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역사

절벽

자연과 역사
절벽- 천혜의 요새가 된 자연환경

이제 정상을 향하여 갑니다.
왼쪽으로는 화살나무와 매자나무가 있는 평범한 길이지만 오른쪽 옆으로는 급격한 경사를 이루는 지형입니다. 그래서 하얀 철재 담장으로 접근을 막고 있어요. 남서쪽에서 시작된 이 자연 절벽은 창릉천 쪽의 동북쪽까지 이어져 전투 때 자연적인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행주산성에서 가장 경사도 급하고 햇빛을 막아주는 나무도 없어 제일 힘든 코스이지만 이제 정상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모두 힘을 내어 걸어 볼까요?

절벽전경

<절벽전경>

진강정

자연과 역사
진강정 - 행주호를 바라보는 사각정

여기 진강정이라는 팻말이 보이지요?
이제 진강정을 만나러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이곳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아 비교적 한적한 공간입니다. 바로 저기 보이는 정자가 진강정입니다. 진강정은 1970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규모는 사각지붕으로 건평 36㎡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입니다. 창릉천이 인접하고 있으며 행주산성에서 한강을 제일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자 이름은 한강에 홍수가 나면 범람하는 물길을 막는다는 의미로 진강(鎭江)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현판은 한글 현판으로 서희환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진강정

예부터 한강변에는 수많은 정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에서부터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면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풍광이 수려한 한강가에 너도나도 정자를 짓고 학문을 닦거나 심신을 수련하는가 하면 더러는 주거공간으로도 이용하였습니다. 그 중 조선후기 문신인 김동필은 호도 낙건정으로 행주산성 아래 낙건정(樂健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진강정은 조선시대 정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이곳에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는 점만은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진강정에 오면 잠시 우리나라 정자문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강정은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있어 보기드문 새나 동물들을 가끔 만날 수도 있습니다. 벌 또는 뱀의 공격에도 유의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저 아래 창릉천 쪽을 바라보면 행주에서 한강고수부지로 연결되어 있는 자전거 도로가 보입니다. 방화대교도 발아래 보입니다. 또한 진강정은 2013년부터는 행주산성역사누리길에 포함되어 누리길을 걷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역사누리길

자연과 역사
행주산성역사누리길-행주산성에서 행주나루까지
행주산성 역사누리길

이 나무 팻말은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이 행주산성으로 이어지는 출입 지역을 나타냅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은 2013년 10월에 고양의 7번째 누리길로 만들어졌으며 바로 이곳을 통하여 행주산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의 전체거리는 3.7km이며 1시간 20분이 소요되는 구간으로 행주외동에 있는 시정연수원에서 출발하여 한강철책선 오솔길과 진강정을 거쳐 행주산성을 두르고 다시 시정연수원으로 돌아가는 코스입니다. 행주산성역사누리길의 코스는 고양인재개발원-행주산성공원-옛 철책선 팔각초소-행주산성 아래-진강정-덕양정-행주대첩탑-충의정-토성-행주산성 대첩문-행주산성 주차장-행주외동길-행주산성공원-고양인재개발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진강정에서부터 행주산성 주차장까지 구간이 행주산성 내 지역입니다. 고양시의 누리길은 다양한 코스가 있습니다. 고양시에서는 2010년부터 서삼릉누리길, 행주누리길, 고봉누리길, 송강누리길, 고양동누리길을 시작으로 누리길을 만들어왔습니다. 이후 이 행주산성역사누리길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행주산성을 걷고 있습니다. 걷기가 최고의 건강법이라고 하니 걷기 좋은 계절에 꼭 한번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덕양정

자연과 역사
덕양정-전망 좋은 팔각정

이제 진강정을 나와 다시 주 산책로로 올라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곧 또 하나의 정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벌써 저기 처마가 인사를 하네요. 보이시죠? 지금부터 오르는 이 길은 행주산성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길입니다. 이 정자가 덕양정입니다. 덕양정은 덕양산의 이름을 딴 정자로 팔각지붕으로 건평 44㎡에 콘크리트 건물 구조입니다.

이곳은 특히 여름에는 정말 시원한 바람과 그늘을 선물하는 고마운 곳입니다. 숨가쁘게 오르막을 올라와서 덕양정에 앉으면 모든 시름이 한 순간 사라질 것 같은 편안함을 만납니다. 이렇게 탁 트인 전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소입니다. 저 아래 동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북동쪽으로는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창릉천이 흘러 합쳐집니다. 지금은 창릉천의 많은 부분이 복개되어 일부만 보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창릉천과 한강물이 만나는 저 지역을 행호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행호는 방화대교 아래부터 행주대교까지 창릉천에서 내려오는 하천과 서해바다에서 밀물 때 올라오는 바닷물이 행주산성 아래에 모여 호수처럼 고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행호의 풍경은 그 유명한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도’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행주 특산물이던 웅어, 은복어 등의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모습과 많은 정자들, 멀리 고봉산, 북한산의 정경도 보입니다. 특히 산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덕양정

덕양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주황색의 저 다리는 고양의 강매동과 서울 강서구의 방화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인천 신공항을 오가는 방화대교입니다. 방화대교는 2000년에 건설되어 총연장 2.6km에 달하며 한강다리 중 가장 긴 다리입니다. 특히 중앙부 540m의 아치트러스(arch truss)는 비행기의 이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행주산성과 맞은편 개화산이 어울려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밤에는 환상적인 야경이 특히 유명한데 행주산성관리소에서는 관람객들에게 이 멋진 야경을 보여드리기 위해 매년 7월에서 9월까지 매주 토요일에만 야간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한강 건너 강서구 쪽 개화산에는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오는 봉화를 목멱산으로 전달하는 조선시대 5봉수에 속하는 봉화대가 있었던 곳입니다. 덕양정에서 잠시 쉬었으니 바로 올려다 보이는 정상을 향해 출발할까요?

행주대첩 초건비

자연과 역사
행주대첩초건비 - 행주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

이제 진강정을 나와 다시 주 산책로로 올라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곧 또 하나의 정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벌써 저기 처마가 인사를 하네요. 보이시죠? 지금부터 오르는 이 길은 행주산성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길입니다. 이 정자가 덕양정입니다. 덕양정은 덕양산의 이름을 딴 정자로 팔각지붕으로 건평 44㎡에 콘크리트 건물 구조입니다.

저기 오른편에 보이는 비각을 보러가겠습니다. 이 비각 안에는 특별히 잘 모셔둔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는 행주대첩비입니다. 비의 규모는 크기 178m, 너비 80㎝, 두께 18m로 재질은 대리석입니다.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비석은 3개가 있는데 이를 초건비, 중건비, 대첩비라고 합니다. 초건비는 바로 이것이고요. 중건비는 현재 행주서원에 있는데 1845년 왕명으로 건립된 것으로 초건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후 중건비 건립 이유를 추가로 써넣은 비석입니다. 초건비에 비하여 월등하게 크고 글씨도 정교하게 보존되어 있어 지금도 탁본으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화강암 비석입니다. 나머지 또 하나의 비석은 저기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비석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행주대첩의 의미를 기록한 비석은 바로 이 초건비입니다. 비석의 건립 시기는 1602년으로 그 유래는 권율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 행주대첩의 승전을 되살리며 장군의 휘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500년도 넘는 세월동안 글자도 다 닳아 없어지고 크기도 작지만 행주산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된 문화재입니다.

비문은 당대의 최고 문장가인 최립이 짓고 글씨는 명필가 한석봉이 썼으며 김상용이 전액을 썼습니다. 맨 위의 전액 글자만 조금 보이나요? 자세히 보면 그래도 작은 글자도 제법 남아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볼까요? 아래로 갈수록 글자들이 더 잘 보이지요? 몇 자나 찾으셨나요? 착한 사람 눈에는 글자가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예, 이제 그만하면 직접 명필 한석봉을 만나신 것입니다. 비문 끝의 추기는 이항복이 내용을 추가했으며 글씨는 김현성이 썼습니다. 왕명으로 중건비가 세워진 뒤 방치되어 있었으나 비각을 세워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안에는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내용은 행주산성보수정화기, 원수권공행주대첩비 전면음기, 권충장공승전비각건축기입니다.

행주대첩 초건비

여기서 잠깐 비문을 쓴 주인공들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고 갈까요? 비문을 쓴 간이 최립은 임진왜란 전후 외교문서를 도맡을 만큼 당대의 문장가로 시와 서예에도 뛰어나신 분입니다. 선원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했으며 강건한 필체로 유명합니다. 백사 이항복은 왜란 당시 선조의 측근으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으며 병조판서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할 것을 주장하였고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권율 장군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석봉 한호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며 해서, 행서, 초서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합니다. 글씨체는 석봉천자문으로 잘 알려져 있고, 친필은 별로 남은 것이 없으나 비문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금천의 석봉산 아래 정자에서 글공부를 하여 호를 석봉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김현성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초건비는 몇몇 막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으나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 참여한 비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비문의 내용입니다. 행주대첩이 있은 후 10여 년 후에 행여 행주대첩의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잊혀질 것을 염려해 실전에 임했던 장수들이 그때의 전투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수백 년 후 오늘까지 행주대첩의 의의를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록의 힘을 발휘하여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 그 내용은 당대의 명장들이 참여했다는 사실과 함께 이 비석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이 귀한 비석은 재질이 쉽게 마모되는 대리석이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방치되어 심하게 훼손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전까지 왜군을 무찌른 승전기념비가 20여 개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부가 폭파되거나 훼손되었습니다.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패전기록이니 얼마나 분통했겠습니까?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겠지요. 고종 3년에 세운 권율 장군의 이치대첩비도 1944년 일제에 의해 폭파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기념 명량대첩비도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렇듯 일본은 자신들의 패전기록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으니 이 행주대첩비도 그러한 수모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인지 초건비에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비석이 점점 갈라져 구렁이가 살 정도로 벌어졌다가 광복이 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붙었으며 갈라진 선만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권율 장군의 애국충절을 생각하며 비석에 나라를 빼앗긴 애통함을 불어넣었던 건 아닐까요. 자, 이제 다시 돌아 나와 정상으로 가겠습니다. 이곳 주위를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저 왼쪽 편으로 산정상부를 에워싼 둔덕이 보이지요? 소규모 내성을 일부 복원한 부분입니다. 토성의 내성부분은 1970년대 대첩비 광장 주위에 약 50m의 토성이 남아 있었던 것을 다시 손질하여 보수하고 그 위에 잔디를 심은 것입니다. 보수한 토성의 높이는 1,8m로 상단의 폭은 1m이었습니다.

행주대첩비

자연과 역사
행주대첩비 - 고양의 상징탑과 전망

이제 저기 높이 솟은 탑을 보세요. 또 하나의 행주대첩비입니다. 한강 건너편 올림픽도로를 달리다보면 산 속에 우뚝 솟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이가 15.2m로 탑 형태를 하고 있어 대첩탑이라고도 하는데 탑신에 종서로 길게 쓴 행주대첩비라는 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것입니다. 이 비는 처음 경기도민과 각계 유지들에 의하여 1963년에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이후 1970년 국가차원에서 재건비로 보수되었습니다. 기단을 개축하고 비문을 다시 크게 새겨 비신도 세척하는 등 전후면의 광장과 계단도 만들어 지금 15미터 이상 되는 탑의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입니다. 이 탑은 고양군 시절부터 고양의 상징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글씨 밑에 사면의 부조 그림은 당시 행주대첩의 장면입니다. 이 아래 검은 돌에 새겨진 글은 행주대첩의 승리에 대한 내용과 박정희 대통령이 애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다시 세워졌다는 내용이 한글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 정상에서는 매년 해맞이축제가 성대하게 열립니다. 올해 2015년에는 약 3만 명이 참석하여 새해소망을 기원하고 광복 70주년, 평화통일특별시 원년의 해를 상징하는 대형 모닥불을 점화했습니다. 전통 타악과 판소리와 퓨전국악 등 해마다 다채로운 공연도 함께 펼쳐지고 있어 행주대첩의 의미는 물론 시민축제장으로써의 역할도 함께 해주고 있습니다.

행주대첩비

이곳 덕양산 정상은 하늘과 맞닿아 전망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막힘이 없는 시야는 가슴을 뻥 뚫리게 합니다. 여기 서서 보면 이곳이야말로 대첩 당시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천혜의 고지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절벽과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는 강은 행주산성의 방어력을 한 눈에 확인하게 해줍니다. 덕양정에서 보았던 방화대교와 개화산도 이곳에서는 더욱 잘 보입니다. 자, 이제 오른편에서부터 전망을 살펴볼까요? 저기 보이는 높은 건물은 서울의 목동아파트타워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관악산도 보이네요. 그리고 왼편으로 이동하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63빌딩도 보입니다. 이제 한강을 건너볼까요? 남산과 남산타워도 저기 있네요. 저만치에 북한산 끝자락이 보입니다. 한강 왼쪽으로 길게 뻗은 도로는 강변북로입니다. 저기 산 정상에 유난히 평평한 들판이 펼쳐진 곳이 보입니다. 저곳은 난지도로 지금은 월드컵공원으로 더 유명하죠. 보이는 부분은 노을공원이네요. 서울의 도시산업화로 불어나는 쓰레기를 15년에 걸쳐 모아쌓아 두 개의 쓰레기 산이 만들어졌습니다. 난지도는 쓰레기 산에서 생태공원으로 다시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산입니다. 기적처럼 해마다 조금씩 쓰레기 산은 낮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행주대첩비 아래는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많아 뜨거운 여름에 관람객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줍니다. 이 중에서 나이가 많을 법한 살구나무를 찾아보세요. 예, 바로 맞추셨습니다. 이 나무는 수령이 200년쯤으로 추정되는 나무입니다. 해마다 튼실한 살구가 많이 열리고 있고 연분홍 살구꽃이 필 무렵 바람에 나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한강 다리 몇 개가 보이시나요? 방화대교, 마곡철교, 가양대교, 성산대교,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반대편에는 신행주대교, 김포대교, 일산대교가 있습니다. 한강이 만조 때는 난지도 부근까지 강물이 역류하여. 옛날 배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는 역류하는 밀물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한강의 제방은 1980년대에 만들어지는데, 1978년 행주대교 개통식 참석 후 대첩비를 보기위해 산성을 들린 박 대통령이 농사를 걱정하며 한강의 제방을 쌓아 농토와 관광도로로 이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제방이 없을 때는 한강에 홍수가 나면 수색까지 물이 들어왔고 밀물이 들어오면 이 일대가 뻘이 되어 섬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한강은 조선시대 물자 수송을 위한 주 교통로였습니다. 한강의 길이는 514㎞에 달하며 우리나라에서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다음 네 번째로 긴 강으로 한국의 수도를 접하고 있어 세계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강의 다리는 현재 31개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와 함께 흘러온 한강은 이제 새로운 미래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으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충의정 방향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충의정

자연과 역사
충의정 - 행주대첩 영상교육관

잠깐, 충의정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이동하여 전경을 살펴볼까요? 이곳은 서쪽으로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낭만적인 장소입니다. 여기 벤치 앞에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까 정상에서는 안 보이던 행주대교와 일산대교도 보이고 그 아래는 한강 하류입니다. 강 건너는 김포입니다. 저기 한강 하류 자유로 철책 너머의 장항습지는 길이가 7.6Km에 달하며 람사르 등록을 추진하고 있는 귀중한 자연습지입니다. 이곳은 군사출입지역이어서 자연생태계가 잘 유지되어 말똥게와 버드나무, 고라니 등 야생동물도 볼 수 있습니다. 벤치 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지요? 이 계단은 대첩기념관에서 내려오면서 만났던 숲속 길과 통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명상의 숲에서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이랍니다. 이제 충의정 앞으로 가겠습니다.

행주대첩 당시에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가 있었을 법한 이 장소에 충의정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세워진 충의정은 십자형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콘크리트 구조입니다. 현재는 영상교육관으로 행주대첩 관련 동영상을 상영하는데 상영시간은 17분입니다. 한여름에는 더위도 식히면서 행주대첩 이야기를 실감나게 볼 수 있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동영상 시청은 물론 무료이며 수시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충의정

충의정에서 나와서 토성 쪽으로 이동하시면 전망도와 망원경이 있습니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창릉천이 보이시죠? 창릉천은 서오릉에 있는 창릉 앞을 흘러 창릉천이라고 부르며 북한산에서 행주산성 아래로 흘러 한강과 만납니다. 창릉천은 덕수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전망도 앞 여기서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 북한산입니다. 북한산은 삼국시대에 부아악이라고 불렀는데,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할 땅을 찾으려고 이 봉우리에 올라 지세를 살폈다고 합니다. 북한산에는 숙종 때 쌓은 북한산성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고양시 소재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고양시에서는 북한산 복원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기 봉우리가 보이시지요? 북한산의 백운대와 만경대입니다. 인수봉은 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네요. 그 아래 부드러운 산모양은 노적봉입니다. 볏섬을 쌓아놓은 노적가리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노적봉은 올라올 때 사진전시장이 있는 쉼터에서 말씀드렸던 밥할머니의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밥할머니는 노적봉에다 짚단을 모두 모아 감싸게 한 후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에 횟가루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쌀을 가득 담은 함지박을 들고 우연인 척 왜군 옆을 지나갑니다. 예측한 대로 왜군들이 할머니에게 떠내려 오는 허연 물이 무엇인지 묻자 저 산 같은 것은 조선군영의 노적가리이며 군사가 어찌나 많은지 밥을 지을 쌀을 씻는데 그 쌀뜨물이 여기까지 흘러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를 듣고 왜군들이 겁을 먹고 물러갔다는 전설입니다. 잘 보세요. 정말 노적가리를 닳았나요?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강매동 봉대산입니다. 봉대산은 제3봉수로의 하나인 봉수대가 있었던 산으로 강계에서 시작되어 남산봉수대까지 연결됩니다. 북한산 오른 쪽에는 서오릉이 있는 매봉산이 있고 산줄기를 따라 망월산과 대덕산이 보입니다. 그 아래로 비닐하우스와 평야지대가 보이는 곳 역시 고양시 지역입니다.

토성

자연과 역사
토성 - 성곽이 숨어있는 행주산성

이제 충의정 뒤편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토성입니다. 이 토성은 테뫼식 토성으로 덕양산 7~8부 능선에 구축되었습니다. 테뫼식은 산 정상둘레를 테를 두르듯 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러한 방법은 삼국시대 때부터 보이는 축성방법이라고 합니다. 그 규모는 높이가 25~30m, 넓이는 2~3m이며 길이는 1km정도였으나 현재는 415m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토성에서는 삼국시대 기와 및 토기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오래전부터 군사적 요새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토성 위를 걸어 내려가겠습니다. 지금처럼 계단과 난간보호가 있는 산책로로 만들어진 토성 모습은 20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관람객의 안전과 편리를 위하여 구축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토성의 흔적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묻혀 있었다가 1970년에 토성모습을 찾아 둔덕을 이루었는데 자꾸 흙이 쓸려내려가고 관람객의 안전도 위험하여 계단과 난간보호를 설치하였습니다. 어쨌든 과거에는 왜군의 침입을 막는 토성이 전쟁 염려가 사라진 현재에는 관람객의 산책길로 세월 따라 달라진 모습입니다.

토성

이제 어느덧 토성을 다 내려와 내성문 터에 왔습니다. 이곳은 내성문이 있던 곳으로 행주대첩 당시 일천여 명의 승군이 치열한 전투를 겪었던 곳입니다. 한 때 성문이었던 목책을 부수고 왜군들이 쳐들어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무사히 물리치긴 하였지만 왜군은 물론 승병들의 수많은 살상자가 발생했던 곳으로 2000년대 어느 해에는 그때 죽은 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진혼굿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왼쪽 위쪽으로는 조금 올라가면 군사들이 식수로 사용하였을 법한 옛우물이 나옵니다. 저기 화장실 맞은 편 쯤인데요. 옛날 우물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은 그곳까지는 가지 않겠습니다.

기씨유허비

자연과 역사
기씨유허비 - 행주기씨 시조터

이제 이리로 가 볼까요? 여기 오른쪽에 우뚝 서있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보다 더 오래된 유래를 갖고 있는 비석입니다. 행주산성 안에는 행주대첩과는 관계없는 비석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 기씨유허비입니다. 이곳은 행주를 본관(本貫)으로 둔 행주 기씨의 시조터입니다.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을 이루어낸 장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주 기 씨가 탄생한 곳으로 종중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곳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6년 행주 기씨 후손들이 이 유허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행주 기씨(奇氏)의 시조는 기우성(奇友誠)으로 기자(箕子) 48대손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기원전 2세기경입니다. 특히 행주 기씨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고려의 기황후와 조선의 고봉 기대승이 있습니다. 기황후는 고려 충렬왕 때 기자오의 딸로 1334년 나이 14세 때 원나라에 궁녀로 갔다가 순제(順帝)의 후궁이 되었으며, 6년 후 태자를 낳고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기황후(奇皇后)가 되었습니다. 이후 원나라는 물론 고려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친 여성으로 유명합니다. 기대승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이황의 제자이었으며, 12년 동안 이황과 서한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습니다. 특히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주자학 논란을 편 편지가 유명합니다.

어쨌든 이곳은 행주 기씨가 탄생한 시조터로 이를 증명하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 볼까요? 기 씨 시조는 덕양산(행주산성), 바로 이 바위 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바위를 기씨바위라 칭하고 아래 샘터는 기감천(奇甘泉)이라고 합니다. 이 샘터도 유허비 건립 당시에 정비한 모습입니다. 기감천은 행주 기씨의 시조가 어릴 때 오줌을 눈 자리가 땅이 파여서 샘이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이 샘은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으며 이 물을 마시면 오복이 오고 장수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물이 졸졸 흘러 조그마한 샘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질이 식수로는 적절치 않으니 드시는 건 삼가시고, 시원하게 손이라도 담그시고 오복을 두 손 가득 떠가시기 바랍니다.

기씨유허비

최종수정일 : 2021-06-11 12:46:52

콘텐츠 관리부서 : 관광과 행주산성관리팀 031-8075-4642
만족도평가

현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