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어부가 살고있는 한강

우리나라에는 여러 강(江)이 있지만, 그중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곳은 역시 한강(漢江)입니다. 그런 한강은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강으로, 예로부터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정치적·상업적인 면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강이 단순히 이런 정치적·경제적 또는 군사적인 면에서만 의미를 갖는 곳은 아닙니다. 주변에 널리 형성된 옥토는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의 기반이 되기도 했지요. 또한 한강 유역에는 풍납토성, 아차산성, 행주산성, 멱절산 유적, 북한산과 북한산성처럼 다양한 문화와 유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어부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한강은 때로는 편안한 쉼터로, 때로는 멋진 야경으로 시민들의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강하구의 습지 중 고양시 구간으로 여의도의 2.5배 크기인 장항습지(獐項濕地)는 4대강 중 유일하게 강 하구가 둑으로 막혀 있지 않아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강하구에서 유일하게 버드나무 군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갈대 군락과 갯벌도 유명한 곳입니다.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

인 ‘노루목’을 뜻하는 ‘장항(獐項)’이라는 이름답게 국내 최대 고라니 서식지이자 재두루미와 큰기러기, 청둥오리 같은 겨울 철새의 월동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군부대의 허가를 받으면 장항습지 탐방이 가능합니다. 한강하구 지역 중 가장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이를테면 ‘야생동식물의 천국’으로, 현재는 고양시에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예약 후 방문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처럼 한강은 예전처럼 군사적이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고 자연생태계를 유지하고 보호한다는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역사와 의의를 조금 더 살펴보면 지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한강 인근 지역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든 육로(陸路)보다는 수로(水路)가 먼저 발달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한반도 역시 마찬가였습니다 그래서 한강은 역사적으로 한반도 물류의 중심부이기도 했고, 지정학적으로도 한반도의 중심이었지요.

이처럼 물류의 중심부 역할을 한 한강에는 자연히 수많은 나루터가 발달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행주산성 북서쪽에 위치한 ‘행주나루’입니다. 행주나루는 행주 마을의 나루터를 뜻합니다. 행주는 고려시대 초에 ‘살구나무[杏]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행주(杏洲)라 쓰였으나, 후에 ‘임금이 다녀간 역사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행주(幸州)로 바뀌었습니다. 예로부터 행주는 교통이 편해 유동인구가 많고 상업이 발달했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자가 풍부해 살기 좋은 곳으로 꼽혔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작품인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에 잘 묘사되어 있지요. ‘행호’는 행주산성 아래 흐르는 한강을 이르는 말인데, 1741년 행주산성을 방문한 겸재 정선이 행주나루 부근의 풍경에 반해 이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 한강의 역사적 의의가 달라졌다는 점은 앞에서도 설명했는데, 행주나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이 무역과 교통의 요지였는데, 이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행주나루를 차지하려 싸웠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도읍이었던 한양으로 물자를 운반할 때 반드시 거치는 중간보급기지 역할을 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됐습니다.이처럼 행주나루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물류에 있어 중요한 곳이었기에 작은 마을임에도 꾸준히 발달해왔습니다. ‘포’보다 규모가 작은 ‘나루’임에도 중앙관청까지 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전국에 철도망이 생기고 1970년대 급속한 도시화와 행주대교 개통 등이 이어지면서 핵심이었던 운송 역할이 대폭 줄어든 행주나루는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겸재 정선의 귀래정

겸재 정선의 귀래정

행호팔경도

행호팔경도

행주산성역사공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300여 년 전 행주마을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공원입니다. 버드나무 자생지를 그대로 살리고 다양한 자생식물과 행주를 상징하는 살구나무 등을 심어생태공원으로 조성했습니다. 특히 8경에서 보는 경치가 좋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행주에 22곳의 별장이?

한강변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유람지이자 문화공간으로, 많은 누정(누각, 정자)과 별서(별장)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동호(현재 성동구 동호대교 북단)와 용호(현재 용산강 일대), 서호(마포, 서강, 양화도 부근)를 중심으로 많은 누정과 별서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 대부분은 폐허가 되거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새로 생겨난 22개의 누정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강과 행주. 한때 번성하기도 했고 쇠락을 걷기도 했으나 꿋꿋이 이겨낸 한강과 행주가 앞으로도 아름답고 훌륭한 문화를 영원히 이어가길 기원합니다.

행주나루에는 왜 장어집이 많을까?

본래 조선시대에 행주의 특산품 중에는 ‘웅어’가 있었습니다. 웅어는 머리에 임금 왕(王)자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다 행주의 웅어는 특히 그 품질이 좋아 임금의 진상품이었습니다. 행주나루에는 진상품이었던 웅어를 관리 및 선별하는 부속 관청인 ‘위어소’를 설치했을 정도였죠. 심지어 웅어를 진상하는 어부는 조세와 부역을면제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부터 웅어는 과거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어획량이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이때 웅어를 팔던 음식점들이 대부분 장어 음식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행주 지역에 장어를 파는 집이 많아진 것이지요.

식도락을 즐기고 싶다면?

행주 지역에는 행주외동과 행주내동, 2개의 동이 있습니다. 그중 행주외동은 장어마을, 행주내동은 국수마을로 유명합니다. 또한 행주나루 주변에는 먹거리촌과 어물전, 미곡점, 욕곳간 등 시장이 많이 형성되어 있어 음식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게다가 내동과 외동을 합쳐 110여 개의 음식점과 30여 개의 카페가 있으니 어떤 입맛을 가진 사람이든 만족스럽게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