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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과 함께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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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

이무

이무 – 세계 최초 세계지도를 그리다. 고려 말(출생미상 ~ 1409년(태종 9년) / 정치가 “세계지도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었다고?” 이무는 조선이 개국된 후로 1393년 제 1차 왕자의 난에 태종 이방원을 도와 나라의 정사공신 1등이 되고 단산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그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며 조선의 부흥을 위해 이끈 위인이기도 합니다. 특히 1406년 김사형. 이회 등과 함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를 그렸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지금의 세계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훌륭한 지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전

김전

김전 – 청렴결백의 신하 하지만 잘못된 선택(기묘사화)이 그의 인격에 흠집을 내다 1458년∼1523년. 조선 중기의 문신 “만약 기묘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후세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김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피폐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을 당시 백성들을 잘 보살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청렴결백하고 문장에도 능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후세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는 인물입니다. 만약 기묘사화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김전은 후대에 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기억되었을 겁니다. 기묘사화는 무엇인가요? 1519년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지금의 여당 야당과 같이 옛 조선시대에도 추구하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파가 갈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 파에 밀리면 숙청을 당하는 시기였던 지라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흥으로 큰 힘을 세우던 조광조의 신진세력들을 모함하여 죽인 사건으로 조선시대 정치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황윤길

황윤길

황윤길 – 외교관의 정석을 보여준 충신 1536년~ 조선 중기의 문신 “만약 황윤길의 보고에 귀 기울였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텐데.” 황윤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황윤길은 머지않아 일본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 당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낮아 결국 그의 말은 묵살되었고, 결국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당시 황윤길의 보고에 선조 임금이 귀 기울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국제화 시대 외교관의 역할이 점점 높아지는 요즘 황윤길은 외교관의 정석으로 불리는 위인입니다.
처영

처영

처영 – 호국불교의 삶을 실천한 조선시대 승병장 출생 미상 – 조선 선조 때 승려, 승병장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때 어찌 승려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처영은 조선 중기의 승려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운 승병장입니다. 종교를 떠나 구국의 신념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처영입니다. 현재 종교인이 아닌 기업인 같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대다수의 종교인들을 보며 처영의 삶에 깊은 울림을 받습니다.
선거이

선거이

선거이 – 이순신 장군에 가려진 숨은 조력자 1550(명종 5)∼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무신.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습니다. 별은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겁니다.” 한국역사 속에서 가장 충직하고 강인했던 이순신 장군. 행주산성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10배의 왜적을 무찔렸던 권율 장군. 두 명장 옆에는 항시 그들을 빛나게 해주던 조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거이입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 속 선거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선거이가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도 없었을 것이고,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도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빛나기 보다는 남이 빛나게 조력자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던 선거이. 오로지 자신들의 치적만을 내세우며 남을 깎아내리는 현재의 정치사에 회초리 같은 교훈을 주는 위인입니다.
권율

권율

권율 – 조선시대 이순신 장관과 함께 조선을 이끈 장군이자 충신 1537 ~ 1599 조선 중기 명장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3만 여명의 왜군이 성 밖으로 주둔하며 포위했을 때 권율 장군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주산성에 거주하는 백성들 역시 권율 장군의 리더십에 동참하며 왜군과의 싸움을 적극 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이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10배 이상의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권율 장군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국가 재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무책임하고 리더십의 부재를 말하는 현재. 권율 장군의 국가를 위한 리더십이 그립습니다.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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