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 중국으로 가는 길목, 의주길

5020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양가와지볍씨부터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고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세요.
길에서만나는문화유산 테마지도
호수공원 문화원 5일장·시장 백송 유적 묘·왕릉 석교 공원 관측소 마을·초가 사당·서원·향교·영사정 성당 산성 시청 현판 청자요지 고인돌 벽제관지 석상 공릉천 참전비·비석 금표비·덕명교비
테마지도 나가기
고양의 문화유산을 만나다
 
 

16

1/2 페이지

이동
검색하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한 청렴의 표상, 최영장군 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한 청렴의 표상, 최영장군 묘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최영장군은 권율 장군과 함께 고양지역을 대표하는 유명한 장군입니다. 최영은 충숙왕(1294~1339)이 집권하던 1316년에 당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는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이며 사헌부간관을 지냈던 최원직의 아들입니다. 최영은 또한 이성계에게 살해된 우왕(1365~1389)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최영은 고려왕조와 혈연으로 맺어진 이해관계 속에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군의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장군의 묘소 뒤편으로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이 있습니다. 앞쪽의 최영장군 묘소는 부인인 문화류씨 부인과 합장되어 있고 뒤편의 부친 묘소는 혼자 잠들어 있는 단분입니다. 두 무덤 모두 고려조, 조선조 초기에 볼 수 있는 4각형의 둘레석이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시에서는 대표적인 4각형 무덤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인 최원직 선생의 묘소 좌측에는 최영 장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묘비가 있고 좌대와 비신, 덮개석이 잘 남아 있으며 끝 부분에 영 () 입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영장군은 고려말의 명장으로 홍건적, 왜구 등을 물리치고 명나라의 발호를 예견하여 요동정벌을 추진하였다가 휘하의 장수 이성계, 조민수 등의 위화도 회군으로 오히려 개성에서 참형을 당한 충신입니다. 지금도 일부 무속인들이 장군을 영신 (靈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공직자들에게는 청렴의 상징과 같은 인물입니다.
고양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 살림집, 영사정

고양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 살림집, 영사정

[복원 전 모습] [복원 후 모습]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소 재 지 :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영사정은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오래된 한옥 살림집으로 처음 지어진 때가 조선조 숙종 당시인 1709년입니다. 즉 300년이 넘은 고택입니다. 영사정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 대감이 자신의 아버지인 김일진을 영원히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안채는 자형이며 사랑채는 자형으로 전체적으로는 자형으로 이루어진 한옥 집입니다. 사당과 살림집이 함께 있는 점, 묵서명과 상량판을 통해 건립과 수리, 보수, 목수 등의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점, 김주신과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스토리가 있다는 점 등이 있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동향을 하고 있어 집 곳곳에서 아름다운 북한산의 주봉들도 한분에 볼 수 있어 고양지역 최고의 한옥임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영사정은 건린 연대(1709년)가 명확한 건물로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이며, 살림집의 형태를 취했다는 건축적 특징과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 및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바탕으로 2010년 3월 경기도 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어 복원사업을 추진하였으며  2014년 고양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사업을 완료하였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을 현장에서 확인하다, 연산군 시대 금표비

연산군의 폭정을 현장에서 확인하다, 연산군 시대 금표비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88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2 연산군은 고양시와도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월산대군의 부인인 본인의 큰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고양시 일대를 자신의 놀이터로  쓰기 위해 본인 말고는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때를 말해주는 생생한 기록이 바로 연산군시대 금표비입니다. 16세기 초 연산군 때에 와서 고양군 일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연산군 10년(1504) 가을에 왕의 놀이와 사냥을 위해 도성 밖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또한 한성으로 통하는 도로는 노량진 방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아 일반백성의 교통을 차단한 것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추방되어 노비로 살게 된 백성들의 원망은 점점 커지고, 고양군은 혁파되어 양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강화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고 중종이 즉위하자,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는 한편 고양군 등 각 군이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연산군시대 금표비는 연산군시대에 고양군 지역을 혁파 (革罷)하고 백성들을 모두 내 쫓은 후 유흥을 위해 통행금지 구역을 정한 것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던 의주로변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비석입니다. 연산군의 금표비는 고양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일한 비석입니다. 금표비의 앞면에는 금표구역에 들어온 사람은 재판 없이 목을 쳐 죽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특히 1504년부터 1506년까지 고양지역은 완전히 없애 버리고 주민을 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를 어긴 사람들은 삼족을 멸할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금표비는 연산군의 폭정(暴政)을 현장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공릉천에 돌다리를 만들고 그 역사를 기록하다, 신원동 덕명교비

공릉천에 돌다리를 만들고 그 역사를 기록하다, 신원동 덕명교비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52 소재지 : 덕양구 신원동 1685 이 교량비는 신원동 해방촌 마을의 중소기업은행 축구연습장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비는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 있는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비의 앞면에는 전자(篆字)경기도 고양군 덕명교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면에는 전자 이외에도 가는 글씨로 된 비문이 전면(全面)에 새겨져 있습니다. 비의 뒷면에도 비의 중간 부분부터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양시원 덕명교량명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수십 명의 이름이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의 내용은 한양과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관서로 구간 중 신원동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 것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이비의 건립자는 이한과 당시 고양군수인 통정 대부 윤후성, 그리고 정헌대부 윤면지, 이상식, 홍시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앞면은 비의 서문으로 주민 760여 명의 힘을 합쳐 공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자세하게 표기해 둔 것입니다. 이 교량비의 건립연대는 효정 9(1658)입니다. 고양시 공릉천 일대의 역사가 기록된 비석으로서 문화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습니다.  
고양 역사의 중심지 의주로, 벽제관지

고양 역사의 중심지 의주로, 벽제관지

지정번호 : 사적 14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한 벽제관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지명을 고(高)양동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으며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었습니다.  벽제관지는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한 객관(客館)이며, 벽제관지는 서울과 의주, 중국까지 연결되는 의주로, 연경로의 경로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조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1428번 중수, 1625년 이전 및 보수 등 비교적 옛 기록에 잘 남아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벽제관 전투로 유명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사진을 보면 앞 옆은 마루, 가운데는 방으로 이루어졌고 정청 (본청) 앞에 삼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몇 차례에 걸친 조사로 유구의 면적과 기능은 확인되었습니다. 벽제관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군수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숙박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이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1918년 당시 일본 총독인 데라우치는 벽제관의 부속건물인 육각정 (육모정)은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어 현재는 주춧돌과 기단석 등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밥할머니 석상

임진왜란의 의병장, 밥할머니 석상

지정번호 : 향토문화제 제4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밥할머니 공원 내 서울시에서 고양시로 들어오는데 이용하는 1번국도 통일로, 한창 삼송신도시, 은평 뉴타운 개발로 어수선한 통일로변 동산동(東山洞) 마을에 목 부분이 훼손된 채 북한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석상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밥 할머니 또는 고석(古石) 할머니라 부르는 이 석상은 현재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습니다. 석상은 총 높이가 141cm 가슴둘레는 85cm의 규모이며, 이 석상 앞에서 마을 주민들은 밥 할머니께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동산동 밥 할머니의 본래 성시는 해주오씨(밀양박씨라는 설도 있습니다.)로 알려져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양과 서울 은평구, 양주군 일대에서 의병과 관군에게 큰 도움을 주어 나라에 공적을 세우게 됩니다. 현재 고양지역에서는 이 밥할머니가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행주치마 부대의 여성 의병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인조반정에 일부 참여하고 병자호란 전란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 구휼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고양시 초등학교 3학년 사회과 탐구 교과서를 보면 이곳 동산동의 밥 할머니이야기가 전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북한산에 포위된 조선군과 명나라군대를 기지를 발휘하여 물리쳤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곳 동산동의 밥 할머니 석상에는 어린 학생들이 자주 찾아와 사진촬영을 하며 학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기도 관찰사, 고양군수, 덕수자씨 비석 등, 동산동 비석군

경기도 관찰사, 고양군수, 덕수자씨 비석 등, 동산동 비석군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47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10-2  고양 동산동 비석군은 고양 밥 할머니 석상과 함께 통일로변 창릉 모퉁이 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석군은 오른쪽으로부터 차례로 오정일 선정비, 덕수 자씨 교비명, 엄찬 선정비 순으로 세워져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350년 전 고양지역의 인물과 역사적 상황, 주요 유적, 도로의 현황 등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두 표기의 기록이 많아 고양지역의 향토사 연구 및 국문학적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1. 방백 오후정일 청덕 휼민 선정비 총 높이가 3m에 이르는 큰 비석으로 아랫부분의 귀부와 중간의 비신, 윗부분의 이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비석은 서기 1660년 고양군 덕수천(현재의 창릉천)에 새롭게 돌다리를 만들면서 당시 경기도 관찰사인 오정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앞면과 뒷면에 비문이 잘 남아 있어 건립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오정일(1610-1670)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복이며 호는 귀사입니다. 1639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및 경기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2. 고양 덕수 자씨 교비명 총 높이 3.4m의 비석으로 직사각형의 비좌에 비신과 옥개가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비문은 앞쪽 윗부분에 제목 글씨인 두전이 있고 그 아래로 비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은 조선 현종1(1660)에 조선남과 고양지역의 주민들이 서로 힘들 모아 덕수천(현 창릉천)에 돌다리를 만들고 그 내력을 상세히 적은 것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석교를 만들어 홍수에 대비하고 임금과 백성들을 편안히 다닐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있어 축조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비의 앞·뒷면에는 약800명의 사람 이름이 이두문자로 적혀 있어 학술적·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3. 고양군수 엄찬 선정비 좌측 끝에 있는 작은 비석입니다. 엄찬은 조선 숙종 16(1690) 1222일 숙종 17112일까지 고양군수를 지낸 인물입니다. 이 비석은 당시 군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화강석 비문이며 엄찬 군수는 충주목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선생 묘

우리나라 최초의 총리대신, 김홍집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2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6-1 김홍집선생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영사정 뒤편 20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고양시에서는 조선조 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묘역입니다.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된 묘역으로 정경부인 남양홍씨와 합장되어 있는 무덤이며 묘소 앞에는 1896년 조성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1기 세워져 있는데 후손 김정록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묘소 앞에는 비석을 중심으로 상석과 혼유석, 망주석이 있고 묘소 중앙에는 장명등 (長明燈)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홍집은 조선조 말기의 관료, 정치가로 좌의정, 영의정, 초대 총리 대신을 지냈으며 1894년 갑오경장을 주도한 근대한국사의 주요인물입니다. 온건개화파로서 중도개혁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정에서 그 뒷수습을 담당할 적임자로 선택되어 좌의정 겸 외무독판의 중직을 맡아 1885년 초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후 1896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실각되었고 친로(親露)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지목되어 김홍집은 광화문에서 군중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후에 충헌(忠獻)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대제학으로 추증되었습니다.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에 있었으나, 6·25 남침 뒤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로 이장하였으며 유고집으로 김총리 유고 등이 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조선 후기의 인물, 김지남 묘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조선 후기의 인물, 김지남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51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 김지남의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숫돌고개 동쪽, 우봉 김씨 묘역내에 자리해 있으며 김지남의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특히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 묘비는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에는 숙종대에 백두산에 올라 중국 청나라 사신들과 담판을 지어 그 영토를 명확히 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요. 묘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진년(1712)에 강의황제가 목극등을 보내 북변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양가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걱정이 많았다. 접반사 박권 공이 임금께 아뢰어 공을 대행하게 하였는데 불초도 수행하였다. 목극등이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압록강 동쪽과 두만강 서쪽 6,7백리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서로 국경을 넘기 때문에 심사해서 정하라는 조칙을 내리셨다' 라고 하였다. 공이 대답하여 말하길 '두 강은 참으로 한계가 되고 그 남상의 근원지로부터는 이미 강역의 아래가 되어 이것 역시 물길이 된 것이니 그 흐름이 비록 크지만 논하기엔 부족하다.' 라고 하였다. 분별함이 매우 확실하므로 목극등이 따랐다. 드디어 백두산 정상의 담수가 나오는 곳에 돌을 세워 경계를 정하였으니 그 배척함이 대개 멀었다.> 왕조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에는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볼 수 있으나 무덤의 비석 중 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은 매우 드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지남은 조선조 후기의 역관으로 본관은 우봉(牛蜂),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광천(廣川)입니다. 1671년(현종12)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화약을 만드는 방법인 자초법(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비롯하여 신전자초방, 통문관지 등을 저술했습니다.  김지남은 역관으로, 외교가로 조선조 후기에 뛰어난 공적을 남긴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조선조 후기 묘소의 교과서와 같은 무덤, 김주신 선생묘

조선조 후기 묘소의 교과서와 같은 무덤, 김주신 선생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18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6-1 김주신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의 장인이며 딸은 숙종대왕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이며 본관은 경주이며 경은부원군에 봉해 졌으며 시호는 효간공 (孝簡公) 입니다.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장원서별검, 1699년 귀후서별제에 이어 사헌부감찰 · 호조좌랑을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김주신은 묘소 아래의 영사정에 머물며 아버지인 김일진을 모신 인물로 유명합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김주신 선생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영사정 뒤편 200m 지점에 자리한 조선조 후기의 묘소로 일반 무덤과는 달리 원형 봉분 뒤편에 기와가 얻어진 곡장 (曲墻)이 남아 있으며 곡장의 담장 부분과 기와에는 꽃 무늬 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김주신의 묘소는 조선조 후기 왕의 종친, 고위관리의 묘소의 교과서와 같이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우선 묘소 우측에 비갈명이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탄흔 자국이 남아 있고 묘소 앞쪽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문인석이 서 있으며 2기의 문인석 사이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장명등 뒤로는 상석과 향로석, 혼유석이 위치해 있고 원형 봉분의 아래 부분에는 흙과 잔디가 무너 내리지 않도록 호석 (護石, 둘레석)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한 화강석 재질의 둘레석 곳곳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사정 서남쪽으로는 김주신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양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교육 기관, 고양향교 전경

고양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교육 기관, 고양향교 전경

고양향교는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향교골 마을에 자리해 대자산 기슭에 안겨 북한산을 바라보며 동향을 하고 있습니다. 향교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으며 그 뒤로는 향교의 출입문인 외삼문이 있습니다.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강당과 교실의 역할을 하던 명륜당이 있지요, 명륜당 마루에는 이곳 고양향교의 역대 전교 (典敎)을 엮임하신 분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명륜당 좌우로는 작은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본래는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옷이나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의 기능도 함께 하고 있지요. 향교는 교육의 기능, 제례의 기능 등이 있는데 이를 구분하는 문이 향교안쪽의 내삼문입니다. 내삼문 정면에는 공자를 비롯한 5분의 현인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 건물이 있습니다. 대성전에서는 석가탄신을 맞아 석전대제라는 큰 제례를 매년 봉행하고 있으며 대성전 좌우로는 우리나라의 학자, 현인, 그리고 일부 중국 유학자를 모신 동무, 서무가 있습니다. 서무의 뒤로는 오래된 제기를 보관하고 있는 전사청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해 있습니다. 고양향교는 고양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교육 기관으로 1398년 고양문묘라 하여 처음 건립된 후 1428년에 옮겨 진 후 지금의 자리는 1625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6,25한국 전쟁 당시에 일부 소실된 것을 1980년대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도, 전통인성교육, 향교문화사업, 등을 우리의 전통예절에 맞추어 많은 사업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고양향교 외삼문

고양향교 외삼문

고양향교의 정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동쪽의 문은 들어가는 문, 가운데의 대문은 신()이 출입하고 서쪽의 문은 밖으로 나오는 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삼문의 안쪽에는 고양향교의 역사를 기록한 고양향교 중창 , 보수 기록문이 걸려 있습니다.
처음 페이지 이전페이지 1 2 다음페이지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