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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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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삼각산 중 가장 높은 곳이며, 해발 836.5m 가량에 위치한다. 인수봉 서쪽에 있으며, 흰구름을 허리에 두르고 솟은 바위라는 데서 백운대(白雲臺)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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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봉

북한산성 대서문 방면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502m이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명칭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정상은 평탄한 편이다. 북쪽으로 원효봉(元曉峰)과 마주하고 있으며, 이 봉우리에서 남쪽의 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715봉~문수봉으로 의상능선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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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봉

높이는 해발 505m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명칭은 봉우리 아래에 있는 원효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효암은 신라시대 원효(元曉) 대사가 수도하였던 토굴이다. 원효봉능선은 북문~염초봉으로 이어져 백운대로 향한다. 효자동~시구문(서암문)~원효암~원효봉까지 산행코스는 2.3㎞ 거리에 약 1시간 15분이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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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덕암사 목조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6호)

아미타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사찰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90년대 초반 강원도 철원에 있었던 심원사의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협시보살 2구만을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본존불은 현재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환희사로 이안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17호로 지정되었다. 덕암사 목조보살좌상은 우협시가 높이 73.5cm 무릎폭 49.8cm이며, 좌협시는 높이 72cm 무릎폭 52.7cm로 조선후기에 제작되는 보살상 중에 그 크기가 중형에 속한다. 이 작품은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복장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반원형의 얼굴과 원통형의 코, 변형통견의 착의법 등에서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조각승 인균(한문)이나 응원(한문)이 제작한 불·보살상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그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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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

중흥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 장궁봉과 등안봉 아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중흥사에서 사용했던 청동북(1103년 제작, 고려 숙종 8)이 남아 있어 늦어도 10세기 이전에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기에는 임제종의 개창주인 태고 보우(1301~1382)가 주석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학자이자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1435~1439)이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30여 칸의 규모를 136칸으로 증축하고 팔도도총섭(한문)을 머물게 하여 산성 내 모든 승영사찰(한문)으 관리하는 등 북한산성의 중심 사찰로 가장 왕성한 사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15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면서 최근까지 그 자리만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도 2000년대 후반부터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대웅전과 만세루 등 주요 건물들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며 중흥사의 원형 회복을 위해 노력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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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0호)

천불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아미타불좌상·관음보살좌상·대세지보살좌상으로 구성된 3구가 한 세트이다. 본존인 아무타불좌상은 높이 57cm 무릎폭 40cm이고, 우협시인 관음보살좌상은 높이 40.5cm 무릎폭 25.5cm이며, 좌협시인 대세지보살좌상은 높이 55.4cm 무릎폭 33cm로 조선후기에 제작되는 불상 중에 그 크기가 중형에 속한다. 3구 모두가 앙련과 복련이 대칭적으로 맞대어진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는데, 관음보살좌상의 대좌에는 조상기(한문)를 아미타불좌상의 대좌에는 개금기(한문)를 묵서로 기재하고 있다. 1713년(조선 숙종 39)에 진열(한문) 등 5명의 조각승이 최초로 제작하여 노적사(한문)에 봉안하였고, 이후 17년 후인 1730년(조선 영조 6) 백기(한문) 등 2명이 개금하여 상운사(한문)에 이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어깨가 좁아져 한층 강조된 얼굴이나 가슴과 하반신에서 나타나는 U자와 S자 대의자락 등의 양식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각승 진열이 중·장년기에 제작한 불상으로도 알려져 있어 조선후기 불상연구에서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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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보물 제611호)

고려 말기의 고승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에 대한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우리에게 태고 보우라는 당호와 조계종의 중흥조(한문)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301년(고려 충렬왕 27) 충청남도 홍성에서 홍연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인 1313년(고려 충선왕 5)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선사의 제자가 되었고 25세인 1325년(고려 충숙왕 12) 승과에 급제하였지만, 승려로서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감로사, 전단원 등에서 고행과 참선을 이어가다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 중흥사의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머물렀다. 이후 46세인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청공(한문)의 법을 이어 받고 임제종(한문)의 시조가 되었다. 귀국 후에는 공민왕의 부탁으로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한문)의 횡포를 피해 소설암, 속리사, 양산사 등에서 은거하다 1382년(고려 우왕 8) 겨울 82세에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원증국사가 입적한 3년 뒤인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워졌으며, 글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1328~1396)이 지었고 글씨는 문신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권주(미상~1394)가 작성하였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비신과 귀부로 구성된 고려후기 전형적인 탑비이며, 전체높이가 340cm로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한편, 비신 뒷면에 있는 음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당시 관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보물 제749호)

고려 말기의 고승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가 입적한 후 그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원증국사탑비와 떨어진 탑전에 따로 모셔져 있는데, 오래 전에 도괴되어 무너져있던 것을 1980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은 전체높이가 410cm이며, 탑신폭이 87.5cm로 그 규모는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장대석을 이용하여 만든 지대석 위에 기단을 비롯하여 탑신과 상륜 등의 모든 부재가 갖추어져 있는데,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하대석과 원형이ㅡ 탑신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재가 팔각형을 이루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팔각원당형 승탑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은 기단부터 상륜까지 사각·팔각·언형 등 다양한 형태의 부재들이 섞여 있어,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편이지만, 여러 단면의 부재들이 승탑의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후기에 건립된 승탑 중에서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건립 시기는 태고사 경내에 있는 원증국사탑비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워졌으므로 늦어도 1385년 이전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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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문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축조 당시에는 소남문(한문)과 문수문(한문)으로 불렸다. 이후 영조 임금의 행행 당시 대성문(한문)을 영구히 폐쇄하고, 문수문을 정문(한문)으로 하라는 명을 받들어 대남문이 되었다. 성문 하부에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또록 했으며,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현재의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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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 계곡에 위치하며, 북한산성의 가장 낮은 곳에 있어 산성안의 물은 모두 이곳으로 흘러내려온다. 성곽 축조시 가장 크게 지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적으로 추정된다. 이 자리에는 큰 바위가 있으며, 이곳에 수문공사와 관련된 내용이 각자되어 있다. 1711년(조선 숙종 37) 수구공사 감독 통덕랑 서상원의 감독 하에 6월1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10일에 공사를 마쳤다. 주변의 성벽이 잘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암반에는 치도흔적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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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문 (시구문)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서암문은 성문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문 출입구가 네모난 모양인데 반해, 서암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형태를 띠고 있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한문)를 달았떤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북쪽 체성은 둥글게 튀어 나와 일종의 치(한문)이거나 문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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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다른 성문과는 달리 대(大)자가 붙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18세기 후반에 대문으로서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현재까지 여장과 문루가 복원되지 않았다. 『북한지』에서 "북문에만 도로망이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군사적 중요성은 약한 편이며,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한문)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너비 4m, 높이 3.35m이고, 육축부의 너비는 약 16m이다. 문이ㅡ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 문루는 없으며 초석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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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문

북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서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한문)를 갖추고 있고, 그 위에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로 북한산성 대문들 중 큰 편에 속한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강암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에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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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동암문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성 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의 중흥사에 이르는 길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하였으며, 8개의 암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내부는 방형의 문으로 높이 1.9m, 폭 2.7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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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문

북한산성의 평탄한 서쪽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차단성이다. 증취봉과 영취봉을 연결하는 성벽으로 북한산성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북한산성 축성 후 1712년 숙종대왕의 행행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1712년(조선 숙종 38) 5월에 중성축조 공사를 착수하여 수문의 홍예 축조, 결성 보축과 함께 1714년까지 축성이 이루어졌다. 『북한지』에서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한문)를 갖추고 있고, 그 위에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3m, 높이 4.5m,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3.3m, 폭 2.7m이다. 홍예 양쪽 육축부 상단에 누혈이 한쌍씩 설치되었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떤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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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유영지

훈련도감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하나로 노적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수문 북쪽에서 용암까지 체성2,292보, 여장 704첩과 수문, 북문, 서암문, 백운봉암문을 축조하였다. 유영은 대청 18칸, 내아 8칸, 양곡창고 60칸, 무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 3칸, 행각 11칸에 이르고, 유영감관(한문) 1원, 서원(한문) 1인, 고직(한문) 2인, 수직군(한문) 1인, 사환군, 북문직(한문) 각 2인, 수구문직(한문) 1인을 두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며 총 길이 200m, 높이 7m에 이르는 긴 석축과 각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춧돌, 기단석, 대석과 우물, 연못자리 등이 남아 있다. 대지 중간에는 2m 높이의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여러 채의 건물을 배치했던 흔적과 건물 기단, 19개의 주춧돌이 발견되며 간혹 원형의 주초석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왼쪽으로 독출된 또 하나의 연결된 석단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기단과 주춧돌 3개가 있다. 건물 주춧돌 우측으로는 가로 7m, 세로 9m 규모의 연못이 현존하고 있으며 화강암 돌을 4각으로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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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영루지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산영루는 '북한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2013년 6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凸'자의 평면 구성을 갖춘 정자로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중기 1603년 문인인 이정귀(한문)가 남긴 「유삼각산기(한문)」에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한산성이 축성(1711년)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영루는 그 아름다운 이름처럼 당대 명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茶山 한문, 1762~1836)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로 이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성호 이익(한문 한문, 1681~1763)은 산영루에 뜬 달을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기록하는 등 조선 명사들의 흔적과 문향(文香)들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의 산영루는 10개의 주춧돌 등 그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고양시가 고양600년 역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사진자료등을 통해 2014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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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행궁지 (사적 제479호)

행궁은 임금이 궁궐을 나설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을 의미한다. 북한산성 행궁은 도성 북쪽에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했던 행궁으로 산성을 축성한 다음해인 1712년(조선 숙종 38)에 건축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15년 을축(乙丑)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 및 강화 행궁 등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하기 위해 세웠던 임시궁궐로 알려져 있으며, 수도 한양의 경복궁처럼 앞에는 외전이 뒤에는 내전이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집권층이ㅡ 국가 의식과 백성을 향한 애민 정신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한 북한산성 행궁은 2011년도부터 경기도·고양시·경기문화재단이 합심하여 잃어버린 원형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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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청상창지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야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북한산성 행궁 아래에 있다. 『북한지』에서 "상창, 중창, 하창과 어공미를 보가ㅗㄴ하던 호조창 등 관성 4창과 훈창, 금창, 어창은 삼군문 창고 3곳이 있었으며, 성 밖 탕춘대에는 평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상창에는 "팔비헌(八非軒)"이라는 편액이 있으며, 관성장인 전통제사 이우의 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창의 규모는 대청 18칸, 내아 12칸, 향미고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 3칸, 군관청 4칸, 서원청 4칸, 고지기집 5칸, 월랑 2칸, 각문 7칸 등이 있었다. 창고 기능 외에도 성내 사무를 총괄하는 관성소를 함께 두었으며, 이곳은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이 근무하던 곳이다. 상창은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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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위영 유영지

금위영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하나로 보광사 아래에 위치해 있다. 용암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체성 2,821보, 여장 1,107첩과 용암문, 소동문, 동암문, 대동문을 축조하였다. 유영은 대청 18칸, 내아 6칸, 양곡창고 54칸, 무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등 총 145칸에 이르고, 유영감관(한문) 1원, 서원(한문) 1인, 고직(한문) 2인, 수직군(한문) 1인, 사환군(한문), 대성문직(한문) 각각 2인을 두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금위영이건기비를 비롯하여 가로 4m, 세로 2m 크기의 건물 기단, 주춧돌 9개, 돌계단 2개소, 장대석 7개, 석누조 1개가 있으며, 산기슭에는 무너진 담장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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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대

동장대는 봉성암 뒤쪽 사단봉에 위치하며, 금위영의 지휘소였다. 금위영은 용암봉에서 보현봉까지 축성을 진행하였으며, 동장대를 중심으로 주변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다. 주초석의 크기로 보아 세 개의 장대 중 건물의 규모가 가장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내 시설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행궁이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며, 북한산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유사시 저냊ㅇ을 지휘할 수 있는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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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암각문 암각문

독립운동가 정재용이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 북한산의 암각에 새긴 비문이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북한산과 북한산성 이야기|역사전문 정동일 선생님과 함께하는 북한산과 북한산성 그리고 문화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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