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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향토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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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립선생 묘

박대립선생 묘

박대립 선생의 묘는 통일로 숫돌고개에서 상촌마을 오금동에 남향으로 정경부인 장수 황씨의 묘와 같이 합장되어 있습니다. 숙종 18(1692)에 입석한 신도비는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운문이 조각된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문은 이정구가 글을 짓고, 권규가 전을, 5대손 경후가 글을 썼습니다. 박대립(1512~158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수백, 호는 무위당이며 본관은 함양으로 돈령부정 세영의 아들입니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중종 35(154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양주의 교수로 나갔습니다. 후에 태상참봉이 되고 형조좌량으로 재임한 당시에는 정실관계로 수 십 년 묵은 송사를 판서에게 항변하여 종결지음으로써 영의정 심경원의 추천을 받아 지평이 되었습니다. 그 뒤 대사간, 함경도 관찰사, 대사헌, 동지경연사,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12(1579)에는 이조참판에서 형조판서로 특진하였고 이조, 호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습니다. 선조 15(1582)에는 판의금부사를 겸임하고, 이어 판돈령부사를 지내고 다시 우찬성을 역임했으며 좌찬성으로 치사하였습니다.
민묘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진 신도비, 박세영선생 묘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진 신도비, 박세영선생 묘

박세영 선생 묘는 통일로 숫돌고개 너머인 오금동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팔각묘로서 정경부인 광주 김씨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묘 앞의 좌측으로는 무인석이 그리고 우측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며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신도비는 장방형의 비좌 운문과 학이 조각된 이수를 갖추었으며 선조 15(1582)에 세워진 것입니다. 박세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이이고 본관은 함양으로 좌찬성을 지낸 박대립의 아버지이며 돈령부정을 역임하였습니다. 후에 아들의 명성으로 인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습니다.  
민묘
조선후기 우리나라 무덤의 교과서와 같은 곳, 김주신선생 묘

조선후기 우리나라 무덤의 교과서와 같은 곳, 김주신선생 묘

김주신 선생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영사정 뒤편 200m 지점에 자리한 조선조 후기의 묘소이며 일반 무덤과는 달리 원형 봉분 뒤편에 기와가 얻어진 곡장 (曲墻)이 남아 있으며 곡장의 담장 부분과 기와에는 꽃 무늬 등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김주신의 묘소는 조선조 후기 왕의 종친, 고위관리의 묘소의 교과서와 같이 본모습이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우선 묘소 우측에 비갈명이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탄흔 자국이 남아 있으며 묘소 앞쪽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문인석이 서 있고, 2기의 문인석 사이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장명등 뒤로는 상석과 향로석, 혼유석이 위치해 있고 원형 봉분의 아래 부분에는 흙과 잔디가 무너 내리지 않도록 호석 (護石, 둘레석)이 만들어져 있으며 화강석 재질의 둘레석 곳곳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김주신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의 장인이며 딸은 숙종대왕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로 본관은 경주이며 경은부원군에 봉해 졌으며 시호는 효간공 (孝簡公) 입니. 또한묘소 아래의 영사정에 머물며 아버지인 김일진을 모신 인물로 알려져있습니다. 영사정 서남쪽으로는 김주신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민묘
기준선생 묘

기준선생 묘

기준 선생의 묘는 원당 전철역에서 한양골프장 방향인 성사동 사근절 마을 뒤편에 서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봉분은 정부인 파평 윤씨와 합장된 단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복재선생기준지묘 증정부인 윤씨부좌라고 쓴 묘비는 19624월에 세운 것입니다. 기준(1492~15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중이며 호는 복재, 덕양이며 본관은 행주입니다. 응교 기찬의 아들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며 중종 9(154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홍문관 정자로 초계문신이 되었고 사가독서를 하였습니다. 중종 11(1516) 천문 예습관을 겸했고 검토관, 수찬을 지낸 후 검상, 장령, 시강관을 거쳐 1519년 응교가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온성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모친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습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온성의 충곡서원, 아산의 아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고양의 문봉 서원에서 각각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민입니다.
민묘
이지신선생 묘

이지신선생 묘

이지신 선생의 묘는 용두동에서 향동동 방향으로 이어진 향두로 향골마을에 서남향으로 위치하며 봉분은 단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묘 앞 중앙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소가 있으며 묘소 앞 150m 지점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현종 3(1662)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黃海道 觀察使 贈吏曹判書 李公神道碑(황해도 관찰사 증이조판서 이공신도비)’라 전자되어 있습니다. 이지신(1512~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원립이며, 호는 보진암이며 본관은 우봉으로 판서 이승건의 손자이며 이심의 아들입니다.  
민묘
신도비의 조각 수법이 아름다운 묘소, 유여림선생 묘

신도비의 조각 수법이 아름다운 묘소, 유여림선생 묘

유여림 선생의 묘는 가장동 삼거리에서 고양동마을 방향으로 이어진 동헌로로 약 300m 가량 들어가 위치한 두포동 마을에 남향하여 창녕 성씨의 묘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묘비는 원래 조선 중종 28(1543) 8월에 건립되었으나 19359월에 다시 세운 것으로 오석으로 되어있습니다.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의 신도비는 선조 19(1586)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기단을 갖추고 있습니다. 유여림(1476~1538)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계옥, 호는 정당이며 본관은 기계이며 첨지중추부사 기창의 아들입니다.
민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이신의선생 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이신의선생 묘

이신의 선생의 묘는 고양시청에서 화전방향으로 약3km 가량 떨어진 도래울 마을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는 정부인 경주 이씨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으며 묘 앞 50m 지점에 위치한 신도비는 4면 각자로 앞면 상단에 贈吏曹判書 文貞公 石灘 李先生 神道碑銘(증이조판서 문정공 석탄 이선생 신도비명)’이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윤용구가 추서했으며 김한이 추전하였습니다. 옥개가 갖추어진 비의 규모는 높이 160cm, 너비 56cm, 두께 27cm입니다.  
민묘
홍이상선생 묘

홍이상선생 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13 소재지 :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56-1 묘는 성석동 고봉산 기슭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배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의 봉분과 쌍분을 이루었는데 봉분의 둘레는 각 15cm이고 높이는 240cm입니다.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습니다. 봉분 앞으로 이준이 지은 묘비가 있는데 크기는 높이 170cm, 65cm, 두께 25cm입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약 150cm 아래 지점에 서 있는데 인조 8(1630)에 건립하였습니다.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하며 아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새겼습니다. 대리석 비신의 규모는 높이 200cm, 115cm, 두께 29cm입니다. 홍이상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4(1549)에 출생하여 광해군 7(1615)에 돌아갔습니다. 처음 이름은 인상이며 자는 원례, 또는 군서입니다. 호는 모당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수의 아들입니다.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행촌 민순의 문인으로 선조 6년 사마시를 거쳐 6년 뒤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예조와 호조 좌랑, 파랑을 거쳐 정언 수찬, 지제교를 거쳐 병조정랑을 지냈습니다. 사가독서를 한 후에 교리, 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습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서 왕을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므로 병조참의에 전임되었습니다. 선조 27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곧 경상도 관찰사로 외직을 맡았는데 비변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왜장끼리의 이간책을 강구하여 성공시켰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 등이 올린 성혼 배척 상소를 극구 반박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이후 청주 목사가 되고 광해군 즉위년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파간의 계속되는 옥사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송도에서 돌아갔습니다. 시호는 문경이며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습니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제향된 고양팔현의 한사람이며 그의 삶을 그린 평생도(1781년 작:단원 김홍도)는 유명합니다.  
민묘
신도비의 두전이 독특한 묘소, 김전선생 묘

신도비의 두전이 독특한 묘소, 김전선생 묘

김전 선생의 묘는 원흥동 원흥역에서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석에는 광무 10(1906)에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묘소의 우측, 망주석 뒤편의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 비신과 화강암의 이수를 갖추었는데 金忠貞公神道碑(김충정공신도비)’란 전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특히 비의 이수 부분 문양과 조각수법은 매우 뛰어나며 비의 이수는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우수한 신도비문입니다. 김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 4(1458)에 출생하여 중종 18(1523)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중륜이며 호는 난헌·능인, 본관은 연안이며 지중추부사 김우신의 아들이며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증조가 됩니다. 중종 9(1514) 대사헌, 좌찬성을 거쳐 중종 13년 찬집청당상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을 왕에게 찬진하였습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로 기묘사화를 일으켰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으며 중종 15년에 영의정 겸 세자사에 이르렀습니다.  
민묘
이황선생이 지은 비문이 있는 묘역, 정지운선생묘

이황선생이 지은 비문이 있는 묘역, 정지운선생묘

정지운 선생 묘는 현재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건설된 안곡초등학교 뒤쪽인 고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부인 충주 안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묘 앞에는 모두 3기의 묘비와 함께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명종 17(1562) 5월에 건립한 묘갈에는 秋巒居士鄭之雲之墓(추만거사정지운지묘)’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이 찬하여 송인이 서하였습니다. 또한 19812월에 건립한 2기의 묘비는 오석 비신에 화강암 이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지운(1509~1561)은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정이, 호는 추만입니다. 경기도 고양 출생이며 김안국, 김정국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습니다. 천명도설을 지어 조화의 이를 규명한 뒤 이황을 만나 1553(명종 8) 수정을 받았으며, 이것이 뒷날 사칠논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곧아 남과의 교제에도 신중하였으며 벼슬에 천거되었어도 사양하였습니다. 1561년 천마산에 유람을 갔다가 병이 나서 고양으로 되돌아오다 죽었으며 고양의 문봉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민묘
김명원선생 묘

김명원선생 묘

김명원 선생 묘는 관산동 경주김씨 묘역에 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정경부인 청주한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묘 봉분 100m 앞에 위치한 신도비는 숙종 215월에 건립한 것으로 장방형 비좌와 옥개를 갖추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 平難功臣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평란공신 좌의정 경림부원군 증시충익 김공신도비명)’이라 전자되어 있으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김종연이 썼으며 김창협이 전하였습니다. 김명원(1534~160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순, 호는 주은이며 본관은 경주로서 관찰사 김만균의 아들입니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 13(1588)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습니다. 선조2(1569) 종성부사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고 선조 20(1587)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습니다. 선조22(1588)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 3등에 올라 경림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선조 33(1600) 부원군에 진봉되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김명원은 유학에 조예가 깊고 병서, 궁마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민묘
비석의 글씨가 독특한 비문, 이무선생묘

비석의 글씨가 독특한 비문, 이무선생묘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9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75 이무 선생 묘는 주교동 원당중학교 뒤편의 영글이산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 정경부인 해평 윤씨와 계배(繼配) 정경부인 능성 구씨가 합장되어 있는 사각묘로 석대가 둘러져 있습니다. 신도비 옆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영모비가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조 9(1785)에 건립된 백대리석 묘갈의 규모는 높이 138m, 두께 20cm, 너비 65cm이며 묘소의 입구에는 고종 15(1878) 10월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으며 너비 66cm, 두께 35cm, 높이 174cm 규모의 오석으로 옥개와 기단을 갖추었습니다. 이무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돈부이며, 호는 중정, 본관은 단양으로 판서 이거경의 아들입니다. 조선 개국 후 개성윤, 도체찰사, 참찬문하부사, 판삼군부사, 우정승, 영승추부사, 우정승 겸 판병조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종 2(1402)에는 김사형, 이회와 함께 지리석 지식을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지도를 제작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후 태종 8(140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죽주로 이배 도중 괴한들에 의해 피살 당하였습니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2년(1402)에 제작된 지도로 한강과 두만강, 대동강 제주도 등이 빠짐없이 그려져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에 제작된 지도 중에서 이렇게 자세한 지도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던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빼면 거의 모든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인도,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유럽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우리나라에 없고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한 이무 선생은 다방면에서 다양한 이력을 남기고 고양시에 잠들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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