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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향토문화유산

2022-10-01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유적명칭:월산대군묘및신도비
지정번호 :고양시향토문화재제1호
유형:민묘

 

 

월산대군의묘는신원동능골에자리잡고있으며뒤에부인순천박씨의봉분을두었습니다. 월산대군의큼직한봉분앞에는묘비와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신도비등의석조물이배치되어조선시대묘제연구에귀중한자료가되고있습니다.

상석뒤편의묘비는운문이조각된비두와장방형의대석을갖추었고, 규모는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입니다. 상석은 3매의장판석을놓았는데 270cm, 측면 155cm의규모입니다.

월산대군의묘는석마, 석양, 석호등이없을뿐이지흡사왕릉처럼듬직한모습을보여줍니다. 이는성종이친형인월산대군을극진히아꼈음을보여줌과동시에풍족했던당시의상황을보여주는것이라하겠습니다. 월산대군묘의앞으로는묘갈과상석, 장명등이굳건히서있고커다란망주석과석인이그양쪽을지키고있습니다. 모두묘소조성당시의유물그대로입니다. 묘소의뒤쪽으로는월산대군의부인인승평부부인박씨의묘소가있는데, 연산군의큰어머니이며, 어머니를일찍보낸연산군에게실질적인어머니역할을한여인입니다. 하지만연산군이그녀를너무따랐던나머지인수대비에게연산군과통정을했다는혐의를받고사사를당하는비운의여인입니다.

월산대군신도비는신원동능골마을에자리잡고있는월산대군과박씨부인묘소앞쪽에위치하고있습니다. 성종 20년(1489) 왕명에의해세워진이비는크게대좌, 비신, 이수로이루어져있습니다. 대좌에는비신을꽂을수있도록비좌가만들어져있고연꽃무늬가돌아가며새겨져있습니다. 비신의비문은풍우로인한마모로심하게훼손되어있어판독이어려운상태입니다. 또한비신의윗부분에는달과산을표현한전자가새겨져있는데매우흥미롭습니다. 비신의높이는 218cm, 폭 105cm, 두께 32cm의규모이고비문은임사홍이짓고썼으며, 전액도함께썼습니다. 비신과연결된이수에는매우화려하게용조각이만들어져있습니다. 앞면에는좌측의아랫부분용이위를올려다보고있고, 우측윗부분의용은아랫부분을내려다보고있습니다. 이두마리의용주변에는구름무늬가세밀하게조각되어있습니다.

월산대군이정은 1454년에태어나 35세의한창나이에사망한왕족입니다. 추존왕덕종의장남이며성종의친형으로자는자미이며호는풍월정입니다. 세종이증조부되시며, 세조가조부입니다.

하지만이정은왕이되지못했습니다. 장자이며나이도왕자를이어가기에적당하였던그는왜왕위를받지못하였을까요?

그는 7세때인 1460년월산군에봉해졌고,1468년동생인자을산군과함께현록대부에임명되었습니다. 예종은즉위한다음해에사명하였고왕위는예종의아들인제안대군, 덕종의아들인월산군과자을산군중한명으로압축되었습니다. 이에세조비인정희왕후는세조의명을받들어제안대군은너무어리고월산군은건강이좋지않으니됨됨이가빼어난자을산군에게왕위를이어가게하였고, 예종이사망한바로다음날즉위식은거행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자을산군의왕위계승이다른이유에의해서성공했다고말합니다. 월산대군의건강이나쁘다는근거가남아있지않고, 자을산군역시제안대군처럼어렸기때문입니다. 나이도어리고장자도아닌자을산군이왕위에오른것은그의장인이한명회였기때문입니다. 한명회는신숙주등과함께당시최고의권력자였고, 성종을즉위시킴으로서명실상부한최고의권력을누리게되었습니다.

왕이되지못한제안대군과월산대군은이제역적으로몰릴상황만이남아있었습니다. 왕이되지못한왕세자가억울한죽음을당하는일은역사속에서수없이등장했습니다. 하지만두남자는결코미련하지않았습니다. 제안대군은정말바보처럼행동해서역모에서벗어날수있었고, 월산대군은정치에전혀관심이없는풍류객처럼보여서일생을유유자적하게보낼수있었습니다. 풍월정이라는그의호에서그의인생이묻어나는것은이러한이유때문이아닐까요.

 

2022년촬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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