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역사문화

권율

권율(權慄)
권율
  • 생몰 : 1537(중종 32년)~1599(선조 32년)
  • 본관 : 안동(安東)
  • 자 : 언신(彦愼)
  • 호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 시호 : 충장(忠莊)
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큰 공을 세웠다.
권율 장군은 1537년(중종 32) 영의정 권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1553년 17세 때 조휘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1559년에 사별하고, 1564년 박세형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슬하에 딸을 하나 두었다. 오성대감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이 사위이다.

1578년 영의정이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 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한 후 46세인 158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이후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가 되었다. 1582~1592년까지 10년 동안 문관으로 내직을 역임하다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 전라도순찰사, 도원수 등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명장으로 활약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로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그 휘하의 장수가 되었다. 이광의 군대가 한양 수복을 위하여 북진하면서 많은 군사를 잃자 권율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남은 군사와 의병 1천 명을 모아 다시 북진하여 전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이치고개’(충청남도 금산)에서 물리쳤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패배만 거듭하던 조선군이 처음으로 크게 승리한 육전으로 그 공으로 권율 장군은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이후 다시 1만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1593년 명군이 벽제관에서 일본에 크게 패하고 개성으로 물러난 후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2,300여 명의 군사로 왜병 3만 명을 무찌르는 행주대첩을 이루어냈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전세를 바꾸는 중요한 전투였으며 권율 장군은 조선의 전 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63세에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그 해에 별세하였다. 선조는 권율 장군을 영의정에 추증하여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수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 공신에 봉하고 ‘충장공(忠莊公)’의 시호를 내렸다.

1842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 해 사액되었으며, 그 곳에 향사되었다. 권율 장군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으며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선거이

선거이(宣居怡)
선거이
  • 생몰 : 1550(명종 5)~1598(선조 31)
  • 본관 : 보성(寶城)
  • 자 : 사신(思愼)
  • 호 : 친친재(親親齋)
설명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판서 선형(宣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선상(宣祥)이다. 임진왜란 때 육전과 해전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20세이던 다음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였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을 역임하고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진도군수가 되었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전라 병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 해전에 참가하여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권율 장군을 도와 금천(衿川, 지금의 시흥)에 주둔하여 승첩을 올렸는데 이때 크게 부상을 입었다. 다음 해인 1593년 전라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으로 집결하였다가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 장군과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공격하다가 또다시 부상을 입었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 해에 황해병사가 되었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 의기투합하였다. 나이는 이순신보다 5살 어렸지만 계급은 7등급이 앞서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 상주 등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정유재란 때 울산 전투에 참가,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함께 싸우다 49세 때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읍 보성리 동륜마을에 있는 선씨오충사(宣氏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순조 1년(1801) 1월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조경

조경(趙儆)
조경
  • 생몰 : 1541(중종 36)~1609(광해군 1)
  • 본관 : 풍양(豊壤)
  • 자 : 사척(士惕)
  • 시호 : 장의(莊毅)
설명

조선 중기 무신으로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안국(安國)이며, 어머니는 생원 권세임(權世任)의 딸이다. 43세 때인 1589년(선조 2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제주목사를 거쳐 1591년 강계부사로 있을 때 유배 온 정철(鄭徹)을 우대한 죄로 파직되었다가 다음 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로 임명되었다. 황간, 추풍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으며, 이어 금산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수원부사를 역임할 당시 독산성에 주둔한 권율 장군이 조경을 조방장으로 삼아 적에게 포위된 왜군을 물리쳤으며 다음 해 1593년 권율 장군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행주대첩을 이루었다. 행주대첩이 있었던 1593년 2월, 조경 장군은 권율 장군과 함께 독산성을 떠나 행주산성에 입성하여 목책을 설치하고 총통과 화차 등 각종 무기들을 배치하여 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특히 조방장 조경의 행주산성 진지 권유와 권율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중 목책을 설치한 점은 행주대첩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행주대첩 이후 조선은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 전공으로 조경 장군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도성서도포도대장(都城西都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1593년『기효신서(紀效新書)』의 신진법(新陣法)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의 소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편제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고, 다음 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함경북도병마사,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에 봉해졌다. 조경 장군은 무신이었으나 사서(史書)를 두루 통하여 고사에 밝았고 늦게 급제하였으나 명망이 높아 사람들이 모두 대장의 재목으로 기대했다. 조경장군의 묘는 안산시 건건동(반월동)의 고등골에 있으며, 풍양조씨 동추공파 풍결사 아래쪽에 있다.

변이중

변이중(邉以中)
  • 생몰 : 1546(명종 1)~1611(광해군 3)
  • 본관 : 황주(黃州)
  • 자 : 언시(彦時)
  • 호 : 망암(望庵))
설명

조선 중기 문신으로 전남 장성에서 1546년 태어났다. 변택(邊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 이씨(咸豐李氏)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세에 나주 오씨 오인준(吳仁俊)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23세인 156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인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 30세 때 정부인과 사별하고 31세에 대사간 소세량(蘇世良)의 증손녀이며, 부장(部將) 소형선(蘇亨善)의 딸 진주 소씨(晉山蘇氏)와 재혼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병마와 군기를 수습하고 수원에 주둔하며 권율과 함께 독성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전공을 세우고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독운사(督運使)를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 석을 조달해 명나라 군대에게 공급하였다. 1600년에는 사옹원정,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으로 내려가 66세인 1611년 별세하였다. 위성공(衛聖功)으로써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어 모관(某官)에 추증되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문집으로 󰡔망암집󰡕이 있으며, 특히 화차 설계도를 싣고 있는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은 화차 제조의 문헌자료로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인 동시에 세계 무기역사에도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귀(李庭龜)가 지은 묘갈명 등에는 변이중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한 찬사를 싣고 있다. 정부인 나주 오씨 사이에서 2남을 낳았으나 장남은 일찍 사망하였다. 차남 변경윤(邊慶胤)은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을 지냈다. 둘째부인 진산 소씨는 4남 2녀를 낳았으며, 맏딸은 사인(士人) 김자점(金自點)과 혼인했다.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장성(長城) 구기봉(九岐峯)에 있다.

이빈

이빈(李蘋)
  • 생몰 : 1555(명종 10)~미상
  • 본관 : 전주(全州)
  • 자 : 중결(仲潔)
설명

부친 이의경(李義卿)이 진천부령(鎭川副令)이었던 것으로 보아 종실의 지파로 보인다. 선조(宣祖) 16년(1583) 29세의 나이로 별시(別試) 무과에 합격하였다. 무과에 합격하기 전에는 충의위(忠義衛)의 전력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빈의 행적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아 잘 알 수 없으나,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격전을 벌이다 화살이 거의 떨어져 성이 함락될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공급해줌으로써 왜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경기수사 전라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행주산성 전투 후에 한강변에 주둔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도 선조 32년(1599) 9월에 순천부사(順天府使), 선조 35년 1월에 제주목사(濟州牧使), 같은 해 윤 2월에 경상병사(慶尙兵使)를 역임하였다.

정걸

정걸(丁傑)
정결
  • 생몰 : 1514(중종 9)~1597(선조 30)
  • 본관 : 영광(靈光)
  • 자 : 영중(英中)
  • 호 : 송정(松亭)
설명

151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났으며, 30세가 된 1544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도순찰사 이준경의 군관이 되어 해남과 강진 등에 침몰한 왜구를 평정하였으며, 이 공로로 해남 남도포 만호, 부안현감이 되어 왜구로부터 서남해안 일대를 지켰다. 다음 해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함경도의 온성과 종성의 부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으며 1572년(선조 5) 경상우수사에 이어 1577년 전라좌수사, 1578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81년 절충장군, 1583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1584년 창원부사, 1587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 수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여 남해안을 지켰다. 1591년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화전, 철령전 등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다음 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수차례 해전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장군은 이미 78세의 노장이었으나,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으로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해전에서도 녹도만호 정운과 함께 적선 100여 척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다. 한산도대첩에서는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1593년 2월에는 충청수사로 행주대첩에 참가해, 화살이 떨어진 행주산성에 배로 화살을 공급해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한 뒤, 창의사 김천일, 경기수사 이빈 등과 더불어 강화도와 선유도, 용산 일대를 장악하여 왜군이 한강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방어사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하였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83살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같은 해 아들인 영광군수 정연과 손자 낙안군수 정홍록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3대가 충절이 다하였다. 포두면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되었다.

처영

처영(處英)
처영
  • 생몰 : 미상
  • 본관 : 미상
  • 자 : 미상
  • 호 : 뇌묵(雷默)
설명

조선중기 승려이며 승병장으로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처영의 생몰연대는 불분명하나 어릴 때 금산사에 출가하여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을 때 묘향산의 휴정을 불러 군사를 모을 것을 명하였다. 휴정은 8도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승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관동(關東)지역은 유정(惟政)이 호남(湖南) 지역은 처영(處英)이 장수로 활약했으며 처영은 대흥사, 금산사, 백양사, 내장사 등에서 호남 지역의 승려 1,000명을 모아 권율 군대와 합류하였다. 처영은 권율장군과 함께 수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이치전투, 독산성전투, 행주대첩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특히 행주대첩에서는 3만 명의 왜군을 상대로 싸우다 한 때 행주산성 서북쪽 방위가 뚫리고 위급한 순간을 맞아 의승병들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후세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휴정, 유정, 처영의 진영(眞影)을 해남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봉안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관과 제수를 보내어 향사하게 하였다. 또한, 그 공덕을 찬송하여 ‘방가주석 선문목탁 동시임란 공존사직 일체거의 보제군생 의병부장 가선대부 중추부사 뇌묵당대선사(邦家柱石禪門木鐸同時臨亂功存社稷一體擧義普濟群生義兵副將嘉善大夫中樞府使雷默堂大禪師)’라는 찬호(贊號)와 직품을 추증하였다. 『금산사지』에는 처영은 금산사에 출가하였고, 뒤에 휴정을 참방하여 선지(禪旨)를 받았다는 기록과 함께, 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보광현랑 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默)의 법호를 받았다고 싣고 있다.

최종수정일 : 2019-11-21 14: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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