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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향토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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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드문 돌로 만든 사자상, 고양 노적사 사자상

보기드문 돌로 만든 사자상, 고양 노적사 사자상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인식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각, 회화, 공예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은 주지스님 전언에 따르면 1970년대 노적사 입구에서 주둔하던 군부대에서 막사를 건축하면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사자상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화강암 계열의 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방형에 가까운 몸통과 좌대, 신체에 비해 간략해진 다리 등의 표현에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교미술
30년 동안 불교예불회를 가진 귀한 비석,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

30년 동안 불교예불회를 가진 귀한 비석, 한미산흥국사만일회비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1929년 흥국사 주지 해송스님이 재원을 마련하고 당시 개운사에 머물던 정호스님(속명 박한영, 1872~1948)에게 만일염불회에 대한 내용을 부탁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주요 내용은 흥국사의 최초 창건 연혁 및 조선후기 절 명칭에 대한 유래와 그 외에도 19세기 후반 약사전, 칠성전, 나한전, 산신각 등에 대한 다양한 불사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19세기부터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 신앙인 만일염불회에 대한 고양시의 유일한 기록으로 ,비문을 통해 당시 만일염불회 후원이 왕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는 근대기에 제작된 비이기는 하나, 사찰의 연혁 및 유래와 조선말~근대에 만일염불회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20세기 초 불교사 및 불교신앙, 사회경제사, 후원체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 역사적, 사료적 가치고 높다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도 포함되어 있어 고양향토사 연구에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흥국사 만일회 기비>는 흥국사의 정문인 일주문 (一株門) 안쪽에 있는 비석으로 고양시 향토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은 1천년이 넘은 흥국사의 역사를 정리하고 특히 1904년부터 1928년까지 이어진 흥국사 만일회 염불 법회를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남긴 비문입니다. 이 비석은 좌대. 옥개,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후좌우 4면에 모두 비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비신은 오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전면 윗부분에 두전 (전서)도 눈에 띄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금석문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효자, 장의중 효자정려각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효자, 장의중 효자정려각

장의중의 묘와 정려, 효자문은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입구 식당가의 뒤편 구릉에 위치해 있으며, 장의중 효자정려각은 고양시에서 유일하게 정려각과 효자정려문이 남아 있는 유교 유적입니다. 정려는 한옥 형태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일부가 훼손되어 콘크리트로 일부 개축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2칸으로 안에는 위패, 제기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려에는 효자학생 장의문지려(孝子學生 長宜中之閭)’란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 있고 정려문의 판은 붉은색으로 홍살은 모두 8개이며 효자문은 정려로부터 연결된 쇠줄로 지탱되고 있습니다. 장의중은 조선시대 말의 효자로 어머니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헌혈하려고 하였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1905년 고종으로부터 정려와 효자문을 사사 받았습니다. 정려문 뒷면 30m 뒤편에 장의중의 무덤이 자리해 있습니다.  
정려각
고양시에도 고인돌이? 국사봉지석묘군

고양시에도 고인돌이? 국사봉지석묘군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유산 제5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화정동 국사봉의 정상부에는 장사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고 아래로 20~30m 정도 능선까지 많은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남쪽 사면은 국사봉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고 북쪽 사면에는 수적으로는 많지 않은 것 같으나 잘 다듬어진 돌이 20여개 분포하고 있습니다. 정상부에 있는 장사바위는 직격 10m도 넘는 큰 바위였다고 하나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바위들은 다른데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지상에 노출된 노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대부분이며 지석묘를 썼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노반을 이용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석묘는 국사봉을 오르내리는 길 주변에 있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받침석이 지표면 위로 올라와 있고 덮개돌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고인돌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선사유적
한산 이씨 묘

한산 이씨 묘

한산 이씨 묘                  
묘소
마을의 안녕을 위해.. 백석동흰돌제

마을의 안녕을 위해.. 백석동흰돌제

 수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백석동 흰돌제는 백석동의 지명유래로서 옛날부터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며, 주민의 단결과 화합을 통해 마을이 발전 할 수 있도록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왔습니다. “흰돌에 대해 향토문화를 계승하고 마을의 항구적인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흰돌보존위원회(백석동단체협의회)에서 매년 음력 3월 초 길일에 맞추어 백석동민들과 함께 지내는 마을 제례입니다. 백석동의 유래로 전해 내려오는 흰돌을 보존하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주민화합을 위해 매년 흰돌제행사를 유지하여 왔으나 작년부터는 백석동 단체협의회에서 계승하고 있으며 백석동 분동과 관련하여 점차 계승의식이 희박해지고 있어 고양시 향토문화유산로 지정하여 전통을 확립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무형(전통제례)
성석 진밭 두레패

성석 진밭 두레패

성석동 진밭두레패는 이미 경기도 무형유산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포호미걸이와 함께 고양시의 대표적인 특징성이 있는 민속놀이, 전통농악대로 유명합니다. 진밭두레패가 전수되고 있는 곳은 일산동구 고봉동에 속해 있는 성석동 진밭마을로 이 마을에는 지경다지는 소리를 비롯해 농사소리 등 민요를 부를 수 있는 선소리꾼, 온갖 악기를 다루는 잽이꾼, 춤꾼, 법고잽이꾼 등 총 70여 명의 보존회원이 있습니다. 진밭두레패 농악놀이는 농사작업기에 본 농악으로 등장하며 모두 12마당놀이를 갖추고 있습니다. 농악의 가락은 1채 가락으로부터 12채 가락까지 다양한 변형가락을 갖추고 있으며 이중 12채 가락은 춤가락이며 자진모리 가락에서 율동을 하게 됩니다. 본래 본 농악에서는 소와 농기구를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생략하여 간소화되었습니다. 두레패의 특징은 제금이 있는 것과 법고(벅구)의 숫자가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다른 농악대에서는 제금을 쉽게 볼 수 없는데 이 두레패에는 반드시 포함되며, 결국 이러한 특징은 고양시의 대표적인 두레패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특이점으로 꼽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무형유산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농악놀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나무와 보기 드문 소경을 지닌, 풍동 당산목 및 산치성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나무와 보기 드문 소경을 지닌, 풍동 당산목 및 산치성

풍동 산치성은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 식골마을에서 수백 년간 보전되어 오고 있는 일종의 동제(洞祭)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도당굿, 도당제, 산신제 등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동제인데, 이 도제의 특징은 다른 곳과 달리 소경(장님)이 독경으로 주제를 진행하는 산치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풍동 산치성은 한해 걸러 한번 씩 진행되고 있는데, 음력 10월 상달에 1일부터 5일 사이의 좋은 날을 잡아서 실시하며 현재 풍동 지역에는 수령이 200년이 넘은 참나무 한 그루가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풍동 식골마을에 소재하던 당산목과 부속물(터줏가리, 업양가리)은 우리 중부지역의 민속, 토속 신앙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풍동 식골마을은 예부터 단풍나무가 많아 풍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농사가 잘되는 벌판이 많아 식골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마을은 수 백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기원 등의 목적을 가지고 현재 택지개발지구 내로 이전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무형(산신제)
맞배지붕이 예쁜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맞배지붕이 예쁜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유산 제3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창건한 흥국사는 고양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사찰입니다. 북한산 아래 한미산 (노고산) 기슭에 자리한 흥국사에는 총 10여점의 지정된 문화유산과 보호수 나무 등이 잇지요. 흥국사에는 일반적인 사찰에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없고 대신 중심법당의 이름이 약사전입니다. 사전은 1710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경기도 문화유산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대왕의 글씨로 알려졌는데 측면과 뒷면에는 보살 공양 비천도 (飛天圖)가 그려져 있지요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는데 건물내에도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고양시 향토문화유산 43호인 흥국사의 나한전은 흥국사의 본전인 약사전의 서쪽에 자리한 건축물입니다. 나한전은 건물의 지붕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맞배지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건물 가운데에 나한전이라 쓴 현판이 있는데 곳곳에 사천왕상, 꽃무늬 등이 단청과 어울어져 한국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한전에는 16나한을 중심으로 불상이 중앙에 자리잡고 곳곳에 꽃 무늬와 아름다운 단청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시의 불교 건축 문화유산 중 유일하게 맞배지붕 모양을 하고 있지요 . 정면 3, 측면 2칸의 규모인 나한전 안에는 100년이 넘은 흥국사괘불이 괘불함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해 규모가 약간 작으며 전체적으로 동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목조로 된 건물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재질의 기단석이 위에 세워져있는데 정면으로 계단이 축조되어 있습니다. 나한전은 구파발 전철역에서 156번 버스, 의정부행 버스 흥국사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됩니다.    
불교건축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 강매동 석교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 강매동 석교

현재 신도시로 개발된 행신지구의 동쪽 방향 끝에 경의선 강매역이 있습니다. 강매역의 남쪽에 봉대산 방향으로 가는 길 있는데 길을 따라 봉대산 아랫부분을 돌아가면 제방이 있습니다. 이 제방 위에서 행주산성 반대방향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면 다리가 보이는데 이것이 강매동 석교입니다. 강매동 석교는 옛날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등 한강연안의 서부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다리였습니다. 다리의 기본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 교판석을 깐 모습이며 교각과 교각 사이에는 6~7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있습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형태이며 가운데 부분이 양 옆보다 높아서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1755년 영조연간에 발행된 고양군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으며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교로서의 기록은 다리 난간에 음각된 江梅里橋 庚申新造(강매리교 경신신조)’라는 기록으로 1920년대에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매동 석교는 강매역, 행신동 소만마을에서 강매동 강고산 마을에서 하차해 창릉천변 강매동 석교로 진입이 가능하다. 고양시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고 유일한 전통교량비라는 점에서 문화유산로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량
북한산3.1운동 암각문

북한산3.1운동 암각문

3.1운동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白雲峰)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기록문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정재용(鄭在鎔)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後世)에 전하기 위하여 가로 150cm, 세로 270cm 정도의 평평한 바위 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10일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으며 3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했다.”는 내용이 정자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을 새긴 시기 및 그 목적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을 새긴 정재용은 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한 독립 운동가이며, 그는 1919219일 해주에서 상경하여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입니다. 그 후 해주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0년 일본에 의해 검거되어 2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769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듬해인 그 공을 인정받아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각석
행주기씨 비석들

행주기씨 비석들

행주기씨 비석들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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