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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서 만난 문화유산

북한산 일대는 백운대, 인수봉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많습니다.
백인굴, 송추폭포 등 계곡이 흐르고, 30여 개의 사찰과 많은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그 속에 숨어있는 문화재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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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해서 평화로운 길, 서암문

한적해서 평화로운 길, 서암문

서암문은 일명 시구문이라고도 합니다. 예전에 산성 안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죽어 시체를 내올 때 대서문을 이용하지 않고 이 문을 이용해서 내왔다고 합니다. 이름에서 슬픔이 묻어나지만, 반대로 이곳 길을 너무나도 평탄하고 한적하여 가볍게 데이트하기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효자동 방향으로 서암문을 나서서 10m 걸어갔다가 뒤돌아보게 되면 이 암문이 다른 암문과 다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른 암문은 모두 성벽에 그냥 문을 낸 듯 한 모습인데, 이 암문은 암문 한쪽을 마치 산성의 처럼 튀어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산성이 만들어지고 바로 이곳을 찾았던 성호 이익 선생을 다른 곳은 험준한데, 서쪽이 조금 낮다고 했는데, 아마도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자 방어하기 쉽게 이렇게 만들었나 봅니다. 서암문에서 효자동 방향으로 내려가면 효자원 사거리를 거쳐 효자파출소 정류장이 나옵니다. 반대로 산성 안으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덕암사가 나옵니다.
아미타사(구 덕암사)

아미타사(구 덕암사)

북한산 원효봉 아래 위치한 사찰로 행정구역은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515-19번지입니다. 조계종 선학원 소속이며, 절의 연혁은 북한지에는 나오지 않고, 1966년 박지언이 옛 석굴을 보수해서 대웅전을 만들고 덕암사를 창건한 사실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암굴을 보수하기 전에 석굴 안에 석불이 3구 모셔져 있었고, 석굴의 바닥공사를 할 때 금동불 2구와 도자기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서 덕암사로 중건되기 이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석굴법당입니다. 이 석굴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안쪽으로도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진 석굴 안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상 3구는 6.25전쟁 직후까지도 파손된 채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석굴 안에는 석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삼존상 가운데 좌우의 문수보살좌상과 보현보살좌상은 17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존불상의 본존상은 강원도 철원 안양암에서 모셔왔다고 전하며, 원래 본존상은 현재 서울 은평구 홍제동 환희사 법상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찰 경내에 봉안된 미륵불입상은 1977년에 조성되었는데 팔각 연화대좌 위에 서 있습니다. 머리 위에는 방형의 천개(天蓋)가 올려져 있습니다. 삼성각은 1980년에 세워졌으며, 여기에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미륵불 아래쪽에 자연석굴을 약사전으로 만들었고 1988년에는 3층 석탑이 건립되었습니다. 1994년에 범종각과 범종이 조성되고 2003년에 주지를 맡은 해선이 대웅전 앞에 연못을 만들고 요사채를 새로 짓는 등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큰 바위 석굴을 그대로 살려 만든, 아미타사(구 덕암사) 대웅전

큰 바위 석굴을 그대로 살려 만든, 아미타사(구 덕암사) 대웅전

아미타사(구 덕암사)1966년 거북이 바위굴이라 불리는 오래도니 석굴을 보수해 대웅전으로 삼아 중건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웅전으로 쓰이는 이 석굴은 높이 3m, 면적 약 83규모인데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좌우의 협시보살상인 대세지보살상과 관세음보살상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6호인 덕암사 목조보살좌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이용한 대웅전과는 달리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상이 커다랗게 서 있는 모습이 부조화스럽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절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담긴 아름다운 누각, 산영루

다산 정약용의 시에 담긴 아름다운 누각, 산영루

<산영루 다산 정약용 시조>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선정비 군락 옆 북한천 절벽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누각이 있습니다. 바로 산영루입니다. 자연 암반을 토대로 삼아 10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철(凸)'자 모양으로 개울이 보이는 곳으로 볼록 나오게 정자를 지었습니다. 볼록 나온 곳은 넓은 곳보다 약 30cm 높은데, 모인 이들 사이에 신분이 높은 이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산영루(山映樓)는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영루는 1603년(선조36년) 이정구의 「유삼각산기」에 기록이 나옵니다. 그 뒤 1745년(영조21년) 성능스님의 「북한지」에 '산영루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1761년(영조37년) 이덕무의 「기유북한」에 산영루 기록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화재나 홍수로 없어진 뒤 바로 복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1925년 대홍수 때 떠내려 간 뒤 누각 없이 초석만 있었는데, 2014년 8월 29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복원 전 산영루> 산영루는 성호 이익 선생이 「차삼각팔경운」이라는 시에서 이곳에서 보는 '구름 사이의 달'을 삼각산팔경 중에 하나로 꼽았듯이 예부터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름 높았다고 합니다. 옛 선비들은 여름이면 계속에서 탁족을 했고, 벗들과 모여 앉아 술 한 잔을 나누고, 산 비친 계곡물에 달빛이 비치면 시 한 수를 읊었으리라. 지금도 옛 선비들 문집에 이곳을 노래한 시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숙종이 행차한 북한산성의 정문, 대서문

숙종이 행차한 북한산성의 정문, 대서문

숙종은 서교, 즉 서대문 밖을 지나 의주대로를 거쳐 이곳 대서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대서문을 지나 성 안으로 길이 나 차를 타고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옛 기록을 보면 대서문 주변이 매우 험했다고 합니다. 길도 북한산성에 사는 주민들이 주로 땔감을 해서 등짐을 지고 팔러 나오는 오솔길어었다고 합니다. 1958년 대서문 문루가 복원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방문을 앞두고 경기도지사가 미군부대에서 불도저를 빌려와 넓은 길로 닦아 현재의 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서문의 현판 휘호는 그때 쓴 이승만 대통령을 글씨입니다. 대서문 주변에는 살구나무와 감나무가 특히 많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논이나 밭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경사지에 살구나무나 감나무 등을 심어 과수원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실수들은 길을 따라 하창지까지 경사지에 빼곡히 심어져 있습니다. 하창지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밭이 있던 자리, 집이 있던 자리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밭둑이나 담장, 울타리로 추정되는 곳에 유심히 보면 앵두나무가 드문드문 보입니다. 예전 이곳에 마을이 있을 때 앵두나무가 특히 많았다고 합니다. 봄날이면 앵두꽃이 온통 마을을 감싸 멀리서 보아도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사람들과 함께 앵두나무도 떠난건지, 이제는 어쩌다 일부러 살펴야 눈에 띌 정도라고 합니다.
고양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고양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고양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중심사찰이었던 삼천사 옛터에 남아 있는 탑비로, 고려 초기의 활동한 고승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 943~1034)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대지국사 법경은 고려사(高麗史),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등의 기록을 통해보면, 9497세에 나이로 출가하여 가야사(伽倻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중장년기에 대한 활동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노년기에는 삼천사에 머무르며 주지와 도승통(都僧統)을 지냈고, 102078세에 고려 현종(顯宗, 992~1031)의 원찰이었던 개성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역임하면서 왕사로, 103290세에는 봉은사에서 국사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2년 후인 103492세에 나이로 입적하니 고려 정종(靖宗, 1018~1046)은 시호를 대지라 내렸는데, 그는 고려 전기 법상종의 승려로서는 최초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된 인물입니다. 탑비를 살펴보면, 귀부는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정교하게 조각하였습니다. 거북이의 목은 정면을 향해 꼿꼿이 세웠으며, 네 개의 발은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거북이 등 위에 표현한 귀갑문에는 ()’자를 새겨 놓아 탑비의 제작이 왕실이나 중앙정부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부 바로 앞에 놓인 이수는 긴사각형의 형태로 각 면에 다양한 문양을 장식하였는데, 정면과 배면에는 구름 위에서 화염문의 보주(寶珠)를 호위하는 두 마리의 용을, 양쪽 측면에는 정면에서 등장한 용의 꼬리부분과 구름을 아름답고 유려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현재 <고양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는 비신이 파손되어 귀부와 이수만을 남기고 있지만, 귀부와 이수에 조각수법이 우수하고, 더불어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점,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기존과 달리 다수의 비신편이 수습되어 대지국사 법경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려전기 법상종과 왕실 후원의 탑비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는 미지정되어 있습니다.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87 소 재 지 :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금위영이건기비는 북한산성 내 대성암 아래 옛 금위영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래 금위영은 소동문 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위영 이건기비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뒷면은 땅에 묻혀있고, 옥개는 장대석의 앞쪽에만 낙수면을 새겼습니다. 즉 와비(臥碑)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 부분에 을미즉 대명숭정 갑신 후 칠십이년야 도제조이이명 지)라는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1715)에 도제조 이이명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숙종374월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으로 하여금 백제의 고성인 북한산성을 나누어 개축하게 하고 각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유사시에 대응하게 하라고 하니 그 해 10월에 성곽의 보수가 완료되었다. 금위영은 능암 동남쪽에서 보현봉 아래까지 2,821보를 쌓았다. 1,065개의 살밭이와 2개의 성문(대성문, 소동문)이 있는데 성문 위에 누각을 설치하였다. 이 외에 장대, 방실, 성곽 등을 축조하였다. 태고 외 4개 사찰이 성내에 있으며 군영의 막사와 창고 90여 간을 3월에, 4개 사찰 중 하나인 보국사로 옮겼다. 공사는 8월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사찰, 태고사

고려시대 사찰, 태고사

소 재 지 :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5 태고사는 덕양구 북한동에 위치한 태고대(太古臺) 아래 중흥사 왼쪽 봉우리에 위치하였습니다. 태고사는 14세기 후반, 고려의 고승 원증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고려 멸망 이래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 제19대 숙종 39년 북한산성 축성 때 총섭승(摠攝僧)인 성능에 의해 다시 복원, 창건되었습니다. 그러나 6.25때 소실되어 고려 우왕 때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과 탑비만 500여 년 전의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고사를 창건한 원증국사는 고려말 고승으로 호가 태고 혹은 보우입니다. 성은 홍씨로 본관은 홍주, 충렬왕 27(1301) 양근에서 출생하여 13세에 회암사에서 사사받은 후 가지산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이후 북한산 중흥사 동봉에 절을 짓고 태고사라 명명했습니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원증국사탑비와 산신각이 좌우에 있으며 원증국사탑과 요사체가 상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증국사탑은 19831227일에 보물 제749호로 지정되었는데 탑은 보우의 사리탑으로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석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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