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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옛적 설화 : 고봉산 한씨미인 ]

#STORY 01. 고봉산 한씨미인
고봉산 한씨미인

동서양을 막론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은 모두들 알고 있죠? 그런데 그보다도 더 이전인 삼국시대에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있었답니다. 사실 「춘향전」이 그 이야기를 조금 바꾼 것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이지요. 바로, 『삼국사기』에도 수록된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 고봉산 한 씨 미녀 이야기’예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안장왕은 고구려 21대 문자명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흥안이었어요. 그런데 흥안이 태어난 시기는 삼국 중에서도 백제의 세력이 가장 강할 때였지요. 지금의 고양시 지역도 그때는 백제가 다스리고 있었어요. 원래는고구려 땅이었지만, 백제에게 빼앗기고 만 거지요. 그런데 이곳은 당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이었기에 고구려는 이곳을 어떻게든 되찾고 싶었어요. 그래서 태자였던 흥안을 백제에 몰래 잠복시켰답니다. 신분을 숨긴 채 정보를 모으는, 현대로 따지면 ‘스파이’가 된 거지요. 스파이로서 백제의 약점을 파악하고 다니던 흥안은, 어느 날 백제의 여인인 한주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아, 어쩌면 운명은 이리도 가혹하단 말인가!’

 

흥안은 탄식했어요. 첫눈에 반한 여인이 하필이면 적국의 사람이라니, 흥안이 안타까워할 만도 했죠. 더구나 둘 사이에는 신분 차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흥안은 한주에 대한 사랑을 막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신분을 속이고 한주에게 사랑을 고백했어요. 한주 역시 남자답고 늠름한 흥안에게 첫눈에 반해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지요. 운명 같은 여인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지만, 흥안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답니다. 자신의 신분과 백제에 잠입한 목적 때문이었어요.

‘나는 나라의 안녕을 위해 적국에 잠입한 몸!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흥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한주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컸기에 그런 다짐은 결국 소용이 없었답니다. 원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는 법이랍니다. 흥안과 한주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느덧 흥안이 고구려로 돌아가야만 할 시간이 다가왔어요. 마음 같아서는 한주를 데리고 고구려로 떠나고 싶었으나, 혼자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 탈출할 수는 없었어요. 그건 한주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죠. 흥안은 고구려로 떠나는 날, 한주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당신을 속여서 미안하오. 나는 사실 고구려의 태자 흥안이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백제의 약점을 알아내,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위함이었소.”

갑작스런 고백에 한주는 너무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어요.

“당신과의 이별은 상상도 하기 싫지만, 이제 나는 고구려로 돌아가야만 하오. 내 약속하겠소. 고구려로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을 되찾고,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힘들더라도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시오.”

아름다운 달빛으로 물든 처마 밑에서 흥안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들은 한주는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저의 지아비는 당신뿐입니다. 제가 죽어 백골이 된다 한들 저는 당신만 바라볼 것입니다. 바라건대, 고구려로 돌아가시는 길에 부디 옥체 보중하시고, 저를 잊지 마시옵소서.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됩니다. 고구려에 돌아온 흥안은 얼마 후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지요. 하지만 백제는 너무도 강했고, 고구려는 거듭 패했답니다. 이를 바라보는 한주는 안타까움에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지요. 흥안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도 둘은 금방 서로를 만나게 될 거라 믿으며 그리움을 달랬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가 한주의 아름다움을 소문으로 듣게 된 거죠. 마치 「춘향전」에서 변 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 요구한 것처럼, 태수는 사람을 보내 한주에게 청혼을 했어요. 하지만 한주는 자신에게는 이미 장래를 함께하기로 한 사람이 있다며 청혼을 거절했지요. 청혼을 거절당한 것에 화가 난 태수는 한주를 강제로 잡아들였고, 정혼자가 누구냐 물었어요. 정혼자가 고구려의 왕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한주는 대답을 하지 못했지요. 그러자 태수는 ‘적의 첩자와 내통한 것이 틀림없다’며 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까지 했답니다. 한주의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에 자신의 신하들을 불러 모아 한주를 구해 오는 신하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말했지요. 그러자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인 을밀이 앞으로 나섰어요.사실 을밀은 안장왕의 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한주를 구해 오면 상으로 안학공주와 결혼하고 싶다고 밝혔지요.

“나는 그대가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임을 알고 있네. 만약 모두가 실패한 일을 그대가 성공한다면, 고구려 제일의 용사임을 증명하는 것. 그렇다면 안학공주의 짝으로 그대만 한 자도 없겠지. 한주를 구해 온다면 그대의 청을 들어줄 것을 약속하겠네.”

을밀은 안장왕에게 요청해 스무 명의 병사들과 함께 백제로 떠났습니다. 마침 백제 태수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준비중이었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을밀은 병사들과 함께 광대로 분장해 생일잔치에 참석하기로 계획을 세웠지요. 한편 태수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한주에게 거듭 청혼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한주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지요.

“저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그날이 다가왔어요. 태수는 성대하게 자신의 생일잔치를 벌였지요. 한창 잔치의 흥이 올랐을 때, 태수는 옥에 갇혀 있던 한주를 그 자리로 끌고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지요.

“오늘 내 생일을 맞이하여 너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내 아내가 되겠느냐?”

모진 옥살이와 고문에도 한주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대답 역시 변함이 없었지요. 그녀는 태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습니다.

“저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생일잔치에 흥이 올라 있던 태수는 공개된 자리에서 거절을 당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이에 불같이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한주의 목을 치라고 명했지요. 그때였어요! 광대로 분장해 있던 을밀과 부하들은 숨겨뒀던 무기를 꺼내 들고 삽시간에 그곳을 장악했습니다.

“모두들 항복하라! 이미 이곳에는 고구려의 대군이 포진해 있다! 살고 싶다면 항복하라!”

그곳에는 백제의 병사들도 있었으나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라 미처 대응할 수도 없었지요. 게다가 대군이 포진해 있다는 말에 모두 무기를 버리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을밀은 그 혼란을 틈타 한주를 구했습니다.

“아씨, 저는 고구려의 장수 을밀입니다.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 안장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점령할 것입니다. 어서 봉화를 올리십시오.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한주는 을밀의 말대로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려 자신이 구출됐음을 안장왕에게 알렸습니다. 애가 타게 한주의 소식을 기다리던 안장왕은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안장왕과 한주는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안장왕은 한주를 고구려로 데려가 자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물론 을밀에게 한 약속도 지켰지요. 게다가 안장왕은 이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강 지역을 되찾기까지 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실려 있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 옛날, 신분과 국적을 뛰어넘은 러브스토리는 이후로 「춘향전」을 비롯해 많은 이야기들에 영향을 끼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