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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향토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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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군묘 및 신도비 안내판

계원군묘 및 신도비 안내판

계원군묘 및 신도비 안내판
민묘
계원군묘 사당

계원군묘 사당

계원군묘 사당
문화재자료
계원군묘

계원군묘

계원군묘
민묘
계원군묘

계원군묘

계원군묘
민묘
계원군묘 및 신도비

계원군묘 및 신도비

계원군묘는 일산동구 성석동에서 문봉동 방향으로 이어진 성석로 진밭마을에서 오래골 마을에 위치합니다. 묘는 여흥 현부인 민씨와 쌍분을 이루어 남동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전방으로는 마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묘 앞에는 신구 3기의 묘비와 상석, 장명등 및 망주석과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어있으며, 좌측의 흰 대리석 묘비 앞면에는 承獻大夫桂原君艤之墓(승헌대부계원군의지묘)’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묘에서 산 아래 약 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 위에 흰 대리석 비신이 세워져 있습니다. 선조 15(1582)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長敏公神道碑銘(장민공신도비명)’이라 전자되어있습니다. 계원군 이의(1469~1554)는 조선 중기의 학자, 종친으로서 자는 의지이며 제2대 정종의 4대손이며 백성군 이원의 아들입니다. 4세 때 이미 문자를 해득했고 일찍이 사서삼경에 통달한 학행으로서 계림부수에 봉해졌으며 연산군 8(1502) 시예에 장원하여 명선대부, 승헌대부에 승좌되었습니다. 중종 즉위년에 돈령부도정, 중종 26(1531)에 계원군에 봉해졌습니다.
민묘
성녕대군묘 안내판

성녕대군묘 안내판

성녕대군묘 안내판
민묘
성녕대군 신도비

성녕대군 신도비

성녕대군 신도비는 태종 18(1418) 4월에 세운 것으로 검은 돌 비신을 양 옆에 세운 화강암 우주석에 끼워 넣은 것이 특징적입니다. 또한 팔작지붕의 옥개석에 나지막한 귀부를 갖추었고, 비의 규모는 폭 130cm, 두께 25cmdp 비신의 높이는 163cm 이며 전체 높이는 300cm입니다.  
민묘
성녕대군묘 원경

성녕대군묘 원경

성녕대군묘는 대자동 대자산 기슭(최영장군묘 인근)에 위치하였으며 3단의 장대석을 쌓았으며 묘의 주위로는 호석을 둘렀습니다. 묘소 좌우에는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그 좌우에 문인석을 세웠으며 전면에는 사당과 비각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 묘소 앞에는 비각과 함께 재실, 사당 등이 지어져 있습니다. 성녕대군의 묘역은 석조물이 많고 그 조성 방식이 특이하여 조선 전기 묘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민묘
성녕대군 사당

성녕대군 사당

성녕대군은 조선 제3대 태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고, 창령 성씨 좌찬성 억의 딸과 혼인하였습니다. 일찍이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4(1414)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태도가 단정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대광보국대부의 위계에 올랐으나 14세 때 홍역을 앓고 사망했습니다. 태종은 이를 몹시 비통해하여 그의 묘 옆에 대자암을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했습니다.
문화재자료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전경

월산대군묘 및 신도비 전경

지정번호 : 향토문화재 제1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 월산대군의 묘는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을 두었습니다. 월산대군의 큼직한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 신도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조선 시대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상석 뒤편의 묘비는 운문이 조각된 비두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었고, 규모는 높이 180cm, 74cm, 두께 32cm입니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을 놓았는데 270cm, 측면 155cm의 규모입니다. 월산대군의 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없을 뿐이지 흡사 왕릉처럼 듬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종이 친형인 월산대군을 극진히 아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풍족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월산대군 묘의 앞으로는 묘갈과 상석, 장명등이 굳건히 서있고 커다란 망주석과 석인이 그 양쪽을 지키고 있습니다. 모두 묘소 조성 당시의 유물 그대로입니다. 묘소의 뒤쪽으로는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부인 박씨의 묘소가 있는데, 연산군의 큰어머니이며, 어머니를 일찍 보낸 연산군에게 실질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녀를 너무 따랐던 나머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과 통정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사를 당하는 비운의 여인입니다. 월산대군 신도비는 신원동 능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월산대군과 박씨 부인 묘소 앞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종 20(1489) 왕명에 의해 세워진 이 비는 크게 대좌,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좌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도록 비좌가 만들어져 있고 연꽃무늬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습니다. 비신의 비문은 풍우로 인한 마모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에는 달과 산을 표현한 전자가 새겨져 있는데 매우 흥미롭습니다. 비신의 높이는 218cm, 105cm, 두께 32cm의 규모이고 비문은 임사홍이 짓고 썼으며, 전액도 함께 썼습니다. 비신과 연결된 이수에는 매우 화려하게 용조각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앞면에는 좌측의 아랫부분 용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고, 우측 윗부분의 용은 아랫부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두 마리의 용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월산대군 이정은 1454년에 태어나 35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한 왕족입니다. 추존왕 덕종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으로 자는 자미이며 호는 풍월정입니다. 세종이 증조부되시며, 세조가 조부입니다. 하지만 이정은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장자이며 나이도 왕자를 이어가기에 적당하였던 그는 왜 왕위를 받지 못하였을까요? 그는 7세 때인 1460년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자을산군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되었습니다. 예종은 즉위한 다음해에 사명하였고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덕종의 아들인 월산군과 자을산군 중 한명으로 압축되었습니다. 이에 세조비인 정희왕후는 세조의 명을 받들어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됨됨이가 빼어난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이어가게 하였고, 예종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즉위식은 거행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자을산군의 왕위계승이 다른 이유에 의해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월산대군의 건강이 나쁘다는 근거가 남아있지 않고, 자을산군 역시 제안대군처럼 어렸기 때문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장자도 아닌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장인이 한명회였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신숙주 등과 함께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고, 성종을 즉위시킴으로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이제 역적으로 몰릴 상황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결코 미련하지 않았습니다. 제안대군은 정말 바보처럼 행동해서 역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월산대군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풍류객처럼 보여서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풍월정이라는 그의 호에서 그의 인생이 묻어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민묘
행주기씨 묘역-연지 옆 비석

행주기씨 묘역-연지 옆 비석

행주기씨 묘역-연지 옆 비석
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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