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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향토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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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행주대첩의 의병장, 고양 밥할머니 석상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의병장, 고양 밥할머니 석상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10-2  서울시에서 고양시로 들어오는데 이용하는 1번국도 통일로, 한창 삼송신도시, 은평 뉴타운 개발로 어수선한 통일로변 동산동(東山洞) 마을에 목 부분이 훼손된 채 북한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석상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밥 할머니 또는 고석(古石) 할머니라 부르는 이 석상은 현재 고양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습니다. 석상은 총 높이가 141cm 가슴둘레는 85cm의 규모이며, 이 석상 앞에서 마을 주민들은 밥 할머니께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동산동 밥 할머니의 본래 성시는 해주오씨(밀양박씨라는 설도 있습니다.)로 알려져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양과 서울 은평구, 양주군 일대에서 의병과 관군에게 큰 도움을 주어 나라에 공적을 세우게 됩니다. 현재 고양지역에서는 이 밥할머니가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행주치마 부대의 여성 의병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인조반정에 일부 참여하고 병자호란 전란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 구휼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고양시 초등학교 3학년 사회과 탐구 교과서를 보면 이곳 동산동의 밥 할머니이야기가 전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북한산에 포위된 조선군과 명나라군대를 기지를 발휘하여 물리쳤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이유로 이곳 동산동의 밥 할머니 석상에는 어린 학생들이 자주 찾아와 사진촬영을 하며 학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상
어린 나이에 죽은 외아들에 대한 애절함.. 이규령 묘비문

어린 나이에 죽은 외아들에 대한 애절함.. 이규령 묘비문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5호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산42-4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산속에 자리한 회원군의 외아들 이규령의 비석은 위치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비석은 1666년경에 세워졌으며 설립자는 이규령의 아버지이고 선조대왕의 손자인 회원군입니다. 이 비문의 내용은 어떤 비석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광해군의 막내 아우인 영성군의 아들 회원군이 자신의 외아들인 이규령이 11세의 나이로 일찍 죽으니, 이를 슬퍼하며 세운 비문입니다. 비의 재질은 양주 애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어 보기 드문 예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먼저 비문의 앞부분에는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슬픔을 기술했고, 이어 아들이 살아생전에 가지고 있던 재물로 종들을 사들이고 밭과 논도 매입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다음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확한 날짜와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는 물품으로 꿩의 다리, 수박, 포도, , 광어, 전복 등을 쓰라고 구체적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영성군)이 죽더라도 후손과 종인들은 이러한 제사법을 계속 이어가길 당부하면서 비문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규령 묘비문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금석문으로 당시 왕실의 재산, 민속, 진설법과 후손들의 제사상 차림 등에 있어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향토문화재입니다.      
묘비
태종의 아들, 익령군 이치묘소

태종의 아들, 익령군 이치묘소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144-10 익령군 이치의 묘소는 원당역에서 서오릉으로 가는 길의 왼쪽에 붙어 있습니다. 덕양구 흥도동 관내 성사동 오리골 마을에 자리한 조선조 전기의 왕실 묘역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묘 앞에는 조선전기 변형되기 이전의 장명등이 묘소를 지키고 있는데 6각의 모양인 고려시대의 수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화창(불구멍)2개이고 4각의 기둥도 당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봉분 앞의 조선전기 비석에는 조선 세조 12(1466) 313일에 세웠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묘소에는 묘비, 혼유석, 묘표,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있으며 이 중 문인석은 조선 전기의 특징을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분 정면의 화강석 묘비는 太宗恭定大王子 益寧君 昭剛公之墓(태종공정대왕자 익령군 소강공지묘)’라 기록되어 있으며 익령군은 조선 제3대 태종의 8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선빈 안씨입니다. 익령군은 평소 성품이 어질고 겸손했으며 학행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인은 운봉 박씨와 평양 조씨 두 명을 두었으며, 평양 조씨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원익의 4대조이며 시호는 소강공으로 1464(세조9) 7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민묘
성석 진밭 두레패

성석 진밭 두레패

성석동 진밭두레패는 이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포호미걸이와 함께 고양시의 대표적인 특징성이 있는 민속놀이, 전통농악대로 유명합니다. 진밭두레패가 전수되고 있는 곳은 일산동구 고봉동에 속해 있는 성석동 진밭마을로 이 마을에는 지경다지는 소리를 비롯해 농사소리 등 민요를 부를 수 있는 선소리꾼, 온갖 악기를 다루는 잽이꾼, 춤꾼, 법고잽이꾼 등 총 70여 명의 보존회원이 있습니다. 진밭두레패 농악놀이는 농사작업기에 본 농악으로 등장하며 모두 12마당놀이를 갖추고 있습니다. 농악의 가락은 1채 가락으로부터 12채 가락까지 다양한 변형가락을 갖추고 있으며 이중 12채 가락은 춤가락이며 자진모리 가락에서 율동을 하게 됩니다. 본래 본 농악에서는 소와 농기구를 사용했으나 요즘에는 생략하여 간소화되었습니다. 두레패의 특징은 제금이 있는 것과 법고(벅구)의 숫자가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다른 농악대에서는 제금을 쉽게 볼 수 없는데 이 두레패에는 반드시 포함되며, 결국 이러한 특징은 고양시의 대표적인 두레패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특이점으로 꼽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무형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농악놀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나무와 보기 드문 소경을 지닌, 풍동 당산목 및 산치성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나무와 보기 드문 소경을 지닌, 풍동 당산목 및 산치성

풍동 산치성은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 식골마을에서 수백 년간 보전되어 오고 있는 일종의 동제(洞祭)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도당굿, 도당제, 산신제 등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동제인데, 이 도제의 특징은 다른 곳과 달리 소경(장님)이 독경으로 주제를 진행하는 산치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풍동 산치성은 한해 걸러 한번 씩 진행되고 있는데, 음력 10월 상달에 1일부터 5일 사이의 좋은 날을 잡아서 실시하며 현재 풍동 지역에는 수령이 200년이 넘은 참나무 한 그루가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풍동 식골마을에 소재하던 당산목과 부속물(터줏가리, 업양가리)은 우리 중부지역의 민속, 토속 신앙을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풍동 식골마을은 예부터 단풍나무가 많아 풍동으로 불렸으며 특히, 농사가 잘되는 벌판이 많아 식골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 마을은 수 백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년기원 등의 목적을 가지고 현재 택지개발지구 내로 이전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무형(산신제)
임진왜란 당시 고양지역의 의병장, 이석탄 장대비

임진왜란 당시 고양지역의 의병장, 이석탄 장대비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9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48-1 이석탄 장대비는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장대비입니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장대비는 화강석으로 5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 李石灘將臺(이석탄장대)’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年庚申 洞人立(선생임진기의병설대 후백사십구년경신 동인립)’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石灘 李愼儀(석탄 이신의)’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석탄 이신의(1551~162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이라고 전해지며 고양8현 중 한 분입니다. 형조판서 원손의 아들이고 민순의 문인이며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과 괴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비갈
권희선생 묘

권희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38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60-6 권희 선생 묘는 원당 전철역 남쪽의 성사동 불당골 마을 안에 진한국대부인 한씨와 합장되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2쌍이 있으며, 최근에 오석의 비석과 망주석 1, 문인석 2쌍을 그 앞쪽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봉분은 본래 고려조·조선조 초기의 보편적인 사각묘였으나 현재는 새로이 단장하여 옛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봉분 앞에 세워진 화강암 재질의 묘비는 높이 83cm, 33cm, 두께 14cm의 규모인데 묘비의 윗부분은 다듬어 마름모꼴로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런 형태의 묘비는 조선 초기에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쉽게 보기 어렵습니다. 묘비의 앞면에는 조선정승정간공 권희지묘 진한국 대부인 한씨 장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정통기사라 기록해 세종 31(144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묘비의 우측으로는 높이 127cm의 장명등이 위치해 있는데 화장은 두 개로 옥개석의 조각 수법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구조는 사각의 화사석 위에 사각형 옥개석을 얹은 형태입니다. 장명등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석물이 보이는데 장명등의 부재로 판단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 서 있는 장명등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원래의 장명등일 가능성이 있으며 비슷한 부재가 고려고양왕릉에서도 보입니다. 상석, 고석, 향로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15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총 높이 110cm에 관모를 쓰고 홀을 두 손으로 받쳐든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며 홀과 턱이 일정하게 떨어져 있고 땅속에 묻힌 부분과 아래쪽이 왜소해지는 점 등이 조선 전기의 문인석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문인석의 얼굴에서는 눈이 크고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와 험상궂은 모습으로 보이며 팔굽에서 수평선 위쪽으로 굽혀진 손의 처리가 깊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주위에는 이밖에 최근에 세워진 문인석과 신도비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권희 선생 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에서 많이 보이는 풍자적이고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희는 고려말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충숙왕 6(1319)에 출생하여 조선조 태종 5(1405)에 사망한 인물입니다. 본관은 안동으로 검교시중 권고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양촌 권근의 아버지가 됩니다. 음보로 관직에 기용되어 홍주도병마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영가군에 봉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2년 검교문화시중으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습니다.    
민묘
심희수 묘

심희수 묘

심희수(1548~1622)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구, 호는 일송이며 본관은 청송입니다. 심희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3(1548)에 출생하여 광해군 14(1622)에 사망하였습니다. 노수신을 따라 진도의 유배지에서 천리학을 배웠으며 21세 때에 성균관에 입학, 학생 대표로 제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선조 5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선위사를 거쳐 도승지, 형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심희수의 묘는 원흥동 구석말 마을 청송심씨 묘역에 정경부인 광주 오씨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혼유석 및 최근 새로 세운 장명등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으며, 봉분 앞에는 숙송 1(1675)에 세운 묘비가 있으며 앞면에 의정부 좌의정 일송선생지묘 정경 광주 오씨 부좌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민묘
단종을 위한 끝없는 충심, 이축선생 묘

단종을 위한 끝없는 충심, 이축선생 묘

흥도동주민센터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입니다.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한 이축 선생묘는 문인석, 묘비 등이 있으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축(1402~1473)은 고려 말의 대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둘째 아들 인재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 감찰, 호조좌정렁,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민묘
고양에서 가장 유명한 효자, 박태성 묘

고양에서 가장 유명한 효자, 박태성 묘

박태성은 조선 후기의 효자로서 인왕산 호랑이와 박효자의 전설의 주인공으로 자는 경숙이며 본관은 밀양입니다. 오석의 비에는 朝鮮孝子 朴公泰星 旌閭之碑(조선효자 박공태성 정려지비)’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대좌까지 갖추어진 이 비는 조선시대 후기 효자로 널리 알려진 박태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고종 30(1893)에 세워졌습니다. 효자비 뒤편 250m 지점에 위치한 박태성의 묘는 좌우에 선인 완산 이씨와 선인 김해 김씨의 봉분이 있어 모두 3기입니다. 봉분 앞으로는 상석 1, 망주석 1쌍 그리고 작은 문인석 1쌍이 있으며 정조 2(1778) 5월에 건립된 묘비에는 有明朝鮮孝子通德郞密陽公泰星字景淑之墓(유명조선효자통덕랑밀양공태성자경숙지묘)’라 새겨져 있습니다. 봉분 옆에는 호랑이의 묘라고 전해오는 민무덤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최근 만들어진 호랑이상이 있습니다. 박태성의 묘 50m 아래에는 효자 박태성이 매일 참배하던 아버지 박세걸의 묘가 위치해 있습니다. 박태성 정려비(효자비)는 북한산성에서 의정부로 이어진 북한산 제청말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정려
맞배지붕이 예쁜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맞배지붕이 예쁜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지정번호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창건한 흥국사는 고양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사찰입니다. 북한산 아래 한미산 (노고산) 기슭에 자리한 흥국사에는 총 10여점의 지정된 문화유산과 보호수 나무 등이 잇지요. 흥국사에는 일반적인 사찰에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없고 대신 중심법당의 이름이 약사전입니다. 사전은 1710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대왕의 글씨로 알려졌는데 측면과 뒷면에는 보살 공양 비천도 (飛天圖)가 그려져 있지요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는데 건물내에도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고양시 향토문화재 43호인 흥국사의 나한전은 흥국사의 본전인 약사전의 서쪽에 자리한 건축물입니다. 나한전은 건물의 지붕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맞배지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건물 가운데에 나한전이라 쓴 현판이 있는데 곳곳에 사천왕상, 꽃무늬 등이 단청과 어울어져 한국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한전에는 16나한을 중심으로 불상이 중앙에 자리잡고 곳곳에 꽃 무늬와 아름다운 단청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시의 불교 건축 문화재 중 유일하게 맞배지붕 모양을 하고 있지요 . 정면 3, 측면 2칸의 규모인 나한전 안에는 100년이 넘은 흥국사괘불이 괘불함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해 규모가 약간 작으며 전체적으로 동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목조로 된 건물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재질의 기단석이 위에 세워져있는데 정면으로 계단이 축조되어 있습니다. 나한전은 구파발 전철역에서 156번 버스, 의정부행 버스 흥국사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됩니다.    
불교건축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 강매동 석교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 강매동 석교

현재 신도시로 개발된 행신지구의 동쪽 방향 끝에 경의선 강매역이 있습니다. 강매역의 남쪽에 봉대산 방향으로 가는 길 있는데 길을 따라 봉대산 아랫부분을 돌아가면 제방이 있습니다. 이 제방 위에서 행주산성 반대방향으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면 다리가 보이는데 이것이 강매동 석교입니다. 강매동 석교는 옛날 고양의 일산, 지도, 송포 등 한강연안의 서부사람들이 서울을 오가던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다리였습니다. 다리의 기본구조는 네모진 돌기둥 18개로 교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장방형 교판석을 깐 모습이며 교각과 교각 사이에는 6~7개의 교판석이 2열로 놓여있습니다. 다리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형태이며 가운데 부분이 양 옆보다 높아서 전체적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1755년 영조연간에 발행된 고양군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해포교라 기록하고 있으며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교로서의 기록은 다리 난간에 음각된 江梅里橋 庚申新造(강매리교 경신신조)’라는 기록으로 1920년대에 신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매동 석교는 강매역, 행신동 소만마을에서 강매동 강고산 마을에서 하차해 창릉천변 강매동 석교로 진입이 가능하다. 고양시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고 유일한 전통교량비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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