변에 있는 장항, 마두, 닥밭, 강촌, 설촌, 냉촌 지역6개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치루는 공동체의 제와 축제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정발산 도당굿은 경기도 굿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경기도 굿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 단골 만신의 계보가 분명하다는 점, 6개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보존위원회가 잘 결성되어 있어 그 보존 주체가 분명하다는 점 등이 향토유적으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1 일산동구 마두동, 정발산동 일원 2005-07-29
    40 제 42호 성석 진밭 두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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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 진밭 두레패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성석 진밭 두레패

    성석동 진밭두레패는 이미 경기도 무형유산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포호미걸이와 함께 고양시의 대표적인 특징성 있는 민속놀이, 전통농악대로 유명하다. 진밭두레패가 전수되고 있는 곳은 일산동구 고봉동에 속해 있는 성석동 진밭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지경다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농사소리 등 민요를 부를 수 있는 선소리꾼, 온갖 악기를 다루는 잽이꾼, 춤꾼, 법고잽이 꾼 등 총 70여명의 보존회원이 있다.

    진밭 두레패 놀악놀이는 성석동 진밭마을 일대에서 행해지는 농악놀이로 농사작업기에 본 농악으로 등장하며 모두 12마당 놀이를 갖추고 있다. 농악의 가락은 1채 가락으로부터 12채 가락까지 다양한 변형가락을 갖추고 있다. 이중 12채 가락은 춤가락이며 자진모리 가락에서 율동을 하게 된다. 본래 본 농악에서는 소와 농기구를 사용했으나 요즘은 생략하여 간소화 되었다.
    두레패의 특징은 제금이 있는 것과 법고(벅구)의 숫자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제금이 다른 농악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데 이 두레패에는 반드시 포함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특이한 점이 고양시의 대표적인 두레패로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점이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무형유산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1 일산동구 성석동 일원 2005-07-29
    41 제 43호 황치신신도비 및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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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치신신도비 및 묘소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황치신신도비 및 묘소

    묘는 구파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이어진 63번 지방도로 좌측의 지축동 중고개 마을에 위치하며 貞敬夫人 황씨 묘와 하나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소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1쌍이 있다. 봉분은 호석이나 병풍석 없이 원형이며 봉분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는데 앞면에 ‘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領經筵事 兼春秋館事 行崇祿大夫 判中樞府事 諡胡安公 黃公之墓 貞敬夫人 黃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대좌·비신·이수로 이루어진 신도비가 위치하며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황치신(1397~1484)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孟忠이다.

    1 덕양구 지축동 산 72-1 2005-07-29
    42 제 44호 익령군 이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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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령군 이치 묘소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익령군 이치 묘소

    묘는 성사동 오리골마을의 동쪽 건자산 아래의 고양시청에서 서오릉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雲峰 朴氏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소에는 묘비, 혼유석, 묘표,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의 특징을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 정면의 화강석 묘비는 세조 12년(1466) 3월 13일에 건립된 것으로 앞면에는 ‘太宗恭定大王子 益寧君 昭剛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익령군은 조선 제3대 태종의 여덟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善嬪 安氏이다.

    1 덕양구 성사동 3-5 2005-07-29
    43 제 45호 이규령 묘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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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령 묘비문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이규령 묘비문

    묘와 묘비는 벽제동 영성군 이계묘의 앞에 있으며 단분으로 둘레석이 둘러져 있고 묘소에는 묘비 1기만 있다. 이 묘비는 여느 비석과는 달리 비석의 좌대와 비신이 분리되지 않은 채 통으로 깎아 만든 비석이다. 비문은 그의 부친인 회원군이 지었는데 여기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제사 지낼 자산인 토지 매입, 사들인 노비, 제사 지낼 날짜, 제수품목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다른 보통의 비문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문서의 형식으로 후면부터 시작된 내용은 11살이란 어린 나이에 죽은 외아들을 애도하면서 지은 유언으로 크게 5문단으로 나누어졌다. 이규령은 회원군의 아들로 11세에 사망했다. 묘비의 설립연도는 1666년경이며 설립자는 선조대왕 손자 회원군이다.

    1 덕양구 벽제동 산 42-5 2005-07-29
    44 제 46호 고양밥 할머니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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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밥 할머니 석상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고양밥 할머니 석상

    고양시에 있는 유일한 석불로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2004년 12월 정비한 이 공원 내에는 현재 이 석상 이외에도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총 4기의 석물 중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밥할머니석상은 다른 석물과는 달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45°정도 옆으로 세워져 있다. 석상의 옆에는 ‘동산동 밥할머니석상 이야기’라는 안내판이 있어 이 석상과 관련된 전설을 기록해두고 있다. 석상은 최근에 만들어진 대좌를 포함하여 총 높이 155.5㎝이고 현재 얼굴 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석상의 팔목과 어깨 등은 매우 풍만하여 전체적으로 얇은 곡선들이 몸을 휘감은 듯 보인다. 수인의 경우 왼손은 施無畏印을 하고 오른손은 약함을 받치고 있다. 立像으로 생각되는데 무릎아래 부분이 결손되어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석상의 뒷면은 비교적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따로 광배를 만들어 받쳤을 가능성이 있다.

    1 덕양구 동산동 10-2 2006-11-01
    45 제 47호 동산동 비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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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동 비석군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동산동 비석군

    고양밥할머니석상이 있는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있다.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吳挺日淸德恤民善政碑와 德水慈氏橋碑銘, 嚴纘善政碑가 있다. 덕수자씨교비명은 조선 현종(1660)때 덕수교 다리를 만들면서 이 비를 세우게 된 배경, 공사기간, 사용경비, 그리고 도움을 준 사람 1000여 명의 인명을 이두 문자로 기록한 것이며, 吳挺日淸德恤民善政碑는 당시 관찰사였던 오정일의 공덕비이다. 그리고 엄찬은 숙종 16년(1690)부터 숙종 17년(1691)까지 고양군수를 지냈던 인물이다.

    1 덕양구 동산동 10-2 2006-11-01
    46 제 48-1호 백석동 흰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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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 흰돌제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백석동 흰돌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흰돌제는 백석동의 지명유래로서 옛날부터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며,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통해 마을이 발전 할 수 있도록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옴. “흰돌”에 대하여 향토문화를 계승하고 마을의 항구적인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흰돌보존위원회(백석동단체협의회)에서 매년 음력 3월 초 길일에 맞추어 백석동민들과 함께 지내는 마을 제례임

    1 일산동구 백석동 1235 2007-08-10
    47 제 48-2호 백석동 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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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 흰돌

    12 일산동구 백석동 1235 2019-12-20
    48 제 49호 희정공 성억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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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정공 성억묘소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희정공 성억묘소

    희정공 성억은 고려 우왕 12년(1386)에 태어나서 조선 세종 30년(1448)년에 돌아가셨으며 시호은 희정이다.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예조판서 석인의 아들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공조정랑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에 군자부정, 공조판서, 전라도관찰사, 중추원판사 겸 병조 판서를 겸하고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공의 딸이 태종의 4자인 성녕대군에출가 하였다.

    1 덕양구 대자동 산27 2007-08-10
    49 제 50호 희옹공 이숙균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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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옹공 이숙균 묘소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희옹공 이숙균 묘소

    조선 초의 문신으로 태조 6년(1397)에 출생하여 세종 30년(1448)에 사망하였고, 자는 균평, 본관은 단양으로 익평공 우의정 이무의 손자이다. 세종 5년(1423)에 외직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서방을 지키는 방책을 자주 올렸으며, 세종 8년(1426)에 광주 목사로 부임하였고 후에 강흥부사로임명 되었으나, 임지에 나가기 전에 세상을 뜨므로 세종은 그의 공을 높이 여겨 가선대부한성판윤에 증직하고 예장 하였다. 시호은 희옹공 이다.

    1 일산동구 식사동 산158-1 2007-08-10
    50 제 51호 김지남 비갈 및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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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남 비갈 및 묘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김지남 비갈 및 묘

    김지남은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으로 1654년(효종 5)에 태어나 1718년(숙종44)에 돌아갔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광천(廣川)이다. 만 18세인 1672년) 역과에 급제한 후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했다. 특히 중국 청나라로부터 염초제조법을 알아내어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지었고 1712년(숙종 38)에는 청나라와 국경을 확정하여 간도 및 토문강 동쪽이 조선의 영토로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였다.

    이외에도 김지남을 아들 경문과 함께 중국, 일본과의 외교사를 정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편찬하여 외교사(史)에 큰 업적을 남겼다. 김지남을 역관으로서의 큰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지남의 묘소에 세워진 비갈은 사면에 글이 새겨진 금석문으로 비문 뒷면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의미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을 제외한 비문기록으로는 보기 드물어 그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아 고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곳 우봉 김씨 묘역에는 수 십 기의 묘소가 자리해 있는데 대체적으로 묘역의 상단에 선대조를 모시고 아래로는 후대의 묘소를 조성하였다.
    상단 중앙에 위치한 김지남의 묘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조성하였다. 우선 묘소의 중앙에는 반달 모양의 비두(碑頭)를 한 비갈(碑碣)이 1기 세워져 있는데 비문으로 보아 김지남과 증 정부인 설성박씨가 쌍분으로 모셔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비갈은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좌는 화강석 재질에 운문무늬와 꽃 무늬가 새겨져 화려함이 돋보인다. 비문 앞에는 혼유석과 상석이 위치하며 상석 전면에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1 덕양구 오금동산 195-5 2009-08-31
    51 제 52호 신원동 덕명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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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동 덕명교비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신원동 덕명교비

    규모는 총 높이 286cm, 비신 가로 95cm, 두께 25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있는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전자(篆字)로 ‘경기도 고양군 덕명교’라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는 전자 이외에도 가는 글씨로 된 비문이 전면(全面)에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도 비의 중간 부분부터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양 신원 덕명교량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수십 명의 인명이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내용은 한양과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관서로(關西路) 구간 중 신원동 곡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瀚)과 당시 고양 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通政大夫 柳後聖), 그리고 정헌 대부 윤면지(正憲大夫 尹勉之), 이상식(李尙植), 홍시우(洪時雨)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되어 있다. 즉 앞면은 비의 서문으로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곡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자세하게 표기해 둔 것이다.
    신원동 해방촌 마을의 중소기업은행 축구연습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비는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 있는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

    1 덕양구 신원동 2009-08-31
    52 제 53호 이천서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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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서씨 묘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이천서씨 묘

    정부인 이천서씨는 망월암 이축의 부인이다. 묘는 도내동 한산이씨묘역의 이축의 묘와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 이훈 부조지묘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6각의 봉분 조임석이 2단으로 설치되어 있다. 6기의 조임석 크기는 312(하나의 조임석은 두 개의 석재가 이어져 있음)×30cm이다. 묘 앞에는 문인석 1쌍, 상석, 최근에 만들어진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143×42×34cm 이고 상석은 141×90×20cm이다. 묘비는 6.25때 깨어져 1957년에 다시 세웠다.

    묘소는 모두 한산이씨 광목공파 소유이며, 이축선생묘소와 은지는 이미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의 남쪽으로는 주택가와 공장이 약간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군부대가 위치하나 대부분 농지이다. 하지만 화정신도시와 매우 가까워 인근에 신도시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1 덕양구 도내동844-3임 2009-08-31
    53 제 54호 이유청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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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청 묘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이유청 묘

    목은선생의 5대손이며 참찬(參贊) 諱 훈(塤) 안소공(安昭公)의 아들인 諱 惟淸(韓原君)公은 1486年 (성종 17)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 장령(掌令등을 역임하고 1498年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때에 집의(執義)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반대했다가 삭주(朔州)에 流配된 후, 3년 만에 풀려나왔다. 그러나 곧 이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삭직(削職)되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1504)으로 재 등용되어 집의동부승지(執義同副承旨)등을 지내었다.

    중종 2년(1507)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그 후 우부승지(右副承旨),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헌(大司憲), 호조참판(戶曹參判)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중종 3년(1508) 功臣에 오르지 못한 신복의(辛服義)의 역모사건에 연루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가 1511년 좌참찬(左參贊)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중심인물이 되어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을 肅淸하여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그 후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중종 18년(1523)에 左議政이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으며 중종 23년(1528)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어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묘는 도내동 은못이 마을의 한산이씨묘역에 위치하며 貞敬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소에는 상석, 고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2쌍이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쪽에 작은 것을 배치했다. 장명등의 크기는 총 높이 204cm, 지붕 너비 88cm이다.
    봉분 앞에는 2기의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근래에 다시 세운 것이며 옛 묘표에는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監 春秋館事 世子傅 韓原君 李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180×45×19cm이며, 받침은 40×90×53cm이다. 상석은 6.25때 한쪽이 깨어져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깨어진 상석은 묘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20×160×97cm이다.

    1 덕양구 도내동844-3임 2009-08-31
    54 제 55호 황윤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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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윤길 묘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황윤길 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이다.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 1567년 지평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황주(黃州)목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좇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이 발발된 1592년에 우송당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때 조성되었을 것이나 전란 중에 석물을 설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추정할 때 약 400여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석물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상석 앞의 향로석은 제례를 위하여 1982년 설치한 것이다. 비석 및 비문은 전하는 것이 없어 왕조실록과 징비록 등 고문서를 참고하여 1982년 후손들이 행적위주로 작성하여 건립하였다

    1 덕양구 지축동72-15 2009-08-31
    55 제 56호 국사봉 지석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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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봉 지석묘군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국사봉 지석묘군

    국사봉은 화정동의 동북쪽 해발 109.4m인 산이다. 현재 군부대가 있는 국사봉의 정상부근에는 장사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중 상당수가 청동기시대 이후에 제작된 고인돌로 추정하고 있다. 인접한 지역인 파주시 교하면과 활동면에서도 유사한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있는 장사바위는 직경 10m도 넘는 큰 바위였다고 하나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엄청나개 큰바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바위들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지상에 노출된

    노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대부분이며 지석묘를 썼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노반을 이용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2010년 국사봉 지석묘군에서 동쪽으로 1Km정도 떨어진 도내동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 후기 거주지가 댜량으로 확인됨에 따라 고인돌 인근에서 고조선시대 사암들이 많이 살았음이 재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유경식 마제석삼(有莖式 磨製石劍)이 있다. 석검은 국사봉 북면에서 군부대의 병사가 참호를 파던 중에 발견되었다. 국사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종류의 석검은 평남, 황해도 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지석묘(支石墓)는 고인돌(dolmen)이라고 불리는데,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더불어 고조선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국사봉 지석묘군은 고양사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선사유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1 덕양구 화정동 148-53일대 2010-06-15
    56 제 57호 고양 들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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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들소리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고양 들소리

    고양들소리는 옛 고양군 중면 백석리와 식사리에서 수백년 전승되어 내려오던 순수한 고양지역 토박이 소리꾼의 맥을 이어온 향토민요(농요)이다.
    백석리에서 故장선환의 고양농요 소리와 故최형식의 12채 풍물가락을 故최기복 선생이 전승 받았고 식사리에서 故이성일의 소리를 故이천봉이 이어받았으며 다음 이금만 선생이 전승 받았다. 그 뒤를 최장규가 이어받아 2000년도에 최기복.이금만 선생과 함께 고양들소리 보존회를 설립하여 전승 활동을 하고 있다.

    1 덕양구 행신2동 733-2 2010-07-29
    57 제 59호 장의중 효자정려각과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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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의중 효자정려각과 현판

    <출처:고양문화원 사이트>

    장의중 효자정려각과 현판

    장의중의 묘와 정려, 효자문은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입구 식당가의 뒤편 구릉에 위치해 있으며, 장의중 효자정려각은 고양시에서 유일하게 정려각과 효자정려문이 남아 있는 유교 유적입니다. 정려는 한옥 형태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일부가 훼손되어 콘크리트로 일부 개축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2칸으로 안에는 위패, 제기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려에는 ‘효자학생 장의문지려(孝子學生 長宜中之閭)’란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 있고 정려문의 판은 붉은색으로 홍살은 모두 8개이며 효자문은 정려로부터 연결된 쇠줄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장의중은 조선시대 말의 효자로 어머니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헌혈하려고 하였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1905년 고종으로부터 정려와 효자문을 사사 받았습니다. 정려문 뒷면 30m 뒤편에 장의중의 무덤이 자리해 있습니다

    1 덕양구 원당동 산80-2 2012-08-16
    58 제 61호 최영장군 위령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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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장군 위령굿

    <출처:고양신문>

    최영장군 위령굿

    고려말의 명장 충신인 최영 장군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매년 펼쳐지는 굿판이다. 장군거리 등에서는 작두를 타기도 한다.

    1 덕양구 토당동 879-9 2012-12-10
    59 제 62호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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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출처:관광 사이트>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1929년 흥국사 주지 해송스님이 재원을 마련하고 당시 개운사에 머물던 정호스님(속명 박한영, 1872~1948)에게 만일염불회에 대한 내용을 부탁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주요 내용은 흥국사의 최초 창건 연혁 및 조선후기 절 명칭에 대한 유래와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약사전, 칠성전, 나한전, 산신각 등에 대한 다양한 불사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19세기부터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 신앙인 ‘만일염불회’에 대한 고양시의 유일한 기록으로 ,비문을 통해 당시 만일염불회 후원이 왕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근대기에 제작된 비이기는 하나, 사찰의 연혁 및 유래와 조선말~근대에 만일염불회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20세기 초 불교사 및 불교신앙, 사회경제사, 후원체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 역사적, 사료적 가치고 높다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도 포함되어 있어 고양향토사 연구에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흥국사 만일회 기비>는 흥국사의 정문인 일주문 (一株門) 안쪽에 있는 비석으로 고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은 1천년이 넘은 흥국사의 역사를 정리하고 특히 1904년부터 1928년까지 이어진 흥국사 만일회 염불 법회를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남긴 비문입니다. 이 비석은 좌대. 옥개,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후좌우 4면에 모두 비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신은 오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전면 윗부분에 두전 (전서)도 눈에 띄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1 덕양구 흥국사길 82 2014-06-09
    60 제 63호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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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

    <출처:관광 사이트>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각, 회화, 공예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은 주지스님 전언에 따르면 1970년대 노적사 입구에서 주둔하던 군부대에서 막사를 건축하면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사자상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화강암 계열의 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방형에 가까운 몸통과 좌대, 신체에 비해 간략해진 다리 등의 표현에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덕양구 대서문길311-35 2015-06-15
    61 제 64호 이가순선생 관개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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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순선생 관개송덕비

    <출처:관광 사이트>

    이가순선생 관개송덕비

    양곡 이가순 송덕비는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행주산성 역사 공원 안에 자리해 있습니다. 본래 지금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50m 떨어진 행주 양수장 내에 있었으나 201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비석 앞면에는 ‘이공 가순 관개 송덕비’라 쓰여 있는데 하단부에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총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비문의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년도와 이가순, 이원재 선생의 공적과 세운 사람들의 명단 등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관개, 수리의 개척자인 양곡 이가순 선생과 그의 아들인 이원재의 공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중 이가순 선생은 본래 황해도 출신으로 1867년 11월 출생하여 1943년 4월 12일 돌아간 인물입니다. 이가순 선생은 본관이 완산인데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삼성당 마을에 정착하여 현 농어촌기반공사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입니다.
    양곡 이가순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룬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 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게 됩니다.
    2010년 11월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이가순 선생을 선정하여 이가순 선생과 이원재 선생의 공적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양시에서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양수장 내의 이가순 선생 송덕비를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는 고양 행주산성역사공원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1 덕양구 행주동 145번지 2017-04-06
    62 제 65호 장수황씨 추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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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황씨 추원록

    <출처:관광 사이트>

    장수황씨 추원록

    장수황씨 추원록'은 장수황씨 황두증(1658-1705)이 기록한 필사본(고조와 증조의 문집)문중에서 전승되고 있는 장수황씨에 대한 계보, 비문, 행장, 시문 등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해당 문화유산는 장수황씨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온 문서로 고양 지역에 세거한 장수황씨 문중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조선후기 사유 재산에 대한 사항 등도 살펴 볼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ㆍ사료적ㆍ향토적 가치가 높다.

    1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65 2018-07-17
    63 제 66호 황즙 입안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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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즙 입안문건

    <출처:관광 사이트>

    황즙 입안문건

    황즙 입안문건'은 황치신의 후손 황즙이 충남 보령으로 낙향하여 살던 중 1717년 화재로 모든 재산 문적이 소실되자 조정의 재가를 받기 위해 1776년 작성한 것이다.
    해당 문화유산는 장수황씨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온 문서로 고양 지역에 세거한 장수황씨 문중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조선후기 사유 재산에 대한 사항 등도 살펴 볼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ㆍ사료적ㆍ향토적 가치가 높다.

    1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65 2018-07-17
    64 제 67호 고양 상운사 현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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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상운사 현왕도

    1 대서문길197-22 2019-12-20
    65 제 68호 고양 만경사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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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만경사 석조여래좌상

    1 일산동구 성석로 77-93 2020-12-11
    66 제 69호 고양 안소공 이훈 및 비인현주 이씨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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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안소공 이훈 및 비인현주 이씨 묘비

    1 덕양구 도내로 81-12 2020-12-11
    67 제 70호 고양 백운암 마애미륵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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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 백운암 마애미륵여래좌상

    1 덕양구 북한동 산1-1 2021-01-15
  • 연번 사찰명 소재지 등록번호 종단명 창건시기 등록 년월일 소장문화유산
    연번 사찰명 소재지 등록번호 종단명 창건시기 등록 년월일 소장문화유산
    1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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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국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흥국사

    한미산(일명 노고산)아래에 있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흥서암(興瑞庵)으로 문무왕 1년(661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그후 영조 46년(1770년)에 왕이 친히 행치하여 잠시 머물렀을때 산 이름을 노고산에서 한미산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흥국사로 바꾸었다.

    덕양구 흥국사길 82 38 대한불교 조계종 661 1966-04-12 고양 흥국사 대방(등록 592)
    고양 흥국사 극락구품도(유형 143)
    고양 흥국사 괘불(유형 189)
    고양 흥국사 영산회상도(유형 296)
    한미산 흥국사 약사전(문자 57)
    고양 흥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문자 104)
    한미산흥국사나한전(향토문화유산 34)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향토문화유산 62)
    2 상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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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운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상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북한산 원효봉(元曉峰) 남쪽 중턱에 있다. 신라 때 원효(元曉:617∼686)가 삼천사(三千寺)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 이후 승병들이 머물렀던 절이다. 1722년(조선 경종 2) 승병장 회수(懷秀)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바꾼 것을 1813년(순조 13) 승병장 태월(太月)과 지청(智廳)이 중건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1864년(고종 1) 긍홍(亘弘)이 극락전을 중건하고, 1898년 한암(漢庵)이 큰방

    을 중건하였으며, 1912년 주지 법연(法延)과 덕산(德山)이 법당을 중수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범종각·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석탑과 석등 부재가 남아 있다. 그 중 석탑은 기단부와 1층 탑신만 전한다. 절 뒤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바위가 있다.

    덕양구 대서문길 197-22 39 대한불교 조계종 1713 1967-07-03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유형 190)
    고양 상운사 석불좌상(유형 354)
    3 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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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고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태고사

    구암봉 기슭의 긴 계단 위에 대웅전이 서향으로 서 있고, 그 옆에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운 높이 2.3m, 너비 1m, 두께 24cm의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611)와 비각이 서 있다.
    비석은 널찍한 사각 지대석 위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운 뒤 단부에 이수를 놓았는데, 태고사를 세운 보우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왼쪽에 돌로 지은 산신각이, 산신각 뒤에는 부도탑 3기가 남아 있다.
    경내에는 원증국사 사리탑인 태고사 원증국사탑(보물 749)이 보존되어 있는

    데, 하대가 넓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정하다. 문양과 조식이 고려 후기의 뛰어난 제작 솜씨임을 단적으로 알게 한다. 부도탑은 넓은 석단으로 이루어진 부도전에 세워졌는데, 사각형 지대 위에 사각형 하대를 놓고, 8각 꽃모양을 조각한 중대와 귀꽃문을 새긴 상대를 놓아 탑신을 받치고 있다.

    덕양구 대서문길 106 37 대한불교 태고종 1341 1988-07-28 고양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611)
    고양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749)
    4 무랑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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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랑샤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무랑샤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로 북한산성 입구에 있다. 1895년(조선 고종 32) 고종의 후궁인 순빈(淳嬪) 엄(嚴)씨가 창건하였다. 순빈은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다. 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 주는 사찰로 알려져 원당(願堂)이라고 하였다. 또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렀다. 1902년에 대웅전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1980년에 무량(無量)이 주지로 부임한 뒤에 절 이름을 무량암이라 하였다가 다시 무량사로 바꿨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유물로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있다. 둘다 189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덕양구 대서문길 184 1 대한불교 법화종 1897 1988-07-28  
    5 노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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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적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노적사

    조선조 숙종당시 팔도도총섭(승병관리기구)이었던 성능 화상이 창건하여 사찰명을 진국사라 하여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북한산성 축성, 삼각산,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인 북한지를 편찬하고 불교문화와 군사시설 확충에 많은 업적을 남기었으나 그후 소실되어(연대미상) 빈터만 남게된 것을 1960년(불기 2504년) 무위스님과 불자들의 뜻을 합하여 사찰을 복원해 노적사라 하였다. 경내에는 창건당시 석사자상(해태상)과 석축이 남아있는 등 그 역사성이 인정되어 전통사찰법 제3조 및 동법시행령 제4조의 규정에 따라 2000년 12월 11일 노적사를 전통사찰로 지정(제 201호)된 고양시의 전통문화 자산이다. 그러나 2002.6.16.화재로 인하여 요사체 및 종각 건물이 전소되어 이에대한 복원이 절실한 상태이다.

    덕양구 대서문길 311-35 201 대한불교 조계종 1712 2001-01-17  
    6 국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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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녕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국녕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713년(조선 숙종 39) 청철(淸徹)과 철선(徹禪)이 창건했다. 그러나 이곳은 사찰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유정(惟政)이 수도를 하던 터로 추정되며 사찰이 들어선 의상봉(義湘峰)은 신라 때의 고승 의상이 참선을 하던 참선도량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곳에 사찰이 들어선 것은 북한산성 축조와 관련이 있다.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던 성능(聖能)의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1713년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의승(義僧)을 뽑았다.

    그리고 이들 의승을 산성 안에 두고 성문과 수문·창고 등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21개 사찰을 창건 또는 보수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찰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국녕사를 비롯해 중흥사·태고사·진관사·노적사·승가사·상운사 등이 있다. 창건 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단지 창건 때는 총 8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1991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탄 것을 능인선원(能仁禪院)에서 1998년 10월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과 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다. 부근에 한월당(漢月堂) 대선사의 부도가 전하나 한월당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덕양구 대서문길 268 203 대한불교 조계종 1916 2003-01-25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향토문화유산 63)
    7 아미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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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아미타사

    이 사찰의 창건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현장법사의 불교의 새로운 학풍을 배우기 위해 가던 중 고구려에 잡혀 뜻을 못 이루다가 통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찰에 있는 바위굴에 석불을 모시고 통일을 기원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방치되었던 이 암굴을 1966년 박지연 스님이 보수하여 대웅전을 짓고 덕암사를 창건하였으며, 그 전통성을 인정 받아 2005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6년 승영스님이 새롭게 주지로 부임하여 사찰의 이름을 아미타사로 변경하여 꾸준히 법등을 이어가고 있다.

    덕양구 대서문길 145-63 204 무등록 646 2005-01-24 덕암사 목조보살 좌상(유형 246)
    8 중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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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흥사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중흥사

    중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 사찰로 고양시 북한산 장군봉과 동안봉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103년(고려 숙종 8년)에 조성된 <중흥사명 금고(重興寺銘 金鼓)>에 ‘三角山重興寺’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적어도 12세기에는 사찰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고려 말 고승인 태고 보우(太古 普遇, 1301∼1382)가 1341년부터 1346년까지 중수하였으며, 1498년 지정(地井), 경호(?晧), 성륜(性倫) 스님에 의해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왔으나, 1904년 화재로 전소되어 폐허로 남아 있다.

    근대기에 월초스님(1858∼1934)과 청암스님(?∼?)에 의해 중창이 지속적으로 모색되었고, 이후 1974년부터 연등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최근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다시 세워 법등을 지속적으로 이어 오고 있다.

    덕양구 대서문길 396 104 대한불교 조계종 고려 2014-01-03 북한산 중흥사지(기념물 136)
    9 봉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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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암

    <출처: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봉성암

    봉성암은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인 1713년(조선 숙종 39년) 창건된 북한산의 승영사찰(僧營寺刹) 가운데 하나이다. 봉성암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1745년 성능(性能)이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북한지」에는 봉성암이 “구암봉 아래에 있으며, 25칸으로 승려 성능이 창건하였다(在龜巖峯下二十五間僧性能所?).”라고 기록하여 조선후기 팔도도총섭으로 활동한 계파당 성능에 의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봉성암은 1860년에 보담(寶曇)이 중건하였으며, 1913년에는 최삼호(崔三?)가

    주지로 임명되어 조선말~근대기에도 꾸준히 사찰의 명맥을 이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1960년 근암스님의 중창과 최근에 대웅전과 공양간을 새롭게 세워 법등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한편, 부도전에는 봉성암을 창건한 성능스님의 부도인 고양 봉성암 전성능대사부도(高陽 奉聖庵 傳性能大師浮屠)(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제188호)가 남아 있어 사찰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다.

    덕양구 대서문길 433 105 대한불교 조계종 1713 2016-01-03 고양 봉성암 전 성능대사부도(유형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