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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5020년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양가와지볍씨부터 세계적인 명산 북한산을 비롯해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과 서삼릉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고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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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능인, 홍릉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능인, 홍릉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 서씨(1692~1757)의 능으로 영조는 그녀를 무척 좋아하여 생전에 옆자리에 자리할 예정으로 자신이 안치될 정혈에 십자를 새긴 돌을 묻어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자인 정조는 구리시의 동구릉에 있는 원릉에 할아버지인 영조를 안치하여 정성왕후 서씨의 오른편 무덤자리는 영영 빈자리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창릉

조선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창릉

석물의 배치는 여느 능제와 같이 『국조오례의』에 따라 조성되었는데, 혼유석 아래에 고리모양을 새기고 팔각장명등의 지붕돌 상륜부에 있는 연잎 등 개성 있는 조각미가 돋보이는 능입니다. 예종(1450~1469)은 경릉에 있는 덕종의 동생인데 이름은 晄(황), 자는 明照(명조)이며, 형이 죽은 뒤 세자가 되어 1468년 9월에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안타깝게도 14개월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안순왕후(?~1498)는 청원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된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며 남편이 죽은 뒤 29년을 더 살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왼쪽의 왕릉이 우측의 왕비 능보다 좀 더 높고 뒤쪽에 있는 것에서 다른 능에서는 보지 못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의 능, 익릉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의 능, 익릉

19대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1661~1680)의 능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여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가 큰 계단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천연두 발병 8일 만에 2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지만 세 딸의 어머니였으며 두 딸은 그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마지막 남은 딸도 그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익릉의 특징은 숙종의 능제간소화정책(능을 간소화하여 조성하는 정책)이 내려지기 전 무덤이면서 장대한 석물과 팔각장명 등은 임진왜란(1592~1598)이후의 변형된 양식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익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에서 보기 드문 익실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익실은 정자 각 기둥 옆에 한 칸이 더 있는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무덤, 순창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무덤, 순창원

 13대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무덤으로 순회세자(1551~1563)는 1557년(명종12년) 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3세의 어린나이에 요절하였습니다.   공회빈 윤씨(?~1592)는 윤옥의 딸로 1559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30년을 홀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회빈 윤씨가 돌아간 후 장례를 치르려 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장례를 치루지 못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의 능, 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의 능, 명릉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원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익릉)으로 숙종(1674~1720)은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장남입니다.   14세에 즉위하여 45년간 재위하였으며 숙종이 집권하던 시기는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정쟁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상업 활동을 지원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습니다.    또한 1711년 북한산성을 크게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만들고 같은 시기 북한산성 행궁지를 조성한 왕이기도 합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0)는 인경왕후의 뒤를 이은 숙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후사가 없는 죄로 희빈 장씨에게 왕비자리를 빼앗겼다가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며 복귀되었습니다.   하지만 건강악화로 7년 만에 사망하였는데 이는 희빈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희빈 장씨는 賜死(사사)되었습니다. 인원왕후(1687~1757)는 숙종의 제2계비이며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인원왕후의 능은 본래 명릉에서 400여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두었는데 영조가 현재의 위치에 능을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인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주신의 묘와 신도비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명릉은 조선조 후기 조선왕릉의 교과서와 같은 곳입니다.   참도, 청자각, 독특한 모형의 석물, 쌍릉, 동원이강형의 배치, 원형보존의 원칙 등이 잘 지켜지고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서오릉 입구에 위치하여 이 일대 왕릉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궁녀에서 왕비가 된 희빈 장씨의 묘, 대빈묘

궁녀에서 왕비가 된 희빈 장씨의 묘, 대빈묘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위치해 있었으나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희빈 장씨(?~1701)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의 신분으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대빈묘는 서오릉 내 경릉에서 창릉방향 옆으로 조금 돌아가면 나오는 서오릉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위치나 묘의 전체적인 꾸밈새, 석물 등이 일반 사대부 집안의 묘보다도 초라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로써 희빈 장씨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을 평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장을 할 때 숙종의 명릉 옆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무덤 뒤의 바위와 소나무 이야기 등 많은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습니다.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 경릉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 경릉

 세조 때부터 시행된 동원이강식의 쌍릉이며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무덤입니다. 보편적인 왕릉은 왕이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봉분이 조성되어 있으나 특이하게도 동원이강식의 능은 왕이 왼쪽, 왕비는 오른쪽에 봉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왕비의 능이 왕의 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화려하여 왕과 왕비의 능을 혼동하게 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조성된 원인이 있는데, 덕종은 예종의 형으로서 사망 당시 왕이 아닌 대군이었으며 세조가 능제간소화정책을 추진 때에 사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덕종릉은 난간석, 망주석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조성되었으므로 왕릉의 예를 따라 왕비의 능이 왕의 능보다 훨씬 화려한 것입니다.  덕종(1438~1457)은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暲(장), 자는 原明(원명)입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예의가 있어 할아버지인 세종과 소헌왕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몸이 약하여 20세 나이로 사망하게 되며 이후 덕종의 차남인 9대 성종이 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합니다.  소혜왕후(1437~1504)는 세조1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어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으며 세조3년에 덕종이 사망하였으므로 3년 동안 두 명의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소혜왕후는 아녀자가 지켜야할 도리를 책에 담은 『女訓』을 편찬하였으며 덕종이 죽은 뒤 47년을 더 살았습니다.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폐위, 사사되었다고 관련자들을 처단할 때 그를 나무라자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서 일어나지 못하여 사망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 희릉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 희릉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1491~1515)의 단릉입니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 의해 양육되어 자란 후 중종반정으로 장순왕후 한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7일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능은 원래 헌릉(서울 서초동)에 있었으나 22년 뒤 김안로의 술책(정광필, 남곤 등이 조성한 묫자리에 큰 돌이 깔려있어서 좋지 않다는)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습니다. 희릉은 서삼릉 중에서 유일한 단릉입니다. 예릉과 함께 서삼릉을 대표하는 왕릉이죠. 조선조 전기의 왕릉으로 석물의 규모도 큰 것이 특징입니다.  
인종과 인성왕후의 쌍릉, 효릉

인종과 인성왕후의 쌍릉, 효릉

12대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쌍릉입니다. 인종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죽자 대왕대비인 정현왕후 윤씨(제9대 성종의 계비)를 더욱 섬겼으며, 아버지인 중종이 위독했을 때에는 먼저 약을 맛보고, 겨울철에도 목욕을 하고 한 곳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분향을 할 정도였습니다.   중종이 죽자 8개월 만에 승하하였는데 부모의 곁에 묻어줄 것과 장사를 소박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여서인지 그의 능은 원래 병풍석이 없다가 인성왕후가 승하한 후 인종 곁에 묻히면서 현재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병풍석을 둘렀다고 합니다.   효릉은 서삼릉 미공개 지역에 위치한 왕릉입니다. 직손이 없어 고양지역 유림들이 왕릉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 릉의 규모와 형식이 크게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조선왕조의 왕릉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 예릉

조선왕조의 왕릉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 예릉

25대 철종(1831~1863)과 철인왕후 김씨의 쌍릉입니다.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철종은 강화도에 살던 중 1848년 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이는 당시 영조의 유일한 혈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 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여 1786년 강화도에 유배되었습니다. 1801년에는 천주교인이라 하여 은언군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되었습니다.   게다가 철종의 형 원경은 모반을 꾸미다 발각되어 사사되었으니 철종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왕이 된 철종은 힘든 생활을 이어가다가 재위 4년, 6개월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예릉은 이러한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으로 규모가 조선왕릉 중에서도 매우 크고 화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의 왕릉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입니다.        
정릉과 효릉과 예릉을 합한 능, 서삼릉

정릉과 효릉과 예릉을 합한 능, 서삼릉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삼릉은 고양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1865년 희릉과 효릉 사이에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자리 잡게 되면서 서삼릉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을 조성하면서 사삼릉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중종의 정릉이 조성되었으나 서울 삼성동 선릉 곁으로 옮겨갔고 중종의 아들인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철종과 비 철인왕후 김씨의 예릉이 있습니다.   총면적은 약 7만여 평이며 본래는 130만여 평에 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곳으로 분할되어 현재의 면적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중 절반가량이 비공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밖에 소경원, 의경원, 효장원 등 園(원) 3기와 폐비 윤씨는 회묘를 비롯한 45기의 묘와 태실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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