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 행주대첩과 한강변

5020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양가와지볍씨부터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고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세요.
길에서만나는문화유산 테마지도
호수공원 문화원 5일장·시장 백송 유적 묘·왕릉 석교 공원 관측소 마을·초가 사당·서원·향교·영사정 성당 산성 시청 현판 청자요지 고인돌 벽제관지 석상 공릉천 참전비·비석 금표비·덕명교비
테마지도 나가기
Meet the cultural heritage of Goyang
 
 

19

1/2 페이지

이동
검색하기

2017년 4월 행주산성에서 삼국시대 석성(石城) 발견

2017년 4월 행주산성에서 삼국시대 석성(石城) 발견

20174, 고양시의 대표적인 문화 사적지인 행주산성에 삼국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이 발견되어 고양시의 역사를 다시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행주산성은 통일신라 (남북국시대) 당시에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번 석성의 발견으로 삼국시대. 그리고 토성과 석성이 함께 쌓여진 성곽으로 확인된 것이죠.. 석성과 함께 수십점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전문가들은 토기들의 무늬, 석성의 축성 방법 등을 통해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017년도 고양 꽃 박람회 기간중 고양600년 기념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임진왜란 행주대첩 보다 1천년전 이전에 행주산성에 최대 높이 6m에 이르는 석성이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 출토 유물

행주산성 출토 유물

지난 3월 행주산성 석성과 함께 발견된 삼국~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고양시에서 추진한 '행주산성 종합정비계획' 학술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수레바퀴 부속품인 차관을 비롯해 가위, 화살촉, 철부 등 철제유물과 '행(幸)자 명 기와와 토기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고양 행주산성 정비사업 부지 내 출토 유물을 통해 그동안 임진왜란의 승전지로만 인식된 고양 행주산성에 대한 인식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며, 토성으로만 알려져있던 행주산성의 석성 발견은 국내 역사학계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행주수위관측소

행주수위관측소

 행주수위관측소는 1930년대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기 위해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에 설립한 시설로 1979년에 공식적인 관측을 종료하였습니다. 해당 위치에서 수위 관측을 시작한 해는 1916년이었으나, 1930년대에 현재 남아있는 관측소를 설립하고 부자(浮子)식 자기수위계(自己水位計: 부표의 오르내림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장치)를 설치하면서 보다 정확한 관측이 가능해졌습니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하천조사서》에 관측소 설립과 관련한 각종 현황이 기록되어 있어 설립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행주수위관측소는 일제 강점기에 실시한 수문 및 하천공사 관련 유물로서 중요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공법 및 기술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로 2014년 9월 1일 경기도 등록문화재 제 599호로 지정받았습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한옥 성당, 행주성당

100년의 역사를 지닌 한옥 성당, 행주성당

행주성당은 1910년에 지어진 한옥성당으로 1928년 현 위치로 이축하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하여 당시 사용하였던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하였고, 1949년 증축하면서 기록한 상량 묵서도 남아있어 변천과정 기록유지가 잘 되어 있으며, 건물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는 등 역사성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후 2015122일 국고보조사업으로 행주성당의 해체복원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권율장군을 배향하는 곳, 행주서원

권율장군을 배향하는 곳, 행주서원

행주서원은 행주산성에서 서쪽, 산성 정문으로부터는 한강방향으로 약 400m 거리에 위치합니다. 조선 후기 헌종 때 왕이 권율 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헌종 7(1841)에 시당을 짓도록 하고 이름을 紀功祠(기공사)로 하였던 것이 행주서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권율 장군을 제향하는 사당을 별도로 두고 이곳에서 후학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가로 18m, 세로 20m의 담장터가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그 안 뒤편으로는 약간 높은 대지에 사당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는데 건물터는 정면 8.4m, 측면 6.5m의 주춧돌 중 아래로는 장대석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석축 아래에는 강당으로 쓰이던 건물이 남아있습니다. 행주서원에는 권율장군을 비롯하여 선거이, 조경, 이빈, 정걸, 처영, 변이중 선생을 배향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례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 역사공원

행주산성 역사공원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한강가에 자리한 역사 공원입니다. 본래 이지역은 1970년대 무장공비들의 침투 등을 막기 위해 군 철책이 있던 곳 입니다. 그리고 현재 시정 연수원과 공원일대에는 군부대가 상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2010년 이후 철책제거 사업이 진행한 후 만들어진 공원이 현재의 행주산성 역사 공원입니다. 역사 공원에는 추강 남효온, 석주 권필, 석탄 이신의 선생 등 고양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시비를 비롯하여, 시정연수원, 평화의 철책과 메시지, 등이 있으며 공원 아래의 한강 방향의 수변 공원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한강 전망대, 웅어배,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거국가 설명문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1741년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를 참고로 하여 조성하였습니다.
행주산성과 고양시 전경

행주산성과 고양시 전경

사적 제56, 해발 124.8m의 덕양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입니다. 성벽은 해발 70~100의 능선을 따라 부분적인 토축을 했는데, 그 길이는 약 1km에 이릅니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급경사로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산성의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 내에는 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고 권율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장사가 있습니다.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대첩기념관 내에는 화차, 신기전, 총통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고양시에서는 매년 314일에 행주대첩제를 열고 있습니다.
행주대첩의 역사와 기록, 행주대첩비

행주대첩의 역사와 기록, 행주대첩비

임진왜란 3대 대첩지 중 한 곳인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에 오르면 행주대첩비가 있습니다. 이 중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는 옛 행주대첩비는 1602년에 세워졌습니다. 행주대첩비는 행주대첩의 주요 경과와 의의,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입니다. 바람과 비로 인해 글씨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휘하 장수들이 힘을 모아 세운 것입니다. 이 비석을 보면 당시 행주대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은 오성으로 유명한 이항복이 글을 짓고 당시 명필인 한석봉이 글씨를 썼습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

592(선조 25) 7월 권율장군은 금산군 이치(배재)에서 고바야카와의 일본부대를 무찌르고 그 공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 명나라의 군대와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수원 독왕산성에서 왜군을 무찔렀고, 15932월에는 서울 서쪽 20리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곳에는 권율의 부대 외에 승장 처영의 의승군이 집결하여 병력은 약 3천여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활··창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와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 등 특수무기로 무장하는 한편,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서 적의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1593212일 새벽 왜군은 총대장 우키타의 지휘하에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부대로 나누어 고시니·이시다·구로다·요시가와 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성을 포위·공격 했습니다. 성 안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수차석포·진천뢰·총통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장군은 직접 물을 더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차고 있던 재를 뿌리고 돌을 던지며 싸웠고, 관과 민, 남과 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습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습니다. 마침 경기수사 이빈과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가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일본군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사방의 시체를 불태우면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관군은 도망가는 적들을 추적하여 130여 명의 목을 베고 우키타·요시다·요시가와 등 일본군 장수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갑옷··칼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입니다.
행주산성-충훈정

행주산성-충훈정

행주산성-충훈정 충훈정은 행주산성 입구 우측에 위치한 2층 한옥 건물로 활터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며 전통 활 체험 등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행주산성-충장사

행주산성-충장사

충장사는 행주산성 내 권율 도원수의 제향을 모시는 사당으로 매년 314일과 행주문화제의 고유제 등의 제향을 모시고 있습니다. 전사청에서는 옷을 갈아입는 곳, 전통 제례복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사용됩니다. 행주대첩제시에는 우리시에서 유일하게 제례악에 맞추어 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행주산성-충의정

행주산성-충의정

충의정은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전통한옥 정자입니다. 현재는 교육 영상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주변에서는 북한산, 한강 등도 조망되어 경치가 좋습니다.
처음 페이지 이전페이지 1 2 다음페이지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