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고양향토문화유산

71

3/6 페이지

이동
검색하기

북한산3.1운동 암각문

북한산3.1운동 암각문

3.1운동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白雲峰)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기록문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정재용(鄭在鎔)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後世)에 전하기 위하여 가로 150cm, 세로 270cm 정도의 평평한 바위 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10일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으며 3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했다.”는 내용이 정자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을 새긴 시기 및 그 목적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을 새긴 정재용은 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한 독립 운동가이며, 그는 1919219일 해주에서 상경하여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입니다. 그 후 해주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0년 일본에 의해 검거되어 2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769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듬해인 그 공을 인정받아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각석
류겸선생 묘

류겸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1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 류겸 선생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에 위치하며 류구묘 바로 밑에 부인 충추 최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류겸 선생 묘소 앞에 있는 석물로는 通政大夫寶文閣直提學淸白吏柳兼墓淑夫人忠州崔氏祔左 (통정대부 보문각 직제학 청백리 유겸묘 숙부인 충주최씨 부좌)’라 쓰인 묘비와 상석, 향로석 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묘비를 갖추고 있는 묘역으로 귀부가 독특한 망주석, 문인석은 조선 중·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봉분 바로 앞의 묘비는 높이 103cm, 36cm, 두께 12cm의 규모이며 문인석은 섬세한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며 인체의 비례감각이 상당히 뛰어납니다. 류겸은 고려 공민왕 5(1357)에 태어나 조선 태종 11(1411)에 돌아간 문신으로 고려 우왕 6(1380)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10(1410)에 형조참의와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으며 세종조에 청백리로 녹선된 인물입니다. 원래 이 묘소는 화전에 있었으나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합니다.    
민묘
특이한 모양의 문인석을 지닌, 류구선생 묘

특이한 모양의 문인석을 지닌, 류구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0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 류구 선생의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 내에 위치하며 부인 덕수 이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학사 류구라고 쓰인 표석과 소박한 조각법의 합장한 석인은 다른 분묘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으로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류구 선생 묘의 석인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모습으로 조선시대 무덤이지만  조선 초기의 무덤이라 고려시대의 석물 조형 양식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비와 다른 석물 중의 일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중 돌장승과 같은 문인석 석물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특이한 모습니다. 류구는 고려 충숙왕 3(1335)에 태어난 조선 태조 7(1398)에 사망하였습니다. 조선 가국 원종공신으로서 진산군에 책봉되었으며 세종대에 청백리로 추록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의 진주류씨 묘소 가운데 가장 전대(前代)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호는 정평공입니다.  
민묘
류림선생 묘

류림선생 묘

류림 선생의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에 위치하며 배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의 묘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숙송 21(1695) 8월에 건립된 신도비가 남아 있습니다. 신도비에는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고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글씨는 아들 지발이 썼으며 전은 홍수주가 하였습니다. 류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21(1643)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여온이며 본관은 진주로 공조판서 진동의 손자입니다. 선조 36(1603)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전라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 평마절도사로 성을 굳게 수비하여 침입한 청군의 공격을 무사히 넘겼으며 강화에서 남하하는 적을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웠습니다. 청국과의 화의가 성립된 후 다시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였으며 청나라의 요청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였습니다. 그 전공으로 심양으로부터 초청장이 왔으나 이를 거절하여 오히려 백마성에 유배, 안치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 16(1638)에 풀려나와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되었으나 인조 19(1641) 청국이 명나라를 토벌할 때 또다시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영병장으로 출정했으나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간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입니다.  
민묘
류진동선생 묘

류진동선생 묘

류진동 선생의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 공원 내에 남향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대리석의 묘포에는 資憲大夫 工曹判書 兼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摠管 柳辰仝墓(자헌대부 공조판서 겸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총관 류진동묘)’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 측면 내용에 의하면 이 비는 명종 17(1562)에 세운 것으로 묘 아래 50m 지점에는 명종 18(1563)에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 신도비가 있는데 이는 옥개석으로 건조되어 있습니다. 류진동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3(1497)에 출생하여 명종 16(1561)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숙춘, 호는 죽당 본관은 진주로 한평의 아들입니다. 중종 17(1522) 사마시를 거쳐 1531년 신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중종 33(1538) 정언을 지냈으며 이어 지평, 교리, 장령을 두루 역임한 후 중종 38(1543) 부제학에 올랐습니다. 전라, 경기, 평안도의 외직을 맡고 명종 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4년 뒤 대사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때 경연에서 주역을 진강하게 되었는데 그가 적임자라 하여 경영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습니다. 이어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명종 14(1559) 도총관을 겸임하고 이어 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중풍으로 곧 돌아갔습니다. 문사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서 뛰어나 일설에는 남대문 현판 숭례문(崇禮門)’을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민묘
강지선생 묘

강지선생 묘

강지 선생의 묘는 오금동 하촌마을에서 상촌마을로 이어진 마을길 우측에 위치하며 봉분 옆으로 1959년 봄에 세운 오석의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金潤東贊幷書(김윤동찬병서)’로 되어 있습니다. 묘에 세워져 있는 비에는 靖國功臣 永善君 姜漬墓(정국공신 영선군 강지묘)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대에 세워진 석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사자 2마리가 받치고 있는 장명등 등은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강지는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 원년(1453)에 출생하여 중종 12(1517) 630일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덕윤 호는 모암이며 영성군에 봉해졌고 본관은 진주, 통계공 회중의 증손으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절충장군이며 죽은 후 국왕으로부터 예장의 은덕을 입었습니다.
민묘
단종의 묘역을 능으로 꾸민 인물, 박충원 묘

단종의 묘역을 능으로 꾸민 인물, 박충원 묘

오석의 묘표는 1958년에 건립되었고 광해군 9(1617) 2월에 건립된 구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180cm, 너비 56cm, 두께 27.2cm입니다. 그리고 오석의 새로 세운 신도비는 정조 19(1795)에 세운 것으로 비의 머리 부분과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297cm, 너비 117cm, 두께 52cm입니다. 박충원(1507~1581)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초이며 호는 낙촌, 본관은 밀양입니다. 고양 팔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영월군수, 춘추관편수관, 성천부사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습니다.
민묘
구한말의 충신, 일제에 항거한 고위관리, 한규설선생 묘

구한말의 충신, 일제에 항거한 고위관리, 한규설선생 묘

한규설 선생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로 자는 순우 본관은 청주로 어영대장 총융사 규직의 동생입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포도대장을 역임하였고 1905년 의정부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해 119일 일제의 전권대사 이등박문이 임권조 공사와 군대를 시위케 하고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할 때 그 부당성을 주장하여 끝까지 반대하였으며 조약 체결 후 파면되었습니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갔다가 후에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고 한일합방 때 일본정부에 의해 남작이 수여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1930년에 돌아갔습니다. 한규설 선생의 묘는 원흥동 웃말에 위치하여 정경부인 밀양 박씨와 합장되어있습니다. 묘 앞 우측에는 옥개를 갖춘 높이 190cm, 50cm, 두께 25cm의 오석 묘표와 망주석, 상석, 석양 등이 있으며 193410월 아들 양호가 세운 묘비의 높이는 146cm, 50cm, 두께 20cm의 규모입니다.  
민묘
초대 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선생 묘

초대 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선생 묘

김홍집 선생의 묘소에는 최근 새로 만들어진 묘갈,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이 있으며 묘는 대자동 대자골에 위치하여 배() 정경부인 남양 홍씨의 묘가 부좌되어 있습니다. 현재 봉분의 총 둘레는 15m인데 원래 이 묘는 1975611일 파주에서 이곳으로 천묘한 것으로 묘갈이 봉분 우측에 세워져있습니다. 옥개석이 있는 비의 비문은 후손 정록이 쓰고 세운 것이며 김홍집(1842~1896)은 조선후기의 정치가로 처음 이름은 굉집이며, 자는 경능, 호는 도원, 본관은 경주입니다. 김홍집은 고종5(1867) 문과에 급제하여 1880년 예조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중국인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소개하여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예조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사직했습니다. 고종 19(1882)에 구미열강이 통상요구와 임오군란의 뒤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가 닥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외교수완을 발휘한 뒤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하였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이 되어 한성조약을 체결한 뒤 사임하였습니다.
민묘
기응세선생 묘

기응세선생 묘

기응세 선생의 묘는 성사동 사근절 마을에 위치하며 선산 임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봉분 바로 앞의 대리석 묘비는 선조 19(1586)에 세운 것으로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8cm의 규모로 묘비 앞쪽에는 장명등의 옥개석만이 도궤된 채 남아있습니다. 묘비 앞에는 2기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씩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 문인석은 얼굴표정이 독특하고 비교적 세밀히 조각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명필 한석봉과 명나라 주지번의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기응세 선생(1539~1585)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서 자는 경우,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손자이며 한성판윤 기대항의 아들, 영의정 기자헌의 아버지로 본관은 행주입니다. 평소 효행이 있어 조선 선조 조에 정려를 내렸고 삼강록에 책록되었습니다.  
민묘
고려말•조선초기의 청백리, 기건선생 묘

고려말•조선초기의 청백리, 기건선생 묘

기건 선생의 묘는 원당전철역에서 한양골프장 방향인 성사동 사근절 마을에 서향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는 정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되어있으며 총 규모 21m 둘레의 원형묘입니다. 봉분의 우측으로는 1966년에 새로 세운 오억령이 찬한 묘비와 최근 후손 기성도가 찬하고 세운 한글비가 세워져있습니다. 묘소에서 약 300m 지점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고종 16(1879) 10월 건립한 것으로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통대석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신은 대리석입니다. 신도비 구비는 신비의 앞마당에 놓여 있습니다. 기건 선생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공조전서 면의 아들로 1390년에 태어나 1460년에 돌아갔습니다. 호는 청파 또는 현암이며 녹은 청백리로 본관은 행주입니다. 천성이 청렴, 강직해씅며 독서, 학문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 24(1442) 평민에서 발탁되어 음사로 지평이 된 후 병조, 형조, 이조의 참의를 거쳐 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며 문종 원년(1451) 개성부 유수를 거쳐 단종 원년(1453) 대사헌이 되었습니다. 그간 외관으로 연안, 제주,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 후 벼슬이 중추원사에 이르렀으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모든 관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세조가 다섯 차례나 그의 집을 찾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시호는 정무입니다.
민묘
신도비가 멋진 문화유산, 한계미선생 묘

신도비가 멋진 문화유산, 한계미선생 묘

한계미 선생 묘는 관산동 시묘골 마을의 청주한씨 묘역에 위치하며 왼쪽에 파평 윤씨가 합장되어있는 단묘입니다. 우측에는 1972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고 봉분 앞 중앙에는 당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백대리석 묘비가 세워져있습니다. 한계미선생의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종 2(1471) 12월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각은 최근 새로 지은 것입니다. 한계미(1421~147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공보, 본관은 청주로서 관찰사 혜의 아들입니다. 한계미 선생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언니와 결혼하였으며 세종 20(1438) 음보로 사용이 되고 그 후 나주 판관, 형조도관좌랑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문종2(1452)에 사은사로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좌익공신 3등으로 지사간원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 우승지를 거쳐 형조, 호조의 참판사로 부임하고 이시애의 반란 때 평안도의 정병을 이끌고 가서 평정에 힘써 적개공신 3등으로 우찬성에 올랐습니다. 이어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임하였고 성종 1(1470) 서원부원군에 진봉되고 이듬해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주충부사가 되었습니다.
민묘
처음 페이지 이전페이지 1 2 3 4 5 6 다음페이지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