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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과 함께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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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장군생가

장흥장군생가

장흥 –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친 독립운동가 1903년~1983년 독립운동가 군인 중국헌병영장 “내 한 몸 희생하여 조선이 독립만 된다면” 장흥장군이 없었다면 조선독립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의 모든 삶을 나라를 위한 일념 하나로 살았던 사람이 장흥 장군입니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였고, 헌병대를 이끌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일본이 망한 후에도 한국으로 들어와 우리나라 초대 헌병 사령관 역할을 하며 해방 후 질서유지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사욕이 아닌 국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장흥. 오로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살고 있는 지금의 권력층을 보며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고양의 여성 -인원왕후(1687년~1757년 숙종의 계비)

고양의 여성 -인원왕후(1687년~1757년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1687년~1757년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없었다면 조선시대 왕족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 이후 경종이 즉위한 이후 왕대비가 되었습니다. 후궁인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 임금이 왕에 오르는 데 방패막이를 했던 인물이 인원왕후입니다. 후궁의 소생에게 왕 자리를 넘길 수 없었던 여론을 잠재우고 영조를 임금으로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만약 인원왕후가 없었다면 조선 왕족의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고양의 여성-장희빈(장옥정) (1659년~1701년 숙종의 빈이며 경종의 생모)

고양의 여성-장희빈(장옥정) (1659년~1701년 숙종의 빈이며 경종의 생모)

장희빈(장옥정) (1659년~1701년 숙종의 빈이며 경종의 생모) “시대의 악녀인가? 아니면 정치 싸움의 희생양인가?” 장희빈은 숙종의 부인으로 사극 드라마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 중의 한 명입니다. 젊은 시절 숙종과 불 같은 사랑을 했던 장희빈은 경종을 낳아 왕비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이후 당파 싸움 속에서 42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합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장희빈의 행적에 대해서 지고지순한 여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대의 악녀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장희빈의 업적은 성군 중의 한 명인 숙종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 번쯤 체크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장희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희빈은 시대의 악녀일까요? 아니면 정치 싸움의 희생양이었을까요?
고양의 여성-밥할머니

고양의 여성-밥할머니

밥 할머니 – 고양의 대표 여성 의병장 출생미상 “나 하나쯤이라는 생각이 국가를 망칩니다.” 나 한 명 잘못한다고 뭐 얼마나 잘못되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이 모여 세상을 망칩니다. 이와는 반대로 밥 할머니는 미약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구국활동을 한다면 국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밥 할머니는 실제로 동네 아낙네들을 모아 의병대를 만들고 행주산성 일대에서 적을 물리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밥을 해주고 금품을 주며 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 아녀자의 작은 몸짓이 나비효과가 되어 우리나라는 왜군을 이겨내고 승리한 것이 아닐까요?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는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큰 위인입니다.
고양의 청백리 – 최영

고양의 청백리 – 최영

최영 – 청렴결백의 상징이자 고려의 마지막 장군 (1316년~1388년 고려 말 명장이자 고려왕실의 충신)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가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라는 말로 유명한 최영 장군은 총 80여회 전쟁에 나아가 승리를 하여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상을 내리면 모두 다시 나라에 되돌리는 충직한 장군이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최영 장군의 청렴결백에 감탄한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충신이 되기를 간청하였으나 자신은 고려인이라 칭하며 죽음을 맞이한 장군입니다. 청렴이 사라진 현재 많은 이들이 귀감을 사야 되는 위인. 바로 최영 장군입니다.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이신의)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이신의)

고양 8현은 고봉동에 있었던 문봉서원에 모셔져 있는 여덟 분의 훌륭한 분들을 말합니다. 이 분들은 추강 남효온, 사재 김정국, 복재 기준, 추만 정지운, 행춘 민순, 모당 홍이상,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등으로 조선시대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충신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고양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석탄 이신의(1551년~1627년):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과 인조를 보필하였던 충신입니다. 임진왜란 시기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행주대첩에도 전력을 지원하며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게 만든 위인입니다. 고양의 의병장, 석탄 이신의 선생 기념관은 고양시 덕양구 흥도동 도래울 마을에 있는 이색적인 전시관입니다. 도래울 마을과 이케아 사이에 위치하여 공원, 사적지, 문화유적,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공간입니다. 이 전시관은 국가나 기관의 지원없이 문중에서 건립하고 운영하고 있는데요. 한옥으로 이루어진 사당과, 전시관, 양소당 건물로 이루어져 있지요.. 이곳 석탄 이신의 전시관은 2014년도에 후손들이 조선조 중기의 의병장, 학자, 정치인, 문학가 였던 석탄 이신의 선생의 업적과 삶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석탄 선생은 고양8현중 한분이시면서 자랑스러운 고양인, 경기도 호국의 인물 등으로 선정된 인물이며 선생의 묘와 신도비, 장대비 (將臺碑)는 모두 고양시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이 수 십 억원을 들여 전시관을 건립하고 운영하는 보기드문 사례라 할 수 있지요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민순)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민순)

고양 8현은 고봉동에 있었던 문봉서원에 모셔져 있는 여덟 분의 훌륭한 분들을 말합니다. 이 분들은 추강 남효온, 사재 김정국, 복재 기준, 추만 정지운, 행춘 민순, 모당 홍이상,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등으로 조선시대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충신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고양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행춘 민순(1591년~1591년): 민순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권력욕에 취하지 않고 오롯이 선비의 길을 가며 옳은 소리를 했던 위인으로 유명했습니다. 높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할 수 없다며 모두 사퇴하였고 향리에서 후진교육과 학문연구에만 전심하였던 위인입니다.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기준)

고양 8현 – 고양의 역사와 함께했던 8인의 성인들(기준)

고양 8현은 고봉동에 있었던 문봉서원에 모셔져 있는 여덟 분의 훌륭한 분들을 말합니다. 이 분들은 추강 남효온, 사재 김정국, 복재 기준, 추만 정지운, 행춘 민순, 모당 홍이상, 석탄 이신의, 만회 이유겸 등으로 조선시대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충신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고양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복재 기준(1492년~1521년): 기준은 조광조와 함께 조선의 구태의연한 정치를 척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묘사화 사건이 일어나 유배되었고, 그 후 타살 되었습니다. 지금도 조광조와 함께 기준이 조선의 혁명을 주도했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가순

이가순

양곡 이가순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룬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습니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 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게 됩니다. 201011월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이가순 선생을 선정하여 이가순 선생과 이원재 선생의 공적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양시에서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양수장 내의 이가순 선생 송덕비를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는 고양 행주산성역사공원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정재용

정재용

정재용 –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세에 알리다 1886년~1976년 독립운동가 “정재용 선생이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의 시작은 정재용 선생의 낭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3.1운동을 벌이기로 했던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하기로 정한 탑골공원진입에 실패하자 그 날 참석했던 많은 이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때 학생대표였던 정재용 선생이 연단에 나서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이후 3.1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정재용선생의 용기가 없었다면 역사 속에 3.1운동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주신

김주신

김주신 – 검소한 선비의 삶을 선택했던 숙종 임금의 장인 1661년~1721년 조선 후기의 문신 “나는 단지 왕의 장인일 뿐 내가 왕이 아니다.” . 김주신은 숙종 임금의 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사사로운 사건에 연루될까 두려워 김주신은 궁궐 출입도 하지 않으며 외척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책자를 많이 남기며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던 문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거주했던 집은 누워서 보면 하늘의 별이 보였을 정도로 검소했고, 그 규모도 왕의 장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한 대통령도 측근비리에 관해서는 무사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치사에 숙종 임금의 장인이었던 김주신의 삶이 다시 재조명되는 이유입니다.
숙종

숙종

숙종 – 고양을 사랑하고 고양인이 되고 싶었던 임금 1661년~1720년 조선 19대 국왕 “만약 숙종 임금이 고양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고양은 없다.” 조선 19대 숙종 임금은 고양이 풍수지리 적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그곳에 백성들과 함께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숙종 임금은 고양을 사랑하시어 지금의 고양에 위치한 서오릉에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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