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년 구석기 역사, 고양시 최초마을 탄현동
탄현동 구석기 유물의 역사적 가치
5만년 전 구석기 유적지, 고양시 최초마을 탄현동
2007년 탄현동 임광진흥아파트 공사 시, 구석기 유물이 307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2016년 대우푸르지오아파트 공사 시 228점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분석 결과 탄현동에서 6만년 전부터 5만 5천년전까지 선조들이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유물 52점은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탄현동 임광진흥아파트에서 발굴된 구석기 유물 307점 중 52점은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유물로 국가에 귀속되었습니다.
고고학적 사료로 매우 우수하게 평가되어 중요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72점도 학술연구에 가치 있는 석기로 국립중앙박물관이 귀속되었습니다.
구석기 유적지 탄현동의 지리적 특징
한강 하구와 그 지류인 벽제천과 곡릉천에는 낮은 산자락이 분포하고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인해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조선시대 분묘, 수혈 등이 밀집한 복합유적지로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무엇이 발굴되었나?
구석기 시대읭 유물인 몸돌, 찍개, 긁개, 밀개, 홈날, 주먹대패, 격지 등이 출토되었으며,
대우푸르지오아파트에서는 조선시대 유물인 수혈 30기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70년대 일산역 주변
경의선 일산기차역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에 위치한 경의선의 역입니다. 경의선은 1906년에 개통되었으며 서울에서 개성·사리원·평양을 지나 신의주까지 연결되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대륙침략노선으로 이용하기 위해 공사를 서둘러 1904년 3월 용산-개성 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 1905년 평양-신의주 구간이 완공되어 용산-신의주 구간에 직통운전이 시작되었으며, 1906년 청천강·대령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습니다. 일산 옛 기차역은 1933년 건립된 건물로, 신도시 한가운데에 일제강점기 역사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희소가치를 가지고, 원형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되어 2006년에 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습니다. 일산역은 일제강점기시대의 건축양식이 남아있고 독립운동가의 통로, 일산장과 함께 고양지역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해주는 등록문화유산입니다.
밤가시초가-민속전시관
밤나무가 많아 밤가시 마을로 불리던 이곳에 안마당 지붕이 똬리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초가가 있습니다.
정발산 북동쪽 기슭에 위치한 밤가시초가는 조선후기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서민주택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가옥으로 1990년대 초반 일산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초가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초가집입니다. 예부터 “밤가시마을”은 밤나무가 울창하여 가을이면 밤가시가 야산에 산재해 있다는데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밤은 예전 이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자 나무 또한 주요 생활용품이었습니다.
밤가시 초가는 장마철 비가 올 때, 보름달 빛이 똬리 지붕 아래로 비춰질 때, 별빛이 내리 쬐일 때 등 아름다운 초가집입니다.
아름다운 전통 초가, 일산 밤가시 초가
정발산 북서쪽 기슭에 위치한 밤가시초가는 평면 구성의 형식이나 기둥 등 주요 부재의 부식정도로 미루어 그 건립연대는 대략 150년 이전, 곧 19세기 전반 이전의 건축물로 추정됩니다. 특히 이 가옥은 주요 목재로 기둥·대들보·중방·문틀·마루·서까래 등에 이르기까지 밤나무 재목을 쓴 것이 특징입니다. 이 집은 동남쪽으로 향해 앉았으며 형태는 ㄱ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현존하지 않는 행랑채가 맞은편에 대칭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채는 1칸의 좁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각각 1칸 반씩 안방과 부엌, 왼쪽으로는 1칸의 건넛방을 이룬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밤가시 초가는 대문 밖에는 밤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있고 대문위에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엄나무가시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스한 것이 이 집의 특징입니다.
눈부신 천연기념물, 송포백송
고양시를 상징하는 나무 고양 송포 백송은 나이가 550살이 넘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나무 기둥부터 가지, 줄기까지 흰 색을 띄고 있는데 솔방울에 작은 가시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세종대에 최수원 장군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 11.5m, 가슴높이 둘레 2.39m입니다. 옆에서 보면 나무의 모습이 부채살처럼 퍼져 역삼각형으로 보이며, 다른 백송에 비해 나무껍질이 희지 않은 편입니다. 이 나무의 유래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유하겸이라는 사람이 중국의 사절로부터 백송 두 그루를 받아 그 가운데 한 그루를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최씨의 조상에게 준 것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유래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던 최수원 장군이 고향에 오는 길에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도 전해집니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나무라고 하여 한동안 이 나무를 당송(唐松)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며,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알려주는 나무로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습니다.
송포백송은 나무의 껍질이 매우 얇으며 솔방울이 크고 솔잎이 3겹인 것이 다른 나무와 다른데 특히 소나무 전체가 흰 색을 띄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조선을 연결했던, 독산봉수대지
독산봉수는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과 사리현동, 지영동의 경계지점인 해발 133.4m의 나지막한 구릉 정상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독산봉수의 설치시기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봉화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 봉수제의 성립과 더불어 설치되었거나 혹은 그 이전으로 어겨집니다. 독산봉수는 북쪽으로는 파주 성산 → 파주 대산, 동쪽으로는 모악→해포→안현 등으로 북쪽노선은 일정한 정형성을 유지하는 반면, 동쪽노선은 때에 따라 변화가 심합니다. 사방으로 주위가 잘 조망되며 서쪽으로는 고봉봉수를 바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설치되어있으며 원형의 석축봉수대로 지형 여건을 고려하여 축조하였습니다.
독산봉수는 일산동구 고봉사거리에서 고봉동주민센터를 지나 삼거리에서 배수지까지 차량이동이 가능하며, 배수지 앞에 주차 후 5분 정도 오르면 군헬기장으로 쓰이는 독산봉수대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북쪽에서 내려오는 통일로를 조망해 볼 수 있으며 봉돈과 봉화를 지키던 석축도 잘 남아 있는 봉수유적입니다.
전통문화예술의 중심, 고양문화원
고양문화원은 일산서구 한류월드로 280번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양문화원은 고양상여회다지소리의 경기도 무형유산 지정,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전통예술복원 및 재현사업으로 선정된 행주나루 강풍어제, “고양민속박물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문화원 로비의 옛 생활용품 전시관, 그리고 각종 행사에서 우리 전통의 멋스러움을 뽐내는 고양행주취타대, 각종 국제행사에서 통역과 안내를 담당하며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청소년 워킹가이드, 찾아가는 역사교육으로 사랑받고 있는 늘푸른 인형극/동화구연단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의 문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양문화원은 고양시 전통문화예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문화원 건물은 한옥으로 만들어져 TV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멱절산 유적 출토유물
멱절산은 고양시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된 백제한성 도읍기 유적으로 경기도박물관이 2003년 유적의 범위와 성격파악을 위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사결과 유구는 수혈주거지 8기, 수혈구덩이 2기, 구상유구 1기, 적석유구 5기, 근래에 조성된 수혈구덩이 9기, 민묘 5기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은 고배, 삼족기, 호, 시루, 장란형 토기 등 백제토기 1000여점과 철촉, 철도자, 철부 등 철기 25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확인된 유구 외에도 멱절산 유적 전체에 백제토기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멱절산 전체에 유적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강 하류에 위치한 점과 각 층위별로 출토된 다량의 유물로 볼 때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중계역할을 했던 장소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멱절산 유적은 보루유적이 함께 발견되어 한강을 통해 북쪽의 고구려세력들이 남진하는 것을 살펴보고 상대의 적을 막아내는 중요한 삼국지대의 유적입니다.
백제와 중국의 교류 중심지, 멱절산
한강 이산포 나들목 부근에 1800년 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멱절산 유적이 있습니다. 멱절산은 한강과 가깝게 있어서 물길을 통해 오고가는 배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한성백제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이외에도 중국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어 백제의 국제 교류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멱절산 유적은 비교적 최근(2000년대 이후)에 발견된 유적으로서 파주의 육계토성, 운정지구의 백제시대 유적과 더불어 한수이북 지역 백제시기의 역사를 조망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며, 시굴조사 결과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질 경우 많은 매장문화유산가 확보될 가능성이 높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