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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 고양의 중심 원당지역

5020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양가와지볍씨부터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고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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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문화원 5일장·시장 백송 유적 묘·왕릉 석교 공원 관측소 마을·초가 사당·서원·향교·영사정 성당 산성 시청 현판 청자요지 고인돌 벽제관지 석상 공릉천 참전비·비석 금표비·덕명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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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의 문화유산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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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중 효자정려각

장의중 효자정려각

장의중의 묘와 정려, 효자문은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입구 식당가의 뒤편 구릉에 위치해 있으며, 장의중 효자정려각은 고양시에서 유일하게 정려각과 효자정려문이 남아 있는 유교 유적입니다. 정려는 한옥 형태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일부가 훼손되어 콘크리트로 일부 개축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2칸으로 안에는 위패, 제기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려에는 효자학생 장의문지려(孝子學生 長宜中之閭)’란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 있고 정려문의 판은 붉은색으로 홍살은 모두 8개이며 효자문은 정려로부터 연결된 쇠줄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장의중은 조선시대 말의 효자로 어머니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헌혈하려고 하였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1905년 고종으로부터 정려와 효자문을 사사 받았습니다. 정려문 뒷면 30m 뒤편에 장의중의 무덤이 자리해 있습니다.
대표적인 도요지, 원흥동 청자요

대표적인 도요지, 원흥동 청자요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418-6 원흥동 청자요지는 9~10세기에 사용했던 청자요 가마유적으로 1937년 최초로 당시 총독부에 근무하던 일본인 학자인 노모리 켄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2년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조사할 때 포함된 중요 유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유적은 용인 서리·시흥 방산동·여주 중암리 등과 함께 한반도 초기 청자요지 중 하나로 당시 제작한 청자편이 많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특히 청자편의 형태가 중국 오대 월 주요 청자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원흥동 도요지는 5개의 요지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지금도 갑발과 축요재로 사용된 장방형 벽돌과 청자편이 노출되고있습니다. 원흥동 청자요지의 또 다른 특징은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청자와당(청자기와)입니다. 조사된 청자와당은 짙은 황갈색 유약을 입혔으며 12세기 이전의 청자기와는 원흥동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서울방향 서오릉 길로 가다가 원흥동 마을 안길로 들어가 1km 지점 삼거리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다다를 수 있습니다. 원흥동 청자요는 신라말, 고려초기의 유적으로 유명합니다.  
원당시장

원당시장

원당시장
고려의 마지막 왕, 고려 공양왕릉

고려의 마지막 왕, 고려 공양왕릉

지정번호 : 사적 제191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공민왕 17년인 1368, 고려에 큰 영향을 미치던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기어 북쪽으로 밀려납니다. 공민왕은 1356년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등 원나라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더불어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귀속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개혁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승려 신돈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새로운 지도 이념인 성리학이 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과 동시에 차후 등장할 신진사대부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사이에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므로 진짜 왕씨가 아니라고 하여 1388년 폐위시키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천을 받아 창왕을 옹립하였습니다. 얼마후, 이성계는 창왕도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위화도회군으로 시대의 라이벌인 최영을 처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에게 넘어간 그 즈음, 신종의 7세손인 ()’가 공양왕으로 옹립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당시로서는 이미 노년을 바라보던 나이였습니다.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둔 이성계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을 거리낌 없이 추진하였고, 순차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여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함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왕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공양왕의 이름은 요(), 20대 신종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입니다. 비는 창성군 진의 딸 순비 노씨입니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웠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유약한 임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위 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인해 우왕을 강릉에서, 창황을 강화에서 각각 죽였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1394년 다시 삼척부로 옮겨졌다가 예정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재위 기간 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계 등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개혁이었습니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가 살해된 후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것이 고려의 마지막 왕조였습니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과 강원도 삼척, 고성에 있습니다. 왜 공양왕릉은 3기가 각각 조성된 것일까요? 공양왕은 원주, 간성 등으로 쫓겨 다니다가 1394년에 삼척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삼척에 공양왕의 첫 번째 능이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된 1416년 군으로 강등되었던 공양왕을 왕으로 다시 추봉하였고 이즈음에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인접한 고양시로 능을 이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공양왕이 최종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은 고양시인 것으로 판단하여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고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양왕의 조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 말의 정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공양왕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려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문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태종 조와 세종조의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고양시 원당의 고려 공양왕릉이 진릉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태종 조에는 이곳에 있는 능을 보수하고 정비한 뒤 능을 지키는 수호소를 만들게 하였으며, 세종 조에는 공양왕의 어진을 안성 청룡사로부터 고양현 능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는 명령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선조 조에 전국에 있는 왕릉을 파악할 때 공양왕릉은 이곳 고양의 능을 진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헌자료만으로 공양왕릉의 위치를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공양왕의 선왕인 우왕과 창왕은 묘조차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공양왕릉의 진위 여부는 발굴조사가 없었던 현재로서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고양시청으로부터 북동족인 벽제로 이어진 원당로 2km 지점의 마을이 왕릉골 마을입니다. 이 왕릉골 마을 입구에서 다시 마을 안쪽으로 1.2km 가량 들어오면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릉이 위치해 있습니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공양왕의 능이, 오른쪽엔 순비노씨의 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능 앞의 석물로는 비석 일좌가 왕의 봉분 앞과 왕비의 봉분 앞에 세워져 있는데, 각각 고려공양왕릉’, ‘공양왕비순비노씨라고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글자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앞으로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양측에는 문·무인석으로 보이는 두 쌍의 석물이 서로 마주보고 세워져있습니다. 정면으로는 개의 형상을 한 석수가 1기가 있는데 이 석물이 고양시에서 전해져오는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수와 비슷한 형태가 대자동에 있는 성령대군 묘에서도 보입니다. 성령대군 묘에 있는 석수는 묘소의 양 쪽에 한 마리씩 위치하는데, 현재의 고려공양왕릉의 석수는 한 마리 뿐 이지만 석수 옆에 보면 석수의 파편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묘소 앞에 석수 한 마리가 덩그러니 있는 묘소는 거의 없으며 어쩌면 석수의 원래 위치는 공양왕릉의 양 옆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석인은 모두 높이가 120cm 내외로 두 종류가 있는데 문관석으로 보이는 능 앞쪽의 것이 더 작습니다. 석물의 양식과 수법은 고려의 여러 왕릉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왜소하고 소박한 것들입니다. 양 릉 중간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화강암 비가 세워져 있는데 혹자는 조선말 고종 때의 비라고 하나 마멸된 상태로 보아 훨씬 이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묘역의 입구에는 고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과 관련된 연못을 고양시에서 조성해 놓았습니다.  
고인돌-지렁산

고인돌-지렁산

고인돌-지렁산
고인돌-국사봉

고인돌-국사봉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화정동 국사봉 지석묘군은 덕양구 성사동, 화정동에 있습니다. 어울림누리 동쪽에 있는 성라공원 꼭대기에 군부대가 있는데요. 군부대 가는 길로 쭉 올라가다가 약 200m 정도 남겨놓고 왼쪽으로 보면 갈림길이 있습니다. 이 주위가 국사봉 지석묘군이고, 갈림길에서 50m정도 들어가면 가장 눈에 띄는 고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 불리는데,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고조선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국사봉 지석묘군은 고양시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며, 시기적으로는 약2,500년 전에 만들어진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는 돌칼이 발견되었고, 고인돌로 보이는 여러 바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국사봉은 땅위에 받침석이 보이고 받침석위로는 덮개돌이 남아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석기나 가와지볍씨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이곳 성라산 지렁산 일대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고양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정 문화재입니다.    
600년 역사가 이어지다, 고양군청과 시청

600년 역사가 이어지다, 고양군청과 시청

1914년 고양군은 12개 면(용강, 연희, 은평, 숭인, 독도, 한지, 벽제, 신도, 원당, 지도, 송포, 중면) 155개리로 구성되었고, 고양군청은 고양동에서 지금의 충정로1(현 서울중앙적십자병원)로 이전하였습니다. 1936년 용강면, 연희면, 한지면이 한성부로 편입되고 고양군청은 지금의 동대문 부근인 을지로 5가로 옮겨졌습니다. 1945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서울시 행정구역 팽창에 따라 일부 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고양군은 원당, 벽제, 신도, 지도, 송포, 중면의 6개면만 관할하게 됩니다. 19618월 군청을 서울시에서 원당면으로 옮겼습니다. 19894월에 일산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옛 일산읍 일산리, 마두리, 장항리 , 백석리, 주엽리 일대에 560여 만평의 일산신도시 건설이 시작되었고 이어 중산, 탄현, 성사, 화정, 능곡, 행신지구의 택지개발지구가 추가로 발표되면서 199221일 고양군이 522년 만에 고양군에서 고양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일산신도시 개발과 주변의 화정, 탄현, 성사동, 중산, 행신지역이 도시화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고양시로 승격하였으며, 시 승격 후 새로운 시 상징물로 장미, 백송, 까치 등이 선정되었습니다. 시 승격 당시 고양의 인구는 약 24만 여명, 면적은 266.47였습니다. 20174월 기준 인구 104만의 큰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고양시에는 덕양구, 일산동구, 일산서구 3개의 행정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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