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임진왜란 판도를 바꾼 행주대첩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이 고양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조선침략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오백 년 역사는 임진왜란 전기와 임진왜란 후기로 양분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맞게 된다.
7여 년에 걸친 전란은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조선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으며 조선왕조의 기반을 와해시키고 존폐 위기의 경지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규슈 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대마도주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려옴으로써 통신사를 여러 차례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살폈으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곧 이어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일본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약 1만 8천여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혈전하였으나 부산성을 빼앗기고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임진왜란이 본격화되었다. 전쟁 초기 해상 방어를 담당했던 경상좌·우수군은 완전 붕괴되어 해상교통로를 제재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해상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에 상륙할 수 있었고 부산을 거점으로 북진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경상도 지역의 육지 전투 또한 연패를 거듭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후 선조임금은 전쟁 발발 20여 일 만에 경복궁을 버리고 평양으로, 의주로 몽진의 길에 나서야만 했다. 수도이던 한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전세도 타격을 받게 되는데, 이는 몇몇 조선의 명장과 전국에서 분연히 일어난 의병과 승군들로 조직된 비장의 부대를 예기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조의 명을 받은 권율 장군은 광주목사로 내려가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항전하면서 북진하였다.
조선군이 육지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것은 권율 장군의 이치전투에서였다.
1592년 7월 8일 이치전투 이후 12월 말에는 수원 독산성에서 또 다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에 일본군은 두 차례나 참패하여 권율 장군의 진로를 주시하고 있던 터였다. 권율 장군은 전라병사 선거이를 수원 광교산에, 전라 소모사 변이중은 양천에, 창의사 김천일은 통진에, 충청감사 허욱은 파주와 양주를 연결하는 전선에 포진시킨 후 명나라 군사와 협공하여 한성을 수복하려는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내려오다가 1월 28일 벽제관 부근 숫돌고개에서 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명군인 이여송 부대와 한성 수복을 도모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군이 개성과 평양으로 퇴각함으로써 조선군 단독으로 한성 수복 계획을 세워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권율 장군은 조방장 조경과 승장 처영 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에 진을 구축하였다. 처음에 권율 장군의 계획은 아현 고개를 진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조경이 행주 덕양산을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은 해발 124.9m의 덕양산에 이중으로 목책성을 설치하고 토성을 보완한 후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화차와 화약을 정비하였다. 또한 수차석포와 투석전에 사용될 돌들을 산적하고, 진지 후방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하여 방화용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서 젖은 수건과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차도록 하였다.
행주산성의 남쪽 한강변과 동쪽 창릉천변은 절벽과 경사가 심해 침투가 거의 불가능했다.
경사가 완만한 곳은 서북쪽인데 계곡과 계곡 사이에 능선이 길게 이어져 능선자체가 성곽의 치(雉) 역할을 했다.
이에 서북쪽에 군사를 집중 배치시킬 계획을 세웠다. 가장 취약한 서북쪽 자성에는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배치하고, 북문장으로 무과출신 무장현감 이충길을 삼았다. 내성은 조방장 조경이 담당하고 권율 장군은 정상에 지휘소를 두고 총괄 지휘했다.
그리고 외성 450m에 군사를 일렬로 배치하고, 적이 침략하기 용이한 계곡과 능선 부근에는 전봉, 함덕립 등 맹장과 정병, 그리고 유능한 궁수와 화차를 집중 배치했다. 권율 장군은 왜군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수십 명의 정탐병을 한성 근교로 보냈다.
그런데 2월 11일 무악재에서 적의 선봉대에게 발각되어 8~9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날 5~600명의 왜군 선봉대가 행주산성 부근을 포위하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한성의 왜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행주산성을 향한 움직임이었다.
일본군은 이치전투와 독산성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총병력은 무려 3만여 명이었다. 드디어 새벽이 밝아왔다. 권율 장군은 전투를 앞두고 모든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훈시했다. “이제 자세히 적세를 살펴본다면 그 양과 질에서 우리가 맨손으로 당해 낼 도리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제압해 이길 것인가. 오직 한 가지 죽음으로써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밖에는 없도다. 남아(南兒)는 의(意)와 기(氣)만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훈과 명예를 다시 논하랴! 천 사람이 한 마음으로 서로 죽기를 맹세하자.” 라고 말하며 이번 전투가 자신의 생사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결사 의지로 다짐케 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일본군 선봉 100여 기병이 나타나고 뒤이어 거대한 대군이 성을 둘러쌌다.
이어 마침내 7차례에 걸친 치열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차 공격

제일 먼저 제1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총부대를 앞세웠다.
그의 군사는 평양성 싸움에서 패배한 여파로 벽제관전투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 싸움을 설욕의 기회로 삼아 기세등등하게 선봉에 나선 것이었다.
조선군은 적이 성책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화차, 수차석포, 총통, 각궁을 일제히 발사하였다.
예기치 못하고 집중공격을 당한 왜군의 말들이 놀라 날뛰었고 말에서 떨어진 왜군은 혼비백산 하여 거의 궤멸상태가 되어 물러났다.

제2차 공격

다음은 제2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비롯한 3봉행과 더불어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가 진두에서 공격해왔다.
조선군은 화차로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좌우상하로 자유롭게 조준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수적으로 유리한 왜군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적장이 흉부에 관통상을 입고 달아나자 제1대보다 빨리 무너졌으며 희생자도 많았다.

제3차 공격

왜군들은 쉬지 않고 다시 공격하였다. 제3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방어막인 성책을 부수기 위해 누대를 설치하고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배치하여 성을 향하여 공격했다.
주위에 나머지 군사들은 접근시키지 않게 하는 등 신중한 작전을 펼쳤다.
이때 조경은 지자포를 쏘아 이를 무너트리고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계속된 공격으로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후퇴하지도 못하여 주저하며 게걸음 작전으로 옆으로 피하는 일본군에게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로 공격하였다. 큰소리를 내며 터지는 비격진천뢰의 공격으로 왜군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일시에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계속된 공격에도 왜군은 성을 점령하기는커녕 제1성책도 돌파하지 못했다.

제4차 공격

보다 못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직접 선두에 나와 제4대 장병들을 지휘했다.
총대장이 선봉으로 나서자 왜병들도 사기가 높아져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해왔다. 마침내 성 깊숙이 침입하였다.
우키다의 독전으로 왜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돌진하여 산성의 제1성책이 무너지는 위기가 닥쳤다.
그러자 부장 토가와 다찌야스(戶川達安)는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상황이 위급해지자 조선군들이 동요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권율 장군은 도망하는 군사 한 명을 잡아 참수하고 직접 선두에 나서자 조선군은 다시 사기가 오르면서 혈전에 임하였다.
이에 총대장 우키다는 조선군 총통의 집중 사격에 부상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어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싸우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을 입어 후퇴하였으며 결사대이던 제4대대도 참패했다.

제5차 공격

이번에는 제5대장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의 공격이었다.
왜군들은 전세가 불리해짐을 알고 방어막인 성책을 불태우기 위해 갈대를 묶어 바람 부는 방향으로 불을 붙여 제2성책의 일부에 불이 붙었다.
조선군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리 준비한 방화수로 불을 끈 후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돌을 퍼부었다.
말을 탄 채로 후퇴하던 키카와 역시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제6차 공격

이어 제6대장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는 전략을 바꿔서 지형적으로 가장 약한 지역인 산성의 서북쪽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격을 가하였다. 그곳은 임전자세와 단결력이 뛰어난 승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때 승장 처영은 서북쪽 자성에서 1,000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적들이 근접하면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자 마침내 적은 물러갔다.

제7차 공격

제7대장 고바야카(小早秀包)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선두에 섰다.
승병이 지키고 있는 제5차, 제6차 집중공격으로 약해진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해서 그곳의 일부분을 뚫고 내성까지 돌입하였다.
이때 승병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지휘소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권율 장군이 대검을 빼어들고 총공격을 외치자 승군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분전하였다.
옆 진영의 조선군도 왜군을 향해 궁시를 집중 발사하며 처절한 근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조선군 진영에 화살이 떨어져 투석전을 펼쳤다. 화살이 떨어진 것을 안 왜군은 기세를 올리며 집중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부녀자들도 치마를 잘라 허리에 묶고 돌을 담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다. 산성의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마침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수사 이빈이 한강으로 수만 개의 화살을 가득 실은 배 2척을 몰고 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창의사 김천일도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후방을 지원했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도 들어와서 양천 포구를 뒤덮었다.
이에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 적을 완전히 격퇴시킬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까지 12시간 동안의 분전이었다.
왜군은 일곱 차례의 공격과 퇴각을 되풀이하였고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성을 지켜냈다.
왜군은 해가 저물면서 전력도 약해지고 조선군의 기습도 두려워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한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서 키카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4명의 장수가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조선군은 시체 130급(級)을 수습하였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기치와 갑주, 창검, 병장기 등 727건의 군기물을 습득하였다.
행주대첩의 승리 요인은 다음과 같다.

  • 1. 권율장군의 뛰어난 전략전술이 있었다.
  • 2. 최첨단 과학 무기 신기전이 있었다.
  • 3. 민·관·군의 혼신을 다한 협동심이 있었다.
  • 4. 산성의 자연적, 지리적 조건이 탁월했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발발 후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의를 상실한 명나라 원군에게 반성과 용기를 촉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 한성을 수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군은 군세를 합하여 한성의 외곽지역에 동, 서, 남쪽 3면으로 각 부대를 배치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여 기세를 꺾고, 보급선을 일제히 차단하였다.
수세에 몰려 한성 주변으로 퇴각한 일본군은 혹한과 군량 부족으로 고초를 겪다 1593년 3월에 벌어진 노원평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한성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후방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점차적으로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는 선조임금은 물론 벽제관에서 패하고 평양으로 후퇴한 이여송 부대를 놀라게 했다.
명나라에서도 행주대첩의 승리를 치하하며 권율 장군에게 홍비단 4필과 은 50냥을 전하며 포상하였다.
이후 권율장군은 도원수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선조임금이 선무공신 일등 공신에 봉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최종수정일 : 2018-11-22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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