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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향토문화유산

2017-03-27

홍이상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13

소재지 :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56-1

묘는 성석동 고봉산 기슭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배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의 봉분과 쌍분을 이루었는데 봉분의 둘레는 각 15cm이고 높이는 240cm입니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습니다. 봉분 앞으로 이준이 지은 묘비가 있는데 크기는 높이 170cm, 65cm, 두께 25cm입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약 150cm 아래 지점에 서 있는데 인조 8(1630)에 건립하였습니다.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하며 아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새겼습니다. 대리석 비신의 규모는 높이 200cm, 115cm, 두께 29cm입니다.

홍이상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4(1549)에 출생하여 광해군 7(1615)에 돌아갔습니다. 처음 이름은 인상이며 자는 원례, 또는 군서입니다. 호는 모당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수의 아들입니다.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행촌 민순의 문인으로 선조 6년 사마시를 거쳐 6년 뒤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예조와 호조 좌랑, 파랑을 거쳐 정언 수찬, 지제교를 거쳐 병조정랑을 지냈습니다. 사가독서를 한 후에 교리, 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습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서 왕을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므로 병조참의에 전임되었습니다. 선조 27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곧 경상도 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는데 비변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왜장끼리의 이간책을 강구하여 성공시켰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 등이 올린 성혼 배척 상소를 극구 반박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이후 청주 목사가 되고 광해군 즉위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파간의 계속되는 옥사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송도에서 돌아갔습니다.

시호는 문경이며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습니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제향된 고양팔현의 한사람이며 그의 삶을 그린 평생도(1781년 작:단원 김홍도)는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