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 , 고양 땅은 농사짓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원당, 벽제, 신도 등 창릉천과 공릉천이 흐르는 지역은
가뭄을 비교적 쉽게 넘기며 농사를 지었으나 한강에 막혀 있는
지도, 일산, 송포 지역은 가뭄과 함께 홍수 등으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주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된 독립운동가 양곡 이가순 선생이
능곡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아들 이원재 선생과 함께 관개 수리 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한강의 물을 끌어들이고 행주에서 일산, 송포에 이르기까지 물길을 만들어
누구나 농사를 지을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갈대밭을 옥토로 만들어 이후 일산쌀, 송포쌀은 우리지역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고양지역의 위대한 관개 사업가 양곡 이가순 선생은 1867년에 태어나
1943년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입니다.
우리시 능곡동 관할의 토당동 삼성당 마을에 거주하며 관개사업을 벌인 겁니다.
이러한 선생과 아드님인 원재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0년 4월 고양지역의 유지들이 선생의 송덕비를 건립해 현존 하고 있지요..
관개 사업이 큰 난 후에는 자신의 사유지 등을 국가에 헌납하여
지금의 수리조합 (농어촌기반공사)의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조합장으로 이원재 선생이 추대 되었습니다.
최근 고양시에서 이가순 선생 숭모회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화유산 심의를 거쳐 선생의 송덕비를 고양시 향토 문화유산로 지정하였습니다.
선생의 후손으로는 세계적인 음악가 남매인 정명훈, 정경화, 정명화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가순 선생의 외손주들입니다.
고양시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이 현재 몇 곳 있죠..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문중이 바로 행주기씨 문중입니다.
행주기씨와 관련된 유적은 고양시 곳곳에 있는데요.
행주산성내 기씨 탄생지 비석(행주기씨 유허비)을 비롯하여
성사동에는 사당 및 덕양서원 등이 자리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기씨들은 본관을 행주로 하고 있습니다.
행주기씨들은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크게 번성 했습니다.
고려말의 기황후가 배출되고 조선시대에도 정승에 오른 관리, 학자, 충신이 가문을 크게 빛 냈습니다.
고양 팔현의 한분이신 복재 기준 선생, 청백리로 유명한 기건 , 기응세, 기자오, 기철, 등이
행주기씨에서는 이름난 분들입니다.
특히 호남지역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고봉 기대승 선생도
이곳 고양시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낙남 (落南)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고양시 덕양구 성사1동 사근절이 마을에는 행주기씨의 사당과
덕양서원, 재실,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사당 뒤편으로는 기건 선생과 기준, 등 행주기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무덤과 비석 등이 자리해 있습니다.
이중 몇기는 고양시 향토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당 앞으로 서삼릉 누리길이 지나고 인근에 3호선 원당역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입니다.
우리 고양시에서 가장 큰 대문(大門)은 어디에 있을까요.
높이가 지붕까지 10m에 이르고 차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조선조 숙종 당시에 만들어진 문이 고양시에 있지요. 지붕과 성곽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성문은 물론 문루(門樓), 기와지붕, 용마루에 이르기 까지 그 규모가 대단히 크죠..
이 문은 조선조 숙종당시에 만들어진 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 입니다.
북한산성의 여러 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하며
많은 사람들이 걸어서 들어가는 문이 바로 대서문입니다.
현재 국가지정 사적지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청, 고양시 등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대서문은 북한산성을 대표하는 문입니다.
북한산성의 4개 대문은 물론 16개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치성 (雉城)을 갗추고 있는 큰 문입니다.
성문과 문루 사이에는 네모난 석재에 구멍이 뚫려 있는 여장 (女墻)이 정면에 있습니다.
여장 아래로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두 2개가 좌우에 만들어져 있지요.
이 용두는 특이하게 이곳 대서문에서만 볼 수 있는 조각품 인데요,,
앞쪽에는 용이 크게 입을 벌려 성을 지키며,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곽 안쪽에는 입을 다문 귀여운 용두 2개가 성곽 중간 위치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서문 곳곳에는 6,25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지요..
총알은 물론 포격을 맞아 벽이 깨지고 쪼개진 모습이 이 성문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서문의 현판 (懸板)은 대한민국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대서문이란 글씨는 또렷하게 남아 있으나
좌측의 낙관 및 글쓴이의 이름은 하얀색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4,19 이후 하야한 후 후대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운 것이라 전해집니다.
대서문의 문루에 앉으면 의상봉과 원효봉 사이의 계곡에 부는 바람이 참으로 시원합니다.
성곽 아래로는 도시화된 고양시, 서울시 일원이 관망되고 성곽 뒤편으로는
원효봉과 백운대 등 북한산의 주봉들이 위엄있게 솟아 있습니다.
대서문과 백운대 사이에는 봉우리가 없어 날이 맑으면
정상의 태극기와 등산객을 조망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북한산성 대서문이 가장 예쁘게 보일 때는 봄날 벚꽃이 만발하고
해가 지며 노을이 서로 어우러지는 시간 이다.
조선의 국왕 숙종대왕도 이 문을 통해 북한산성 안쪽의 행궁을 왕래 했습니다.
지금은 국왕대신 일상에서 지친 많은 시민들이 북한산을 오르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파리는 개선문, 서울은 광화문, 고양시는 북한산성 대서문이 대표적인 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이 알 정도로 유명한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특히 고양시 최대의 고양국제 꽃 박람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해마다 수 백만명이 찾고 있는 고양지역 최대의 명소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은 호수와 공원, 나무, 꽃 전시관, 꽃, 정자, 길, 광장, 600년 전시관 등이 있으나
약 300년전 조선 숙종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네요.
조선조 영조 31년 (1755년) 고양군 중면 (中面, 현재의 일산)기록을 보면 이 일대에 대한 내용이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말로 해석해서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현재의 호수공원 일대에는 압도 (鴨島)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이 압도에는 물오리 등 새가 많아 오리 압자를 써서 오리섬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압도의 면적과 둘레는 1만 2백 73척으로 상세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곳에는 서울 난지도와 같이 갈대가 매우 무성하여 국가에서 이곳을 직접 관리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이 일대를 관리하던 관청은 선공감 (繕工監)이었으며 공식적인 명칭은 초장 (草場) 이였습니다.
이곳 선공감 초장에서는 초란 (草蘭)과 정란(正蘭)을 키우고 관리하여 국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중 초란은 다듬지 않은 갈대, 물억새를 말하는 것이며 정란은 잘 다듬은 갈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갈대의 풀들은 전부 국가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조 영조 당시에는 한강의 물이 정발산 아래까지 밀려오곤 했습니다.
주변이 온통 갈대밭, 뻘밭 이여서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황무지 였지요..
지금의 장항습지와 비슷한 자연 환경이었겠죠..
이 갈대를 가지고 지붕에 이엉으로 쓰기도 하고 우장, 도롱이 (지금의 우비),
또는 땔감, 건축부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곳에서 거두어들인 특산물 갈대는 배를 이용해서 서울 마포 나루로 옮겨져 왕실과 조정에서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호수공원은 한강 하류에 있던 매우 큰섬과 그 주변이 지금과 같이 개발되어 만들어진 곳입니다.
1930년대 이후 꾸준한 관개사업으로 1970- 80년대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벌판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일산쌀, 송포쌀로 불리며 전국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 초반부터 마을, 논과 밭이 있던 곳을 토지공사가
일산신도시 개발 사업을 시작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 고양 일산 호수공원은 아주 넓은 갈대밭 섬 이었습니다.
조선조 영조, 정조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
그는 1741년 봄 우리 고양지역과 한강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행호관어도 (杏湖觀漁圖), 겸재 정선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1741년 겸재 정선은 한강넘어 양천의 현감이 되어 개화산 능선에 섰습니다.
그리고 한강과 함께 당시 명소로 널리 알려진 행주를 바라보며 한 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는 웅어를 잡는 작은 배, 버드나무, 고양의 산천,
그리고 행주나루의 많은 집 등이 기와, 초가로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그림을 보면 지금의 정발산과 심학산, 고봉산,
견달산, 덕양산, 감악산에 이르기 까지 그 모습도 참으로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이 한 장의 그림을 가지고 고양시도 철책을 제거한 자리에
고양 행주산성 역사공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한쪽에는 웅어 배도 복원되어 있는데 행주산성 최고의 특산물은 역시 웅어지요.
왕에게 진상하던 웅어는 고양을 대표하는 진상품으로
그중 행주산성 아래의 웅어를 최고의 품질로 삼고 위어(웅어)소라는 관청을 임시로 세울 정도 였습니다.
얼마 전 겸재 선생이 올랐던 개화산 중턱에 올라 고양땅을 보니
온통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고양시 덕양구 흥도동 관내 도내동에는 은못이 라는 자연촌락 마을이 있어요.
일반 사람들은 흔히 은무시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문으로는 은지 (隱池) 마을이 됩니다.
이곳 은못이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한산이씨 문중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 왔으며
지금도 마을 뒤편에는 수십기의 묘소가 남아 있습니다.
이중 3기의 무덤은 고양시 향토 문화유산로 지정되어 후손들이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후손들의 묘소에서 성사동 강고개 방향에는 이주 오래된 연못이 하나 남아 있지요..
조선조 후기의 고양군 지도에도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연못입니다.
이 무덤을 만든 사람은 조선조 단종대왕의 충신인 망월암. 이축 선생입니다.
이축 선생의 본관은 한산입니다.
고려말 대표적인 유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의 손자가 되는 인물로
벼슬은 황해도 관찰사에 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세조가 단종을 퇴위 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 고양땅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작은 집을 만들고 왕이 계신 영월을 바라 본다는 뜻에서 망월당 (望越堂)을 짓고
자신의 호도 망월암이라 붙입니다.
그리고 1456년 조용히 숨어 지내며 연못을 팠다고 하여 은지라 하였습니다.
지금도 약 8,250㎡ 규모의 은지 연못이 남아 있습니다.
수초를 비롯하여 연꽃 등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축 선생은 결국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은지 연못 자리 부근에 무덤을 만들게 되었지요..
후세 사람들은 그의 충절과 은지 연못의 이야기를 후손과 역사학자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이름도 은둔해 잇으면서 판 연못이 있는 곳 은못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이축 선생과 은못이 연못은 고양시 향토 문화유산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시 덕양구 주교동 능골 (원릉역 부근) 마을에는 수 십 만평의 산과 많은 무덤이 있는 밀양박씨 선산이 있지요.
이곳을 능골 이라 부르는 것도 현재 시청이 있는 배다리 마을에서 보았을 때 박씨들의 무덤들이 마치 왕릉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진 이 밀양박씨 무덤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양시 향토문화유산로 지정된 묘가 박충원 선생의 신도비와 묘입니다.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한 박충원의 무덤은 박충원 선생과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성산이씨가 나란히 묻힌 쌍분입니다.
박충원 (朴忠元, 1507-1581) 선생은 조선조 중기의 문인으로 어린시절부터 고양팔현의 한분인 복재 기준(奇遵) 선생에게 학문을 배운 인물입니다.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 교리, 영월군수 등을 엮임했고 그 후에는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죠.
현재 강원도 영월에 가면 단종대왕의 장릉이 있는데 능 입구에 박충원 선생의 충절비 (송덕비)가 세워져 있지요.
이곳에 충절비가 세워진 이유가 재미 있어요..
단종대왕이 영월에서 억울하게 죽은 후 그 시신은 거두지 못하게 하여 영월서강 (일명 주천강) 청령포 앞에 버려지게 되죠..
백성들은 바라보기 만 할 뿐 죽음이 두려워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죠..
그리고 몇 일 후 영월에서 호장(통장, 이장)을 지내던 엄흥도란 사람이 밤에 몰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노루가 알려 준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단종의 아픈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강원도 영월로 부임하는 사또 (영월군수)가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7명씩이나 죽게 됩니다.
사유를 알아보니 밤마다 죽은 사람의 혼령이 나타나 신임 군수 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후 모든 관리들이 영월군수 자리를 거절하게 되고 결국 영월군이 피폐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 고양출신의 박충원이 자원하여 영월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지요..
부임 한지 며칠 후 한 밤중에 박충원 사또가 자고 있는 방에 혼령이 나타났습니다.
놀란 박충원이 혼령과 대화해 보니 억울하게 죽은 단종대왕 이였습니다.
단종의 말은 엄흥도가 임시로 무덤을 써서 산속에 버려져 있는데 너무도 춥고 외로우니 시신을 찾아내서 정식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박충원이 일어나 보니 노루 한 마리가 마당에 있었고 그 노루를 따라 가 보니 암매장 되어 있던 어린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박충원은 관리들과 함께 시신을 찾아내어 간단히 장례를 지내고 왕에게 보고하여 능의 규모로 무덤을 꾸미니 지금의 장릉입니다.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박충원 선생의 공적비가 영월 장릉 입구에 서있는 것입니다.
<최영장군묘>
<성녕대군 묘>
<성녕대군 신도비>
고양시청이 있는 주교동에서 동북쪽에 있는 대자동 (大慈洞), 행정구역으로는 관산동, 고양동에 속해 있는 법정동 마을 이예요.
마을의 입구에는 일명, 필리핀 참전비와 태극기 공원이 있습니다.
통일로에서 대자동으로 들어오는 대양로를 따라 약 1,5km 정도 들어오면 우측에 최영장군 묘, 좌측에 성령대군 묘소가 있습니다.
성령대군의 묘소도 고양시 향토 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당으로는 대자사 (大慈祠)가 있고 사당 옆으로는 조선조 전기에 세워진 성령대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성령대군은 태종대왕의 4번째 대군으로 세종대왕의 친 동생인 사람입니다.
부모님에게 큰 사랑을 받은 막내 아들인데 안타깝게도 13살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됩니다.
당시 창녕성씨 부인이 있었으나 후사가 없어 세조대왕의 아우인 안평대군을 양자로 삼았으나 안평대군도 계유정란으로 죽게 됩니다.
막내 아들인 성령대군의 죽음을 본 태종과 왕비는 이곳 대자동에 무덤과 사당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달랬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남쪽으로 100m 지점에 원찰 (願刹)으로 짓게 하고 그 이름을 큰 사랑을 준 곳이라 하여 대자사 (大慈寺)라 했지요..
그리고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성령대군의 극락왕생과 부처님의 공덕을 기원 했습니다.
이후 대자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큰 절이 되었습니다. 이후 마을 이름도 아예 대자라 부르게 했습니다.
이곳 대자골, 대자동 마을에는 많은 종친들의 묘소가 있는데 30개가 넘는 유명한 인물들의 묘가 이곳 대자동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