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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 고양의 중심 원당지역

5020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양가와지볍씨부터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고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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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0

고려의 마지막 왕, 고려 공양왕릉

지정번호 : 사적 제191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공민왕 17년인 1368, 고려에 큰 영향을 미치던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기어 북쪽으로 밀려납니다. 공민왕은 1356년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등 원나라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더불어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귀속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개혁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승려 신돈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새로운 지도 이념인 성리학이 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과 동시에 차후 등장할 신진사대부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인 반야(般若)사이에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므로 진짜 왕씨가 아니라고 하여 1388년 폐위시키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천을 받아 창왕을 옹립하였습니다. 얼마후, 이성계는 창왕도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위화도회군으로 시대의 라이벌인 최영을 처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에게 넘어간 그 즈음, 신종의 7세손인 ()’가 공양왕으로 옹립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당시로서는 이미 노년을 바라보던 나이였습니다.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둔 이성계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을 거리낌 없이 추진하였고, 순차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여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함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왕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공양왕의 이름은 요(), 20대 신종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입니다. 비는 창성군 진의 딸 순비 노씨입니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웠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유약한 임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위 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인해 우왕을 강릉에서, 창황을 강화에서 각각 죽였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습니다. 1394년 다시 삼척부로 옮겨졌다가 예정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재위 기간 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계 등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개혁이었습니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가 살해된 후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것이 고려의 마지막 왕조였습니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과 강원도 삼척, 고성에 있습니다. 왜 공양왕릉은 3기가 각각 조성된 것일까요?

공양왕은 원주, 간성 등으로 쫓겨 다니다가 1394년에 삼척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삼척에 공양왕의 첫 번째 능이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된 1416년 군으로 강등되었던 공양왕을 왕으로 다시 추봉하였고 이즈음에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인접한 고양시로 능을 이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공양왕이 최종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은 고양시인 것으로 판단하여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고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양왕의 조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 말의 정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공양왕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려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문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태종 조와 세종조의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고양시 원당의 고려 공양왕릉이 진릉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태종 조에는 이곳에 있는 능을 보수하고 정비한 뒤 능을 지키는 수호소를 만들게 하였으며, 세종 조에는 공양왕의 어진을 안성 청룡사로부터 고양현 능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는 명령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선조 조에 전국에 있는 왕릉을 파악할 때 공양왕릉은 이곳 고양의 능을 진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헌자료만으로 공양왕릉의 위치를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공양왕의 선왕인 우왕과 창왕은 묘조차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공양왕릉의 진위 여부는 발굴조사가 없었던 현재로서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고양시청으로부터 북동족인 벽제로 이어진 원당로 2km 지점의 마을이 왕릉골 마을입니다. 이 왕릉골 마을 입구에서 다시 마을 안쪽으로 1.2km 가량 들어오면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릉이 위치해 있습니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공양왕의 능이, 오른쪽엔 순비노씨의 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능 앞의 석물로는 비석 일좌가 왕의 봉분 앞과 왕비의 봉분 앞에 세워져 있는데, 각각 고려공양왕릉’, ‘공양왕비순비노씨라고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글자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앞으로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양측에는 문·무인석으로 보이는 두 쌍의 석물이 서로 마주보고 세워져있습니다.

정면으로는 개의 형상을 한 석수가 1기가 있는데 이 석물이 고양시에서 전해져오는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수와 비슷한 형태가 대자동에 있는 성령대군 묘에서도 보입니다. 성령대군 묘에 있는 석수는 묘소의 양 쪽에 한 마리씩 위치하는데, 현재의 고려공양왕릉의 석수는 한 마리 뿐 이지만 석수 옆에 보면 석수의 파편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묘소 앞에 석수 한 마리가 덩그러니 있는 묘소는 거의 없으며 어쩌면 석수의 원래 위치는 공양왕릉의 양 옆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석인은 모두 높이가 120cm 내외로 두 종류가 있는데 문관석으로 보이는 능 앞쪽의 것이 더 작습니다. 석물의 양식과 수법은 고려의 여러 왕릉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왜소하고 소박한 것들입니다. 양 릉 중간에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화강암 비가 세워져 있는데 혹자는 조선말 고종 때의 비라고 하나 마멸된 상태로 보아 훨씬 이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묘역의 입구에는 고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과 관련된 연못을 고양시에서 조성해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