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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기원전 3000년)

한반도 농경문화의 시작을 알려주는 작은 볍씨 한톨

우리나라 역사를 말할 때 ‘반만 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쌀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됐을까요?

고양시에서 발견된 ‘가와지볍씨’는 우리의 농경문화가 5000년 이상 됐다는 소중한 증거입니다.

삼국시대 (3세기 ~ 5세기)

수도를 방어해주었던 증거자료 멱절산 유적

파주와 행주산성 중간쯤 되는 곳의 고양 멱절산은 한강에 인접해 있어 역사적으로 교통과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한강에 제방을 쌓으면서 현재는 육지처럼 변했으나,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배가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한강과 인접해 있었지요.

멱절산에서는 백제 한성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었답니다. 토성과 주거지의 유구를비롯해 토기 파편 등이 다수 발굴되어 삼국시대 한강 지역 상황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자료가 되고 있지요. 1차 발굴 당시에 출토된 유물은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 중으로,현재는 추가 발굴을 계획 중이랍니다.

신라 말기 ~ 고려 초기 (10세기 후반 ~ 11세기 전반)

초기 청자를 굽던 고양시 원흥동 청자요지

청자는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그릇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자는 비색청자라고도 불리며, 그 명성이 도자기의 발명지인 중국까지 자자했습니다.

이러한 청자를 굽던 가마터가 고양시 원흥동의 건지산 동쪽 산기슭에 있습니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청자를 굽던 이곳은 우리나라 초기의 청자가 어떤 모습과 빛깔을 갖추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조선 전기 (1470년)

소도시에서 왕이 인정하는 도시로 거듭나다

왕의 무덤인 왕릉은 대대적으로 풍수지리상 가장 좋은 곳에 자리합니다.

역사적으로 고양시는 변방의 소도시에 불과했지만,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지역임이 알려지면서 서오릉과 서삼릉과 같은 대규모의 왕릉이 만들어졌습니다. 덕분에 마을의 위상과 규모도 달라지게 됐지요.

왕릉이 자리잡게 된 고양은 현에서 군으로 바뀌었어요. 현은 현재의 동, 군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1593년)

행주대첩의 정신은 아직도 고양시를 맴돈다

진주성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이 중 행주대첩은 단순히 왜군과 관군 간의 싸움이 아니었어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남녀노소가 모두 한마음으로 적군에 맞서 싸운, 선조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첩이었지요. 실제로 기록에 따르면 행주대첩 당시 아낙네들은 자신의 치마에 돌을 옮겨 병사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왜군에게 뜨거운 기름을 퍼부어 힘을 보탰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칫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무기로 적들을 무찌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행주대첩은 우리 군인들이 화차와 비격진천뢰라는 신무기를 사용한 전투이기도 했답니다.

조선 후기 (1711년)

한반도의 가장 아름다운 산성, 북한산에 지어지다

우리나라 수도권에는 수원화성, 남한산성 북한산성이라는 3대 성이 있습니다.

그 중 북한산성은 숙종이 천혜의 비경이라 불리는 북한산에 산성을 쌓아 백성이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한,

애민정신이 깃든 산성입니다. 관군만이 아니라 승려, 마을 사람이 모두 도와 6개월 만에 11.6km라는,

한반도의 가장 아름다운 산성이 완성되었습니다.

근대 (1906년)

경의선에서 일어난 근대화의 물결

교통이 발달하면 도시가 발달하게 돼 있습니다.

고양시 역시 1906년 경의선이 들어서면서 일산이 고양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경의선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설한 것이지만,

광복 이후로 고양시 근대화와 성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됐어요.

교통이 발달하면서 농촌이었던 지역에 상권이 형성된 것이지요.

이러한 고양시의 성장 과정과 역사는 고양600년 기념전시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 · 현대 (1914년 ~ 1961년)

고양 군청의 이동과 고양시 면적의 변화

지금은 서울에 포함되어 있지만, 동대문과 서대문, 잠실, 여의도 등도 예전에는 고양의 일부였습니다.

1914년 고양군청이 서대문으로 이동하면서 약 50여년 간 고양 지역은 지금 고양시 면적의 약 2배가

되었으며, 고양이라는 이름이 정해진 이래 최대 규모의 면적을 갖게 됩니다. 이후 1961년 고양군청이

원당에 터를 잡으면서 고양군이 되었고, 면적도 지금과 같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현대 (1992년)

고양은 꽃보다 아름다워

고양은 선진국의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고양시민들 역시 점차 삶의 질을 추구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가고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그런 삶을 살기에 적합한 땅을 발견하고 ‘신도시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신도시가 바로 일산입니다.

결국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일산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졌고,

1992년 고양군은 고양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군 전체가 시로 승격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현재 (2013년 ~ 2014년)

600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양시, 인구 백만 도시로 거듭나다

‘고양’의 역사가 과연 몇 년이나 됐는지 아세요? 지난 2013년, 고양은 그 이름이 정해진 지 600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양시는 놀랍게도 무려 600년이 넘은, 그야말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랍니다. 수많은 나라와 도시가 생겨나고 없어지는 와중에도, 고양시는 6세기가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거지요. 그러나 고양시를 단순히 오래된 도시 정도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2014년, 고양시는 살기 좋은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인구 100만 도시가 되었습니다. 경기도에서 3번째, 대한민국에서 10번째이지요. 이처럼 고양시는 6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와 백만 인구가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함께하는 놀라운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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