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역사

행주산성의 축성연대

행주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의 축성기법이 삼국시대 양식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치루던 6세기 이전부터 행주산성의 실체가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1992년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삼국시대의 와당 및 토기 파편 등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군사전략상 요새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축성연대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설화를 통하여 행주산성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시기는 6세기 초 고구려 안장왕 때이다. 백제가 한강을 차지하고 있을 때 고구려가 행주를 공격하여 한강일대를 차지하게 되는 사건은‘안장왕과 한씨미녀’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의 을밀 장군이 행주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덕양산에 진을 친 백제군과 마지막까지 싸워 그 일대를 점령한 후 고봉산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행주산성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는데 이 시기는 주로 북방 오랑캐들과의 싸움이 주를 이루어, 한강 이남에 있는 행주산성이 전적지로서의 역할을 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조선시대를 양분하는 분기점이 된 임진왜란을 겪으며 행주산성은 주요한 전략적 요새로 등장하게 된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은 행주산성이 최상의 요새였음을 증명해주었다.

조선시대 탁월한 전략지 행주산성

행주산성은 124.9m의 낮은 덕양산이 평야지대로 이어져 사방이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요한 요새역할을 한 것은 행주산성의 특별한 지형 때문이었다.
서남쪽은 한강이 흐르고 동북쪽은 창릉천과 습지대로 서남과 동남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으며 동면과 남면은 경사가 급한 험준한 지역이었다. 이로 인하여 적의 공격 지역은 매우 한정된 부분이었다. 또한 주위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지만 강으로 후방 지원이 가능했으며 한양에서 좀 떨어진 거리는 왜군을 유인하기에도 적합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영의정 유성룡을 비롯하여 행주대첩의 승리의 요인 중 지형의 탁월함을 언급하는 내용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행주산성은 지형이 험하여 큰 나무는 없었으나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던 것이다.
또한 행주대첩 당시 부장군이던 조방장 조경의 산성 보수내용은 행주산성의 당시 상태를 알려준다. 흙을 쌓아 성을 보축하고 성 안으로 돌을 날라 쌓았으며 목책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성은 방어를 담당할 정도로 견고한 형태가 아니었고, 토성도 허물어져 완전한 성곽형태를 잃고 있었다. 행주대첩 이전 행주산성은 전적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주대첩 이후의 행주산성

행주대첩 이후 행주산성은 주요한 전략적 요새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7년 동안 끌었던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은 그동안 소홀했던 국방력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음을 자각하였다. 이에 국토를 정비하면서 차후 방어시설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 1605년 경기 감사 이정구는 경기도의 요해처인 강화, 독성, 죽성, 파사성, 진마산성, 행주산성 등의 형세를 선조임금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때 행주산성 역시 별다른 군사적 방어시설을 하고 있지 않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는 행주대첩이 일어나고 12년 후의 일로 산성의 산세와 지형은 여전하나 임진왜란 이후 다시 방치되었고 산성에 대한 어떤 보존책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후로도 이렇다 할 축성이나 산성 보존의 별다른 조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902년에 작성된 행주서원의 원규에서 비봉의 수호는 산지기를 정하여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면 관에 보고하여 처결한다는 조항으로 보아 행주산성은 행주서원이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비봉은 행주대첩비가 있는 덕양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행주산성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지도면 행주내리 둘레 약 228칸 높이 약 10척 토축단 외부로 돌덩이가 굴러다님. 내부는 평탄하고 도기·기와편이 널려 있음. 높이 6자 1치의 석비가 1기 있는데 ‘원수권공비(元帥權公碑)’라는 글자는 뚜렷해도 기타 양면의 글자는 불분명함. 또 이 누벽에서 서남 방향으로 2~3자 높이의 토루가 연결됨.”이라고 되어 있다. 이 토루는 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1970년까지 50m정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행주대첩비는 오랜 풍화로 기체에 금이 가 그 틈 사이의 벌어짐을 보고 마을사람들이 점을 쳤다는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이는 풍화에 의한 자연마모도 있었겠지만,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면 온전히 남겨두기에는 불편한 비석의 기능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이 시기에 전국의 수많은 임진왜란 승전비들이 파손, 소멸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행주산성은 군사적 기지로서의 역할도 여전히 하였다. 구한말 서양군대가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거슬러 서울로 진입할 것을 대비하여 덕양산에서 행주외동에 걸쳐 있는 각 봉우리에 포대를 두었다. 주위의 강화도와 개양산, 개화산 봉우리에도 포대를 설치했었다. 이후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때에도 행주산성은 중요한 방어요새지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행주산성

행주산성의 요새적 지리요인은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입증된다. 한미연합군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수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도강한 것이다.
한반도 내의 전쟁에서는 언제나 행주산성은 한강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행주산성 입구에 세워진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천상륙을 성공리에 감행한 한미 양국 해병대는 다시 적을 추격하여 대거 한강을 건넜으니 때는 1950년 9월 20일 미명, 곳은 권율 도원수의 대첩기공비가 서 있는 행주, 아수라의 혈전 끝에 서울진격의 교두보는 이에 확보되었으니 이 어찌 누란과 같은 조국을 위하여 새로운 감격이 아니리오.
이 승첩에 자유의 신으로 승천한 그대들의 빛나는 공훈과 아름다운 이름은 저 한강수와 더불어 이 국토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무궁히 흐르리라.
삼가 비노니 안심하고 명복할지어다.

1958년 9월 28일
해 병 대 사 령 부

시대를 달리하지만 임진왜란에 이어 한국전쟁에서 역시 수도를 빼앗긴 국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행주산성은 결정적 전적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온 것이다.

1970년대 민족의 성지로 거듭난 행주산성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행주산성은 황폐화되었다. 산성 내의 수목은 빈약하고 소나무는 송충이가 만연하고 아까시아나무 등 잡목만이 우거져 있으며 행주대첩비 주위에만 누군가 심어놓은 무궁화 몇 그루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경내는 공동묘지로 변하였고 행주대첩비는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었으며 비각도 없었다. 정상에 1963년 세웠던 재건비도 훼손되어 기단은 파손되었으며 토성도 황폐화되었다. 산성에는 일본식 양철로 지은 허물어진 팔각정 건물과 콘크리트로 지은 조잡한 공중변소만 하나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행주산성 보수정화 사업이 실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군사혁명을 통하여 집권하면서 과거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하는 풍토로 국방력이 약해졌음을 지적하고 국난을 극복한 행주산성을 민족의 성지로 삼아 국민정신 함양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행주산성은 조국수호정신을 계승하는 국민교육도장으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1차, 2차 보수정화 공사를 끝마친 행주산성 일대는 민족의 성지로 그 역할이 새로워졌다.
보수정화 사업의 진행은 우선 1969년에 행주산성 일대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이어 본격적으로 그 일대 토지 1만 2천여 평을 매수하여 분묘 88기를 이장하였다. 산성 내에는 소나무, 잣나무, 개나리, 회양목 등 18수종으로 1,800주을 심고 잔디를 가꾸어 조경공사를 하였고 건축물로는 충장사와 삼문, 덕양정, 진강정, 대첩문, 대첩비각, 정상 화장실을 짓고 재건비 기단을 개축하고 전면 계단도 만들었다. 또한 대첩비 주변의 약 50m 정도의 내성을 손질하여 잔디로 단장하였다. 이때 원래는 내성과 활터에 보수한 117m의 토성이 남아 연결되어 있었는데 대첩비로 올라오는 길을 내면서 토성 일부가 훼손되었다.
행주내동에서 오르내리던 산성 입구를 폐쇄하고 광장과 도로를 만들고 새로운 출입구로 삼문 형태의 대첩문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대첩문을 통과하여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등산로가 만들어졌다.
보수정화 사업이 끝나자 전국에서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1970년대 방문객들은 단체관람객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는 국토정화 사업의 목적이었던 국민교육장으로서의 탐방장소로 학생, 군인, 기업체 등의 단체가 의무교육 차원으로 몰려왔다. 이로써 방어요새였던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을 기념하며 시설물들을 탐방하는 정신교육장으로 거듭났다.

1970년 정화사업 이후의 행주산성

행주산성 정화사업의 목적은 행주산성의 의미를 문화재 보존 가치로만 여기지 않고 민족정신을 이어받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1972년 6월 6일 국방의식 강화와 체력 연마를 위해 28개 대학 4,5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에서 행주산성까지 행군대회를 가졌다. 이를 시작으로 1975년 8월 27일에는 격전지 순례대행군으로 전국 고교 대학생 5만여 명이 반공 결의를 다지며 행주산성을 도보 행진하였다.
일반 탐방객도 많아져 봄·가을이면 많은 학교들이 소풍을 오기도 했으며 주말이면 가족 나들이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3년 8월 20일 서울교외선이 개통되면서 능곡역이 생기고 버스도 생겨 행주산성으로 오는 교통편이 편리해졌다.
1978년 행주산성 제2차 보수 정화사업이 완료되고 정상의 초건비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이 방문하였으며 국민교육의 장소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휴식처로도 각광 받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80년에는 대첩기념관이 1987년에는 전사청, 충훈정 등이 완공되면서 점점 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2년에는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전적지 보수사업으로 산성 내 살구나무도 많이 심었다. 산성 입구에는 팔각정 매점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유일한 매점으로 이용객이 많았다.
1996년에는 서울시에서 서울시티투어를 운행하면서 도심외곽 하루일주 코스에 행주산성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인천국제공항이 개항(2001년)하기 전에는 대부분 해외 여행객들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였다. 특히 제주도나 해외로 떠나는 신혼부부들도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공항이 가까운 행주산성에서 피로연을 갖고 행주산성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애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90년 시굴조사로 밝혀진 행주산성의 실체

1990년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12월 1일부터 12월 19일까지 19일간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시굴조사 보고서에서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행주산성은 해발 124.9m의 덕양산 정상을 동쪽 끝으로 하여 해발 70~100m에 걸치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이다. 성의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이며 동서로 약간 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성벽의 총연장은 1km가량 된다. 대첩비가 세워진 정상부는 사방 50m가량의 둑이 둘러 있고 내부에 충의정이 설치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서북쪽으로 한단 아래 사방 10m가량의 평지가 3~4곳 있는데 이곳은 내성의 흔적이며 초석(礎石)으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노출됐다.
그래서 이 일대에 전투를 지휘하고 성 내외를 관장하던 장대등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지 서북 모서리에서 조금 남쪽으로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세워져 있으나 이 일대의 성벽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충장사 동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기념관이 있는데 이 기념관의 남쪽으로 연하여 약 50m 가량의 토성지가 있으며 이 성벽은 산책로를 따라 대첩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첩비 휴게소(충의정)의 북단에서 토루(土壘)로 된 성벽이 이어지며 이 토성벽은 166m 계속되며 북으로 갈수록 경사가 낮아져서 끝난다. 성벽의 형태와 경사가 의도적으로 평탄하게 유지한 것으로 보아 평상시나 전쟁 시에 이곳을 주 통로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 토루로 된 성벽은 산의 능선을 깎아내고 경사를 급하게 한 성벽으로 이어지며 문지 부근까지 계속된다. 성벽 가운데 조그만 골짜기를 이루며 성벽을 끊고 지나가는데 이곳에 출입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주요 출입문은 성벽 북벽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곳은 자연경사가 완만하고 양쪽으로 성벽이 끊겨 있으며 현재의 등산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주 출입구였다고 한다.
이 조사는 대첩비 북단에서 문지에 이르는 토성지에 대한 조사였으므로 토성의 대체적인 윤곽 외에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출토된 토기, 기와 파편 등의 유물을 통해 축조 시기가 7~8세기경으로 추정되었다. 이로써 행주산성은 행주대첩 당시의 치열한 전적이인 동시에 삼국시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며 북방진출의 요지로 삼국에서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2010년대 행주산성

2015년 현재의 행주산성은 하루 평균 200~300명이 방문하며 휴일 최고 2,600여 명까지 방문하는 고양시 명소가 되었다. 도심에서 가까운 지리적 조건과 잘 정비된 경내는 일상을 탈피하여 여가를 즐기며 민족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많은 관람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더불어 행주대첩이 있었던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3월 14일 개최하는 행주대첩제를 비롯하여 행주문화제, 행주산성 해맞이축제 등의 행사에서 궁도대회, 민속놀이 등도 이루어져 고양시민은 물론 각지에서 오는 관람객도 늘어나고 있다.
1970년대 정화사업 당시 심었던 산성 내의 수목들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숲을 형성하고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따라 마련된 쉼터에는 봄가을 일반관람객은 물론 현장학습을 오는 학생들로 붐빈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수록된 행주산성은 현장체험을 통한 역사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정신교육장으로, 중장년층의 추억 회상 장소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계각층으로부터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최근 2011년부터는 고양시티투어도 운영되고 있어 이에 따라 국내인은 물론 국제꽃박람회, 킨텍스를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중요한 문화관광 코스가 되고 있다.
연간 28만여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고 있는 행주산성은 앞으로 행주나루 부근의 행주나루 역사공원, 행주역사 누리길 등으로 행주산성 주변 행주마을이 새로운 역사문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최종수정일 : 2018-11-27 1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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